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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환(李珠煥)

예술가명
이주환(李珠煥)
분야
국악인
생애
소남(韶南) 이주환은 1909년 음력 5월 24일 서울 종로구 관수동 30번지에서 이직상과 최감녀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관향은 초산(楚山), 원래의 이름은 복길(福吉)이었다. 1926년 3월 교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해 4월 이왕직아악부의 아악부원 양성소의 제3기로 입학을 하게 된다. 이왕직아악부 입소 당시 동기는 성경린을 비롯하여 이석재, 봉해룡, 김보남, 김영운 등이다. 3학년이 된 그는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결합하여 아악(雅樂)의 복고를 위한 전악회를 결성하였다. 이것은 18명의 동기생 가운데서 스스로 조금 특출하다고 인정되는 6명이 함께 모여서 연습을 하는 모임이었는데, 그 구성원은 거문고에 성경린, 가야금에 김강본, 대금에 임장길, 해금에 왕종진, 그리고 피리에는 이주환과 김보남이었다. 이주환과 김보남 이 둘은 번갈아가며 피리를 불거나 장구를 잡았다고 한다. 이주환은 이렇듯 매우 진취적인 자세로 아악을 공부하며 동급생을 이끌었던 듯 싶다. 이왕직아악부를 졸업하기 한 달 전인 1931년 2월, 그는 신창희 여사와 결혼을 한다. 1931년 3월 졸업 후, 18명의 졸업생 가운데 이주환, 성경린, 김보남, 이강본, 이재천 등 다섯 사람은 우등졸업으로 다른 동기생들처럼 아악수보를 거치지 않고 대뜸 아악수로 임명이 되었다. 1968년 6월 30일에 그는 복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주환(珠煥)으로 개명하게 되고, 같은 해 12월에는 김옥순과 재혼을 하게 된다. 이즈음 이주환은 종로권번에 가서 한성준 선생에게 승무를 익히면서 그것을 무보로 채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민속무용을 무보로 남기고자 한 것은 당시로서는 이주환 아니면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고 보여진다. 1941년에는 아악사로 승진하게 되며, 1942년 종로권번의 가곡과 무용의 사범(師範)이 되고, 1944년경에는 후에 만든 가곡보의 전신이 되는 <만년장환지곡>을 등사해서 펴내게 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이왕직아악부가 구왕궁 아악부로 바뀌게 된다. 이주환은 구왕궁 아악부에서 아악사들의 교양부장을 맡게 되는데 당시에는 장인식 선배가 아악부의 대표를 맡았고, 이주환이 교육, 이석재가 연주, 그리고 홍원기가 서무를 맡았다. 그러나 해방 이듬해인 1949년 9월 장인식이 일신상의 사정으로 사퇴를 하게 되자, 이주환이 구왕궁 사무청으로부터 정식으로 아악사장 발령을 받게 된다. 해방 이후 그는 아악부 연습실을 이용해서 무용 등의 강습에 힘을 더 기울였지만, 얼마 후 가곡이나 시조의 보급에 보다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매달 거르지 않고 시조강습을 하여 수강자의 수요가 많이 증가하였고, 그 결과 시조를 중심으로 한 모임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1946년 7월, 가람 이병기를 회장으로 하여 시조연구회를 결성하게 되고 시조강습회를 개최하게 된다. 또한 1947년에는 당시 문교부가 주최한 제2회 전국음악경연대회 심사위원을 맡게 된다. 그는 이후 아악사장의 자격으로 시조 강습을 통해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은 남을 가르치면서 정가의 실력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고 당시의 이주환을 기억하는 원로국악인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주환은 성악가로서의 목을 타고 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피나는 노력에 의해서 서서히 주위에서 추앙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평생 가곡, 가사, 시조 등 정가의 보급에 앞장선 공로로, 1956년 12월 10일 국악진흥회가 주최하는 제1회 국악상 공로상을 수상했고, 1958년 5월 15일에는 제7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음악부분)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매우 차분하게 주위를 정리했다고 한다. 고악보가 귀한 시절, 그는 어렵게 구한 <금합자보>를 필사해 두기도 했는데, 그의 손때가 묻은 이 고악보가 소남의 기증으로 해서 현재 국립국악원에 소장됐다. 그는 자신의 죽음과 함께 국악계의 귀중한 자료들이, 자신의 죽음 뒤에 없어질 것을 염려해, 옛 거문고 악보 등을 국립국악원이나 주위 분들에게 희사하기도 하면서 1972년 11월 30일 자택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약력
1926년 교동공립보통학교 졸업, 이왕직아악부 3기 입학 1931년 이왕직아악부 졸업 1946년 시조연구회 결성 1949년 아악사장 발령 1950년 한국음악가협회 최고위원 피선 1954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소장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초대회원으로 피선 1968년 한국정악원 이상장 피선 1972년 사단법인 가곡보존회 이사장 취임
상훈
1956년 제1회 국악상 공로상 1958년 제7회 서울특별시 문화상 1968년 대통령표창 동백장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가곡 예능보유자 지정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예능보유자 지정 1071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저서
<고금시조선>(1958) <가곡보>(1960) <가곡보 속>(1962) <시조창의 연구>(1963)
음반
<소남가곡선집>, 그랜드레코드, 1971 <이주환 가곡 가사 전집>, 지구레코드, 1989
리뷰
이주환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아악부를 국가에서 경영하도록 국회에 청원을 하게 되는 대표의 역할을 맡게 된다. 1950년 2월 26일 한국음악가협회 최고위원으로 피선된다. 그해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아악부를 국가에서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 드디어 1950년 4월 10일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국립국악원이 개원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보다 하루 전인 4월 9일, 국립국악원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부산에서 개원하게 된 국립국악원의 청사는 당시 용두산 공원에 있었다. 전쟁 이후, 국악원은 서울로 옮겨 오게 되고, 1954년 10월 1일부터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의 소장직을 겸임하게 된다. 그리고 1954년 3월 25일 우리나라 최초로 시행된 대한민국예술원의 초대회원으로 피선된다. 그는 예술원 회원이 된 후, 시조와 관련된 글들을 지면에 발표하곤 했는데, 그의 글 가운데 ‘시조창의 연구’가 있다. (……) 시조에는 경제, 영제, 완제 등 지방에 따라 특색이 있고, 평시조·평지름시조·사설시조·중허리시조·여창지름시조·우조시조와 평조지름시조로 세분하여 그 성격과 특징에 관해 논하고 있다. 특히 사설시조에 있어서 가창 가능의 자수고는 통계와 실제 창(唱)의 경험에 의하여 얻은 결과임. - <국악대사전>, 장사훈, 국립국악원, 2000 아버지는 무엇인가 항상 열심히 하고 계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가의 보존과 후진 양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 일은 한국정악원과 가곡보존회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나는 아버지를 따라 정악원에 가끔 갔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장구를 앞에 놓고 여러 사람을 지도하시던 일과 반주에 맞추어 가곡을 열창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어제의 일같이 손에 잡힐 듯 하다. 특히 수술을 받으시기 직전에 이미 기력이 쇠약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1회 전국가곡경연대회를 주관하셨는데 아버지의 가곡에 대한 열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 <가슴에 남아있는 아버지 이주환의 따뜻한 모습>, 이재경, 년도 미상 이주환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있어서 정가의 전수와 보급을 위해 혁혁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음성이 담긴 정가의 음향자료도 빈약한 형편이고,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다각도의 평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와 같은 1차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소남 또는 정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대가 정가나 정악에 대해 소홀히 함은 단지 음악만의 손실만이 머무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들의 정신의 축을 이루었던 선비정신을 잃는 것이라 할 것이다. 평생 세속의 명예를 좇기보다 정가 그 자체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살아왔던 이주환의 삶은 그러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 ‘정가의 달인’, 윤중강,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관련도서
<우리 국악 100년>, 한명희, 현암사, 2001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관련사이트
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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