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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李仁榮)

예술가명
이인영(李仁榮)
분야
성악가
생애
이인영은 1929년 부산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 영도에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가 기독교 신자로 당시에 교회를 설립하는 등 열심인 집안 분위기 탓에 그 역시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며 풍금을 접하는 등 자연스럽게 음악적 분위기 속에 자랄 수 있었다. 게다가 외삼촌이 폐병으로 돌아가시면서 레코드나 장서 등을 남겼는데 이인영은 이때 다양한 레코드들을 들으며 차츰 음악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마을 교회에 있는 풍금 한 대, 그리고 소학교에 있는 풍금 한 대는 어린 이인영의 음악적 감수성을 키워주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이인영은 이때부터 지금의 바이엘 등 기초 교본을 갖고 혼자서 음계를 익혀나갔다. 그러나 음악을 좋아하지만 공부하는 방법을 몰랐고 따라서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달라져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인영은 어릴 적 다리가 불편하여 집안의 걱정이 많았고 자신 역시 ‘건강이 안 좋기 때문에 남과 달리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약하기 때문에 작은 가게를 하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길 바란다’는 집안 어른들의 생각과는 달리 꿈많은 이인영은 절대 자신의 인생을 작은 섬에서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포부를 갖는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하찮고 시시한 것보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넓은 세상엔 뭔가가 있을 거라는 꿈을 버리지 않았고, 또 실제로 다양한 책을 읽고 꿈을 키웠다. 이때 나이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고 하니 인생에 대한 꿈이 컸던 그는 생각이 깊은 소년이었다. 부모님의 결정으로 상업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소아마비였다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하루에도 2Km에서 4Km 거리의 학교를 매일 걸어서 다닐 정도로 건강해졌다. 그리고 이때 주변 친구들로부터 자신의 음성이 좋다는 칭찬을 많이 듣게 된다. 성악을 해보라는 권유에 처음에는 ‘부끄럽게 어떻게 입을 벌리고 노래를 하느냐’라고 생각하지만 거듭 칭찬을 받자, ‘내가 정말 잘하는가?’ 라는 생각으로 산으로, 바다로 다니며 혼자서 노래를 해보았다고 한다. 그는 이 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음악가가 되리라고는 처음에 생각을 못했었지만 레코드로 통한 그 마력에는 온 몸이 마비가 되어 있었다. 음악회에도 가보았지만 별 큰 감동은 없었다. 그보다도 해설을 읽고 레코드를 듣는 것이 좋았다. 따라서 음량 조절이 없는 옛 축음기를 통하여 음악을 완전히 내 심혼에 불어넣어 보려고 노력하였다. 두터운 이불을 머리에서부터 덮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축음기를 가슴에 대어 두고 음악을 듣기도 하였다. 또 세계 불세출의 최고의 베이스인 샤리아핀의 노래는 듣는 사람의 몸으로 밀려오는 진동이 있어 큰 감동이 있다는 평을 읽었기에 축음기를 마루에 갖다두고 바닥의 진동을 감지해보려고 바닥에 가슴을 대는 등 (……)” - ‘눈물’, 이인영, 출처 미상 그러다가 어느 날 레코드에서 듣던 음성과 자신의 노래 음성이 비슷하다는 확신이 들자 이때부터 음악을 시작해보리라고 결심하게 된다. 해방이 되면서 해외에 있던 음악가들이 대거 귀국하자, 그는 음악가를 찾아가 질문하고 쫓아다니며 그분들의 말씀을 듣고 혼자서 공부를 계속해 간다. 어느 날 한 선생님을 찾아가 테스트를 받은 후 본격적으로 기초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몇 개월을 기초 지도를 받다가 서울로 상경하여 공부할 마음을 갖게 되고 이 때 남산에 위치한 학교를 찾아가 거기에서 읽은 일본책을 통해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고 어렵사리 일본에 도착한 그는 이때 재정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지만 기지와 재치를 발휘해 집안에서 부쳐온 송금을 받을 수 있게 되고, 또 유학생들이 자주 애용한 전당포를 이용하며 학비를 장만하였다. 이인영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무척 낭만적이었다고 이 때를 회상한다. 이인영은 동경예술대학 성악과를 졸업한 후 오디션을 거쳐 후지와라오페라단 단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많았던 그에게 무대는 ‘내 나라도 아니고, 내 청중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러한 아련한 감정으로 노래하는 그의 노래에 청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때 이인영은 ‘이 무대가 고국에서의 무대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꼭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일본에서의 활동 무대를 접고 이후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1956년부터 1971년까지의 일본 오페라단 단원 활동을 끝낸 그는 귀국하여 한국일보 주최로 시공간극장에서 독창회를 갖는다. 임원식 지휘, KBS오케스트라 반주로 서울을 시작으로 대구, 부산, 광주 등을 순회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인영은 공부를 위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오페라 무대에 서며 기량을 닦은 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수많은 오페라 무대, 독창회를 갖는 등 활발한 연주활동을 계속해간다. 이인영은 한국에서 수많은 오페라를 선보이며, 자신이 직접 연출과 출연을 도맡아 하는 등 오페라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성악 무대를 지켜왔다. 또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냈다. 제자들로부터는 인간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각별한 애정과 존경을 받으며 오직 노래를 위한 삶으로 본보기가 되어왔다. 어렸을 적 병명도 알 수 없이 불편했던 다리가 50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보행이 불편해지자, 그는 가급적이면 오페라 무대를 접고 <파우스트>, <이순신>, <라보엠> 등 오페라 연출에 전력을 쏟게 된다. 또 연주자들의 일본과 한국 무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예술원 음악분과 위원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쉬지 않고 있다.
약력
1956년 일본 동경예술대학 성악과 졸업 1956년∼1971년 일본 후지와라오페라단 단원 1960년∼1969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 1969년∼1994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94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명예교수 200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상훈
1997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99년 보관문화훈장
공연
1959년 귀국독창회 1971년 마산시민회관 독창회 1973년 국립극장 독창회 1974년 부산문화회관 독창회 1979년 오스트리아독창회 1983년 대만 대남시립강당 독창회 1975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리사이틀홀 음악회 1986년 뉴욕 메르킨콘서트홀 음악회
오페라
1962년 <돈조반니> 1969년 <카르멘> 1971년 <춘희> 1975년 <라보엠> 1978년 <세빌리아의 이발사> 1981년 <루치아> 1982년 <피가로의 결혼> 1983년 <파우스트> 1987년 <토스카> 1988년 <리골레토> 1998년 <이순신>
논문
<한국어의 모음과 가창발성의 관계>, 이인영, 1968 <가창발성의 비교연구>, 이인영, 1971 <예술조기교육의 실천방안에 대한 성악실기교육의 과학적 접근법 연구>, 이인영, 1990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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