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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金星振)

예술가명
김성진(金星振)
분야
국악인
생애
김성진은 1916년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묘동에서 안동 김씨인 김익룡과 김해 김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세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편모 슬하에서 교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시 관비(官費) 15원과 교과서 피복대까지 지급한다는 스승의 권유에 따라 아악부양성소 제4기생으로 입소했다. 동기로는 김기수(대금), 김준현(피리), 이창규(가야금), 홍원기(가야금) 등이 있다. 그는 여기서 당대 최고의 대금명인 김계선, 아악수장인 유의석, 제1기생인 박창균, 제2기생인 김천룡(인간문화재 김천흥의 친형)의 훈도를 받았다. 문학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그가 쓴 동화가 매일신문의 작품모집에 1등으로 당선되어 10원의 상금을 타기도 했다. 그의 아호는 녹성(錄星), 문학소년이었던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밤하늘의 별들 중에서 밝고 빛나는 별보다는 그 옆에서 희미하게 초록빛을 내던 별이 좋아 스스로 녹성이라고 이름짓게 된 것이라 한다. 그는 그 이름처럼 늘 겸손의 뜻을 품어 평생을 함께 하였다. 이왕직아악부에 들어 온 김성진은 학과에서는 그리 출중하지 않았지만 대금 실기를 비롯한 악과에서는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실제 그는 아악부 입소 이래 한 시도 떼어놓지 않았던 대금을 부지런히 연마했다. 김성진은 생전에 이 시절을 되돌아보며 ‘남들이 한 시간 할 때면 나는 두 시간씩 연습을 하면서 노력하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1936년 3월 그는 졸업과 동시에 아악부 아악수로 임명되었고 이것이 평생을 대금과 함께 한 그의 필생의 업(業)의 첫 출발이 된 셈이다. 그는 1941년 25세 때 중매로 만난 조갑순과 결혼하게 되며 이후부터 김성진의 대금은 일반인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는 연주가로서도 교육자로서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가 40대 중반이었던 1960년, 이 무렵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인 존 리비는 국립국악원에서 그의 대금소리를 들었는데, 그는 자신의 비망록에서 “김성진의 대금소리에서 평온을 얻었노라”라고 기록하였다고 한다. 존 리비 컬렉션 중에는 대금 거문고 병주가 수록돼 있다. 김성진은 1964년 12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대금보유자로 지정되었고 1968년 12월 2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대금정악의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는 평생토록 산조를 불지 않고 정악만으로 일관했다. 정악분야에서 유일하게 단일악기가 무형문화재 지정종목이 된 것은 ‘대금정악’이 처음이며 그 첫 보유자가 김성진이었다(피리정악이 1998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금정악이란 대금으로 연주하는 정악으로 풀이할 수 있다. 정악은 본디 합주음악이므로 본래 대금독주의 정악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악을 대금으로 독주를 하면 나름대로 특유의 멋과 색다른 흥취가 있게 된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 강점기, 김계선 등에 의해서 구축되고 바로 김성진에 의해서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대금정악의 대표곡으로는 <평조회상>과 <청성자진한잎>을 들 수 있다. <유초신지곡>으로도 불리는 <평조회상>은 그 상령산의 가락을 자유스럽게 풀어서 연주하는 것으로 은은한 가락과 청아한 음색이 일품이다. 아울러 <청성자진한잎>은 흔히 <청성곡>이라고도 불리며, 대금이나 단소로 연주하게 된다. 가곡의 계면조 <이수대엽(二數大葉)>을 변주한 <태평가>를 장2도 높여서 옥타브 위로 올린 후 관악기의 특징적인 음색 및 주법에 맞게 연주하거나 복잡한 장식음을 첨가하거나 부분적으로는 어떤 음들의 길이를 연장하여 변주시킨 곡이 바로 <청성곡>이다. 김성진은 이 곡을 스승인 김계선에게서 배워 더욱 발전시켰다.
약력
1936 년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졸업 1936년~1947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 1947년 구왕궁 아악부 아악사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 1962년~1973년 국립국악원 장악부 아악사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1호 종묘제례악 기능보유자지정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20호 대금정악 기능보유자 지정 1973년~1977년 국립국악원 악사장 1974년~1981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강사 1974년 중앙대학교 강사 1977년 국립국악원 원장직대 1982년 국립국악원 전속국악단원 1982년~1986년 예술원회 회원 1991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대금강사 1991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 1995년 국립국악원 원로단원
상훈
국악상 방송문화상 아시아음악제연주상 녹조근정훈장 보관문화훈장
리뷰
(……) 김성진의 대금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그의 스승인 김계선에 대해 살필 필요가 있다. 1891년 3월 3일에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궁중의 겸내취(兼內吹)를 지낸 분의 권유로 치룬 악수(樂手) 견습생 선발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내취(內吹)의 길을 걷게 된다. ‘내취’라는 것은 군대의 취악대를 말한다. 그는 1906년 12월 주전원(主殿院)의 내취로 임명된 후 1908년 7월 장례원(掌禮院)의 내취로 옮겼다가 1911년 2월 이왕직아악부의 세악내취(細樂內吹)로 일하다가 1913년 아악수로 임명된 후 이왕직아악부에서 아악생들을 지도하는 중에 1943년 타계한 인물이다. 김계선이 내취가 되기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대금을 배우기 전에 중금을 연마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그는 내취로서 중금을 학습한 후에 당시 궁내부 장악원(掌樂院)에 소속돼 있던 최학봉(1851~?)의 개인교습을 받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는 최학봉에게서 배운 실력을 바탕으로 이왕직아악부에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워낙 실력이 출중하였다. 그는 근대 궁정음악인 가운데 가장 이름을 날린 인물로 “김계선 이전에 김계선 없고, 김계선 이후에 김계선 없다.”라는 말을 남긴 명금(名芩)이었다. 그는 당시 방송이나 공연을 통해서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이런 구한말 불세출의 명금이 1943년 여름에 타계를 하게 된다. 실제 김성진의 대금정악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스승인 김계선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김계선의 대금독주가 장안의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가 타계한 이후 김성진이 계승해서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해방 후 이왕직아악부에서 구왕궁 아악부로 바뀌었을 때도 이 곳을 지켰고 또한 1951년 부산에서 개원한 국립국악원에서도 예술사(국악사)가 되었으며 악사장과 부원장직 등을 맡으면서 평생을 국립국악원을 지킨 분이었다. 아울러서 1955년 4월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중·고등학교)가 개소된 후 대금전공자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거의 30년에 걸쳐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국립국악원과 국악사양성소에서 그는 이왕직아악부의 선배와 동기들과 함께 근무하였는데 김성진의 대인관계와 처신 또한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나 성품에 관해서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이상용(단국대 교수)의 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작은 체구이지만 깨끗하신 외모와 당당하신 풍채로 우리들에게 자신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이주환 원장 선생님, 엄격하고 원칙에만 통할 듯이 늘 차분하신 말씀으로 타이르시는 성경린 악사장 선생님, 당당하신 풍채와 우렁차신 음성으로 우리들의 미래의 사표 되시던 김기수 장악과장 선생님, 상사와 아랫사람들의 중간에서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얼굴을 붉히시며 미안해 하시던 녹성 김성진 선생님. (……) 선생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다정다감하시어 속이 상하셔도 크게 내색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도록 지도하시었으며 언제나 ‘예끼’란 말 한 마디면 모두 해결이 되었습니다.” (……) “언젠가 산행에서 나는 뒤로 몸이 잔뜩 휜 채 바람을 견디고 있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본 일이 있었다. 선 자리가 불행히 바람막이가 전혀 없는 툭 튀어나온 가파른 절벽 위인지라 바람을 견디지 못해 그 몸이 뒤로 휘었을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사뭇 경이로운 기분으로 나는 그때 목숨, 인내, 환경 이런 것들을 생각했었고 그리고 환경에 적응키 위해 몸까지 휘어 온 그 소나무의 인고의 세월을 헤아리며 숙연해지기도 했었다. 대금정악의 명인 김성진, 목련과 진달래 벚꽃을 피우다 돌아와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 4월의 햇빛을 밟으며 그의 뒤를 따라 국립국악원의 복도를 걷던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옛날의 그 소나무를 연상했다. 성문 지붕의 망새처럼 위로 약간 솟구쳐 올라간 왼쪽 어깨와 그와 대조적으로 오랜 풍상을 겪어온 누각의 처마처럼 사뭇 비스듬히 기울어져 내려간 오른쪽 어깨, 그리고 약간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의 뒷모습이 예의 그 소나무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모습은 고희를 앞둔 자연적인 나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금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면 취구(吹口)를 올려 놓는 왼쪽 어깨는 응당 위로 치켜 올라가게 마련이고 그리고 뻗어 지공(指孔)을 쥐는 오른쪽 팔은 으레 아래로 약간 처지기 마련 아니던가. 김성진 씨의 뒷모습은 바로 그 연주할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이 소나무를 휘게 하듯 젓대가 그렇듯 몸을 휘게 만들었구나 하는 깨달음은 내게 한 가닥 심오하고 교훈적인 경건함을 느끼게 했다.”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우리 국악 100년>, 한명희, 현암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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