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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페라의 여명기

작품명
한국오페라의 여명기
(1) 오페라 공연의 시작
서양음악이 한국에 도입된 시기는 19세기 말이다. 개화의 급물살을 타고 서양음악도 빠른 속도로 들어와 순식간에 우리 음악계 전체를 장악했다. 그러한 서양음악의 확장일로에서도 막대한 공연 경비를 전제로 하는 오페라의 도입과 발전은 상당히 늦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오페라가 소개된 것은 194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지하라가극단과 하르빈교향악단 공동으로 10월 25일에서 27일까지 3일간 경성 부민관에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한 것이 효시이다. 서양음악 도입 이후 50여 년이 지나서야 외국인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오페라 공연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나라 음악인들에 의한 첫 번째 오페라 공연은 1948년 1월 16일부터 20일까지 시공관에서 조선오페라협회 산하단체인 국제오페라사 주최로 공연된 베르디의 <춘희>이다. 이 공연은 한국오페라의 개척자로 기록되고 있는 이인선 개인의 주도와 투자로 성사되었다. 이인선은 세브란스 출신의 의사이자 테너 가수로 외국유학까지 다녀온 인물이었다. 이 <춘희> 공연은 오페라라는 장르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연일 만원을 기록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공연의 수준에 대해서는 ‘저속한 악극이나 가극보다 조금 나은 정도’, ‘학예회 수준의 공연’이라는 혹평도 많았다. 이 공연을 둘러싸고 반발도 많았고 잡음도 많았지만, 이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에도 오페라 운동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공연이다. 1949년 1월에는 한·불문화협회 주최로 구노의 <파우스트>가 무대에 올려졌는데, 전막을 공연하지 못하고 3막까지만 공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50년 1월에는 국제오페라사의 두 번째 공연으로 비제의 <카르멘>이 공연되었다. 이 <카르멘> 공연부터는 “종합예술로서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을 받으면서 점차 오페라 공연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2) 최초의 한국창작오페라
한국인이 작곡한 창작오페라에로서의 첫 공연은 6·25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에 공연된 현제명의 <춘향전>이었다.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오페라 공연 이후 단 2년 만에 우리의 창작오페라가 공연되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다. 현제명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졌던 <춘향전> 공연은 창작곡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작품이 공연된 13일간 5만여 명이 동원되었고,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들이 장안에 회자(膾炙)되는 등 이 공연의 여파는 대단히 컸다. 그러나 그러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성격이나 기법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단순히 서양 오페라의 아류에 머물고 말았다는 점, 아리아의 대중화에만 치중하여 예술적인 작품이 되지 못하고 뮤지컬 정도의 수준에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 사용된 기법이 삼화음의 사용 정도의 기본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덧붙여, 현제명의 <춘향전>이 과연 첫 번째 창작오페라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많은 문헌들이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1950년대 이전에도 창작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 공연된 흔적이 나타난다. 1940년대에 ‘향토가극 운동’의 일환으로 작곡된 안기영의 일련의 작품들 <콩쥐팥쥐>, <견우직녀>, <은하수> 등을 단순한 음악극을 넘어선 오페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또한 부산지역에서도 1948년 12월 27일 남조선여자중학교 대강당에 올려진 이주홍 원작·최술문(崔述文) 작곡의 오페라 <호반(湖畔)의 집>에 대한 기록이 발견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앞으로 연구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이다.
(3) 초기 창작오페라들
현제명의 <춘향전> 이외에 창작된 오페라로는 김노현의 <심청전>(1949), 김대현의 <콩쥐팥쥐>(1951)와 역시 김대현이 작곡한 오페레타 <사랑의 신곡(神曲)>이 있다. 이 작품들 중에서는 김대현의 <콩쥐팥쥐>만이 무대화되었는데, 전쟁 와중인 1951년 10월 부산에서 김대현 자신의 지휘로 공연되었다. 또한 현제명의 <춘향전>도 1951년 7월 대구와 부산에서 재공연되었다. 1954년 11월에는 현제명의 두 번째 창작오페라 <왕자호동>이 무대에 올려진다. 한국일보와 서울음대가 주최한 <왕자호동> 역시 현제명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 공연은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전쟁 이후 첫 번째 오페라 공연으로 이후 펼쳐지는 오페라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공연이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지속되던 창작오페라의 열기는 이후 1961년까지 공백으로 남아있다. 기존에 공연되었던 몇 작품들의 재공연이 있었을 뿐, 새로운 작품이 공연되지 못한 채 창작오페라는 침체기에 접어든다. 1958년 7월에 서울오페라단의 제3회 공연으로 현제명의 <춘향전>이 무대에 올려졌다. 1960년 11월에는 고려오페라단이 한국창작곡인 김대현의 <콩쥐팥쥐>를 다시 무대에 올리는데, 이 공연은 ‘가수들이 진열창의 상품처럼 지휘봉을 보기 위해 정면을 향해 얼굴을 나열하고 있었다’며 ‘우리 오페라 운동은 극히 고식적이며, 모방적이며, 실험정신의 싹조차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이 기간 동안 대전 지역에서 새로운 창작오페라 공연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1959년 10월 동화극장에서 대전사범학교 주최로 삼막 오장으로 구성된 <고구려의 딸>이 무대에 올려진다. 양장호가 각색·연출, 안일승이 작곡·지휘하였으며, 연주는 대전사범취주악단이 담당하였다. 전정임 (충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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