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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숙(李在淑)

예술가명
이재숙(李在淑)
분야
국악인
생애
매은(梅隱) 이재숙은 1941년 5월 31일 서울시 종로구 순화동 126번지에서 이홍규와 김을순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줄곧 재능을 보이던 그는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음악 교사였던 황임춘으로부터 음대 진학을 권유 받는다. 장래 소프라노가 되기를 꿈꾸며 성악공부를 시작하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서울대학교에 국악과가 창설되면서 새로운 국악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두 분의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만당 이혜구 박사와 운초 장사훈 박사이다. 국악과 제1기 입학생이라는 자부심과 불안감 사이에서도 대학 3학년 시절에는 ‘제1회 국악 정기연주회’에서 독주를 맡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1963년 음악학사 학위를 취득하여, 제1회 졸업생이 된다. 최초의 가야금 독주회를 열다 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1964년 10월 28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연주실에서 제1회 가야금 독주회를 개최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가야금 독주회이다. 당시에는 정악이라고 하면 국립국악원 악사들만의 독점물처럼 여기던 시절이었는데, 이재숙은 이 연주회에서 정악, 민속악, 창작음악을 두루 포용하는 신선한 프로그램으로 상당한 이슈가 되었다. ‘옛’ 악기를 가지고 ‘새’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이재숙에 의해 시작된 이러한 프로그램 구성방식은 지금까지도 가야금 연주계에 이어져오고 있다. 이재숙의 새로운 모험은 계속 이어진다. 기존의 정악이나 산조의 연주법에서 벗어난, 당시로서는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전혀 새로운 가야금 독주회(제2회 가야금독주회)를 열기도 하였다. 당시 이재숙은 매우 도전적인 연주가라는 평을 받는다. 한 번은 서양 작곡가 헨치 카우웰의 ‘페르시안 세트’를 연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원래는 인도악기 시타르를 위해서 만든 작품을 가야금으로 연주해야 했다. 하루종일 계속된 연습에도 불구하고 이 난해한 테크닉을 가야금의 공명판과 안죽 사이에 두꺼운 융을 깔아서 가야금 소리를 흡수시킬 수 있도록 만들고 밤새도록 연습해서 결국 작곡가와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또한 대학재학시절 기독교방송과 제휴해서 국악기로 찬송가 반주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색적인 작업이었음에 틀림없다. 최연소 국악상 수상자, 최연소 전임강사 이재숙은 1967년 문화공보부에서 제정한 국악계 최고의 권위있는 상 ‘국악상’을 수상하게 된다. 1967년 4월 20일 국립극장에서 시상식 및 기념연주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적힌 공적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여성으로서 신국악운동의 선구 정악과 민속악(산조)을 전공하고 특히 기성인들의 인습적인 연주 범주에서 탈피하여 왕성한 의욕과 원대한 포부로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시도, 성과를 거두었다. 2. 탁월한 연주기량의 발휘 여성으로서는 우리나라 처음으로 ‘제1회 가야금독주회’를 통해 처녀공연임에도 불구하고 그 천부적인 음악적 소질과 탁월한 기능으로 많은 팬들의 절찬을 받았다. 3. 국악의 신기풍(新氣風) 조성 현대적 정서에 부합되는 신국악작곡을 연주하여 그 폭넓고 다채로운 기량과 특히 독창적인 연주기법은 국악 연주에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여 국악의 향상 발전을 촉진하였다. 4.후진 배양에 헌신 각급 학교 강사로 재직하면서 국악의 이론과 실기에 걸쳐 후진 배양에 전력하여 이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유능한 국악인들을 많이 지도·육성하였다. 5. 참신하고 지성적인 예술활동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다양한 기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고, 항상 국악의 진지한 연구에 온갖 정열을 경주하고 있다. 또한 젊은 국악도로서 지성적인 품위와 예술적 심미관은 주변의 귀감으로서 국악의 발전과 보급을 위하여 그 장래가 크게 촉망되고 있다. 이 상은 1962년부터 시작됐다. 제1회 공로상은 나원화, 작품상은 박초월, 제2회 공로상은 전용산(전추산), 제3회 공로상은 박녹주, 제4회 작품상은 황병기, 제5회 공로상은 김연수. 모두 명인급의 예술가들이 수상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재숙의 수상은 그야말로 ‘국악상’ 역사에 있어서 가장 어린 나이에 최고의 수상자가 되는 기록을 남기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는 곧 당시의 ‘신국악운동’이 얼마큼 시대적인 요구였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일이다. 첫번째 산조악보집과 가야금산조 여섯 유파 완주 이재숙은 1971년 구전으로만 이어져 내려왔고 기록되어지지 않았던 가야금 산조의 여러 유파를 하나의 악보집으로 묶어서 <가야금산조>를 출판했다. 1964년부터 시작된 가야금산조의 오선보에 의한 악보화 작업은 스승인 장사훈, 이혜구 박사의 적극적인 권유가 힘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아울러 그 또한 ‘무형으로 전승되는 국악의 유형화를 위해 무슨 일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두 스승은 과거의 명인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고, 이재숙은 드디어 가야금산조의 여섯 개의 유파를 배우고 이를 악보화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작업을 통해 명인들마다의 고유한 연주적 개성을 습득할 수 있었지만, 또한 오랫동안 악기를 놓았거나 연로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 가락들을 여러 음향자료 등을 통해서 다시 복원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채보 작업은 7년여의 노력 끝에 1971년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1982년 이재숙은 7년만의 네 번째 독주회를 열었다. 4월 16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열린 제4회 독주회에서는 55분이나 소요되는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전바탕을 연주했다. 그야말로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여 연주를 펼쳐나가는 공로를 인정받아 1982년 그는 서울대학교 정교수가 된다. 이후, 이재숙은 1965년에 창설된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악장이 되면서 당시 지휘자 한만영과 악장 이재숙 콤비를 이루며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명실상부한 ‘관현악단’으로서의 체계를 갖추는데 공헌을 해 주었다. 이재숙은 악장을 그만둔 후에도 여러 차례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의 협연자로 등장했으며, 특히 제54회 정기연주회에서는 무려 40여 분에 이르는 협주곡을 소화하여 연주함으로써 또다시 큰 화제거리를 낳기도 했다. 해외에 국악 보급 운동 이재숙은 1979년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초청교수로 가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가야금과 장고 연주법의 교육용 필름을 제작하고 지도하는 등 해외에서 국악을 알리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또한 1982년 당시 서울대학교 국악과 학과장을 맡고 있던 그는, ‘한미 수교 백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당시 서울대 국악과 학생 20여 명과 함께 미국 순회연주여행을 가졌다. 1983년에는 중국 고웅(高雄)의 동아예술절에 참가하여 독주하고,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제3회 대한민국국악제에서 독주를 하였으며, 독일 쾰른에서 한·독수교 100주년 기념 가야금 독주회와 영국 캠브리지에서 가야금 독주회 개최 등 해외연주활동과 국내활동을 병행하였다. 다현가야금 시대를 열며, ‘아시아금교류회’를 창단 1986년 10월 23일에는 KBS FM의 ‘21현 가야금을 위한 FM 국악무대’가 열렸다. 이 연주회는 이성천이 고안한 21줄 가야금의 시연회를 겸한 것이었는데, 이 연주회에서 이재숙은 21현가야금 독주곡 <바다>를 초연하였다. 이렇게 다현가야금 시대를 열면서 전통악기인 가야금의 새로운 창작활동을 열어가며 ‘아시아금교류회’를 창단, 아시아 국가간의 예술교류에도 앞장서는 등 연주자로서, 교육자로서 그 역할을 성실하게 펼쳐나갔다. 희망을 알리는 매화처럼 이재숙은 1994년부터 ‘후학을 위한 교육자료’를 남기기 위해 가야금산조 여섯 유파를 완주하는 독주회를 열게 된다. 이 연주회는 그에게 연주자 뿐만 아니라 특히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을 분명히 하는 연주였다. 그는 이 연주회를 통해 직접 산조 유파간의 음악구조나 유파간 특징을 직접 ‘들어가면서’ 비교해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교육자로서 연주자로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인물답게 그에게는 아주 많은 ‘최초’라는 접두어가 붙어다닌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의 첫 입학생이자 졸업생이며 대학원의 첫 졸업생, 서울대 최연소급 전임강사 등 그리고 가장 권위있는 국악상을 받은 최연소 수상자이기도 했다. 또한 최초 여성악장을 거치며 2000년에는 20세기 최후의 KBS국악대상의 대상을 수상하였다. 이재숙 교수의 회갑에 즈음하여, 스승 만당 이혜구 박사는 그에게 매화의 매(梅)자를 호의 첫 자로 주셨다. 그리고 화가 일랑 이종상 선생의 권유로 ‘매은(梅隱)’이라는 호가 탄생되었다.
약력
1963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196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 1976년~ 한국국악교육학회 고문 1979년~1996년 영국 캠브리지대학교/미국 하와이대학교 초청교수 1982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91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학회 부회장 1994년~ 동아시아 금음악교류회 회장 1995년~ 국립국악원 자문위원 1999년~ 서울시 문화재위원
상훈
1967년 대한민국 국악상 1968년 한국문화대상 국악부문 기악상 1971년 한국문화대상 국악부문 특별상 2000년 KBS 국악대상 현악상 및 대상 2001년 한국방송대상 국악인상, 제17회 음악상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공연
국내독주회 11회, 국외독주회 11회
학술발표
제2회 아시아·아프리카 음악과 댄스 하기학교 초청강의(영국, 1983) 제30차 국제민속음악회의(ICTM) 가야금 워크샵(오스트리아, 1989) 등 다수
저서
<5流의 가야금산조>, 이재숙, 1971 <국악반주법>, 이재숙, 1981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이재숙, 1983 <성금련류 가야금산조>, 이재숙, 1985 <강태홍류 가야금산조>, 이재숙, 1996 <조선조 궁중의례와 음악>, 이재숙, 1998 등 다수
논문
<가야금 산조중 자진모리 리듬형태 연구>, 1968 등 다수
음반
국악 제2집 <속악>(1987) / 이성천 가야금 작품집 <바다>(1991) / <아주쟁악 명가연주(亞洲箏樂 名家演奏)>(1995) / 이재숙 가야금 산조(1997) / <이재숙 교수 첫 연주로의 초대>(2001) 등
리뷰
대학시절 황병기 교수에게 가야금 풍류와 김윤덕류 산조를 배운 이교수는 이후 홍원기에게 가야금 정악을 익혔고 성금연·김윤덕·김병호·김죽파·김춘지·함동정월·김삼태 등 당대 명인들을 두루 사사했다. 하지만 이교수가 6년 전 여섯 유파 전곡 연주에 도전장을 냈을 때 연주를 제대로 해낼 것인지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산조는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인만큼 한 번쯤 무대에 올리는 것이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모험을 감행했다. “성금연류는 화려하고 대중적이고 김병호류는 심오한 멋이 있어요. 또 김윤덕류는 ‘선비산조’라는 별명처럼 절제된 맛이 일품이지요. 강태홍류는 톡톡 튀는 맛이 제격입니다. 하지만 가장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김죽파류에요. 섬세하고 여성적이라 제 성격과도 잘 맞아요.” ‘이재숙류’를 만들어 보라는 주위의 권유도 있었다. 하지만 한 유파에 집중했더라면 떠도는 가락을 삽입할 수도 있었는데, 모두 섭렵하다 보니 오히려 어렵게 됐다. “가야금 산조를 김창조 선생이 처음 만들었을 때는 15분짜리였는데 제자들이 새 가락을 넣어 점점 길어졌어요, 오래 사신 분일수록 산조 가락이 길어요.” 이교수는 정악, 산조, 창작곡으로 꾸미는 가야금 독주회의 전형을 확립한 인물이다. 1964년 10월 28일 서울대 음대 국악연주실에서 열린 제1회 이재숙 가야금 독주회는 우리 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가야금으로 혼자 독주회를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옛날 악기로 현대 청중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고 프로그램을 꾸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는 새로운 수식어가 또 붙게 됐다. ‘가야금 여섯 유파 전바탕 첫 연주자’라는. - ‘명인들에 직접 배운 행운에 감사’, <중앙일보>, 2000년 10월 24일 가야금[고]이라는 악기를 가지고 독주회를 갖기는 이재숙의 경우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가야금이라는 악기로써 과연 독주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과 이 옛 악기가 현대 청중의 구미를 돋우워 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 종례의 숙제였다. 그러나 이런 점을 극복하고 옛것으로 현대감각을 불러 일으킨 점은 이 독주회의 수확이라고 하겠다. 정악과 그리고 현대작곡가들의 신작품(정회갑, 황병기, 이성천) 셋과 후반부는 가야금 산조로써 프로그램을 짰는데 각기 그 주법의 확립을 모색한 점이라든가 자기대로의 해석을 지니려고 한 점이 그의 연주가로서의 장래를 밝게 해주었다. 그러니 정회갑씨의 작품에서는 경쾌한 터치가 아쉽고, 황병기씨의 <숲>에서는 적절한 분위기 조성이 미흡, 그리고 후반부 산조에서는 자기 기교의 과중한 부담을 엿보이게 했다. 그러나 명인적인 구세대의 연주에 비해볼 때 소리 하나하나에 치중하고 새로운 작품들을 요령있게 소화시킨 것은 일면이라고 하겠다. 특히 이 연주회에서 중간 휴게시간을 활용, 차를 나눌 수 있는 사교의 분위기를 조성해 준 것은 다른 양악의 연주회보다 앞선 기획이며, 우리나라 음악회가 반드시 배울 점이라고 하겠다. - ‘옛 악기 새로운 감각, 이재숙 가야금 독주회’, <동아일보>, 이상만, 1964년 11월 5일 역사란 시간적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교류하며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히 한 나라의 문화형성은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힘과 타문화와의 영향 관계가 조화를 이루며 형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음악도 부단히 외래음악과 교류하며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현대사가 그렇듯 한국음악의 양상도 개화기 이후 서양의 영향을 받으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우선 전통음악의 교육제도가 바뀌어졌고 그 제도에 맞는 교육방법의 모색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과거의 연주공간이던 마당이나 율방은 무대라는 새로운 연주공간으로 바뀌면서 연주시간이나 관객의 성격도 바뀌게 되었다. 새로운 무대음악으로서 새로운 청중에게 들려줄 많은 새로운 음악(작품)도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종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작곡가라는 전문가가 생겨나게 되고, 또 새로운 작품도 많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대국악의 전환기에 있어서 가장 앞장서 가는 가야금 음악가가 있다. 그가 바로 오늘 이성천의 작품에 가야금을 연주하게 된 이재숙이다. (……) 이재숙은 외형적으로만 이토록 화려한 경력을 쌓은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교육자로서 또는 연주가로서도 명성에 걸맞을 만큼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동안 이교수가 사사받은 명인들만 따져보더라도 작고한 김윤덕·김병호·김춘지를 비롯해서 성금연·김죽파·함동정월 등 각기 다른 유파의 기능보유자들 모두를 망라하고 있는데 그는 이들의 음악을 구전심수로 전해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모두 악보로 채보해서 출판하기까지 하였다(1971). 이 가야금산조의 악보들은 바로 학교의 국악교육에서 새로운 국악교육을 능률적으로 할 수 있는 교수법을 창출하게 하였는바, 이 악보들은 날이 갈수록 더 많이 활용되리라 본다. 이재숙은 연주가로서도 4회의 독주회 이외에 국내외의 각종 연주회를 통해서 활약하였는데, 특히 그의 산조연주와 신곡연주는 정평이 나 있다. 뜻깊은 KBS국악관현악단의 창립연주회에서 이성천 작품의 초연을 맡게 된 이재숙 교수의 가야금 연주를 축하하며 아울러 좋은 연주가 될 것을 기대해 본다. - ‘현대국악사회의 선두주자’, 최종민, < KBS국악관현악단 창단연주회 팸플릿>, 1985년 11월 20일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연계정보
-종묘제례악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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