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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린(成慶麟)

예술가명
성경린(成慶麟)
분야
국악인
생애
성경린은 1911년 음력 9월 18일 여의도 북쪽의 밤섬에서 태어났다. 서울 토박이로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친정인 종로구 계동의 외가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이수익은 기독교에 귀의해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늘 성경을 읽거나 문학서적을 탐독하셨기 때문에 어린 성경린도 그런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사립 승동기독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고 잘했다. 그 영향으로 그의 어린 시절 꿈은 문학으로 뜻을 펴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그는 중학교에 진학할 만큼 넉넉하지 못했다. 따라서 취직이라도 해서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외가 아저씨뻘 되는 분의 권유로 이왕직아악부양성소 시험을 치르게 된다. 모집 정원 18명에 지원자는 80~90명이나 됐지만 성경린은 무난히 합격했다. 이 때부터 그의 아악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는 매달 15원이라는 거금의 장학금(당시 쌀 한 가마에 7원 정도)을 받으며 열 다섯 살에 중학과정을 공부하며 가장 노릇까지 하게 된 것이다. 성경린은 1926년 4월에 이왕직아악부 아악생 제3기생으로 입학했다. 중학생 과정인데, 1년 동안 배운 실기의 양은 엄청났다. 이후 성경린은 1946년 3월부터 경성방송국에서 명(名)해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국악 해설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소양과 능력이 풍부한 그는 성춘풍이니 이춘풍이니 하는 필명으로 라디오 창극, 국악 무대 등의 원고를 쓰기도 했다. 틈틈이 고대소설과 야사 등을 뒤적거려 국악 무대의 자료를 찾는 것도 일과 중의 하나였다. 그가 아악의 보전에 대해 헌신적 노력을 바쳤던 대표적 사례로는 이주환과 함께 했던 활발한 활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주환과 성경린은 광복 직후 대한국악원과 아악부 간의 갈등에서 부원의 동요를 막고 아악부를 유실시키지 않은 공로를 세웠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운니동 국악원 집을 빼앗기고 아악이 계승되기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을 때 계동의 조그만 사가에서 그 불씨를 지켜온 공로는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는 1950년대 이화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전임교사는 아니지만 한참동안 출강하면서 국어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처럼 다른 분야에 대한 그의 폭넓은 관심은 인접문화에 대한 이해와 교분을 갖게 했으며, 특히 월탄 박종화(전 예술원회장) 등과도 친교를 맺으며,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1997년 세종대왕 탄신 육백 돌을 맞아 제정될 육백 돌 대상을 수상하는 결과를 낳았다. 문화계 지도자로서의 성경린의 역할은 해방 직후 젊은 시절부터 비롯된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에 개원한 국립국악원의 제2인자인 악사장을 맡고, 1972년 국악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 등 그는 조용한 가운데서도 차분하게 국악 행정을 펼쳐 나갔다. 또한, 성경린은 많은 레코드 출간에도 기여를 했다. 주로 레코드의 해설서를 쓰는 작업이었다. 국악대전집, 민요삼천리 등의 전집류 레코드 출간에는 그의 해설이 빠질 수 없었다. 그는 아직도 국악원에서 후진들을 지도하고 우리나라 국악을 육성하며, 국악발전의 자취들을 기록하는 귀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약력
1931년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양성소 졸업 1931년 이왕직(李王職) 아악수 1938년 이왕직(李王職) 아악수장 1941년 이왕직(李王職) 아악사 1945년 구왕궁(舊王宮) 아악사 1949년 서울시문화위원 1950년 국립국악원 악사장 및 국악사양성소 부소장 1954년~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1년~ 1972년 국립국악원장 겸 국악사 양성소장 1961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 1961년 문교부 교육과정 심의위원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지휘보유자 1964년~1976년 문화재위원 1970년 무형문화재보호협회 이사장 1972년 국악고등학교 교장 1973년 가곡보존회 이사장 1977년 국악원 자문위원, 연구원, 사범 1980년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이사 1980년 CIOFF 한국위원회 위원 1981년 현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1982년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겸 2분과위원장 1983년~1988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국악) 1983~ 국립극장 종신단원 1984년 국립극장 운영위원 1985년 문화재위원회 제4분과 위원 1989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현재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상훈
1958년 방송문화상 1960년 서울시 문화상 1962년 홍조소성훈장 1963년 대한민국 문화포상 1968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0년 은관문화훈장 1997년 세종대왕 600돌 대상 1998년 방일영국악상
공연
1966년~1967년 국립국악원 일본 및 대만 공연, 연주단장 1972년 국립국악원 미국, 캐나다공연 1977년 국립국악원 홍콩아시아 예술제 참가 1979년 민속예술단 일본공연 1985년 일본아시아 예술제 민속예술단장
저서
<朝鮮音樂 독본>, 1947 <조선의 아악>, 1947 <수상집(雅樂)>, 1975 <한국의 무용>, 1976 <한국음악논고>, 1976 <국악감상>, 1976 <수상집(노을에 띄운 가락)>, 1978 <한국전통무용>, 1979 <세종시대의 음악>, 1985 <국악학 논총>, 1992 <관재논문집> <국악의 뒤안길>
리뷰
관재는 1931년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로 시작해 1972년 국립국악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42년의 긴 세월을 구(舊)아악부의 보전과 오늘의 국악원으로의 발전에 헌신적인 노력을 해 국립국악원의 산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 ‘제5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 관재(寬齋) 성경린’, 이혜구, 방일영문화재단, 1998, 10쪽. 우리나라 아악과 정악의 소중함과 그 예술성을 예찬한 선각적인 비평가였다. 그가 집박한 <수제천>이나 <여민락>을 들으면 생명력이 솟구치는 것과 같은 충동을 받는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분이었다. 말하기 보다는 덕을 쌓고 인격을 완성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 혼을 간직한 한국인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언어와 행동이 모범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약속 시간을 단 1초도 늦는 것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한 황병기의 말이나, “옷매무새는 물론 걸음걸이까지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수업시간이나 약속 시간을 어긴 적도 없다.”고 한 윤미용의 말을 보더라도 그의 인품이나 평소 생활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성경린! 국악의 시스템을 계속 발전시키고 항상 깨끗한 인상으로 국악계의 사표로 우뚝하게 서 계신 선생님. 그는 지금도 쉬지 않고 글을 쓰고 거의 매일 제자를 가르치신다. 나는 지금도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를 찾는다. - <방일영국악상 10년>, 최종민, 방일영문화재단, 2003년
관련도서
<국악감상>, 삼호출판사, 1994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연계정보
-종묘제례악
관련사이트
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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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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