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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음악사의 대들보

예술가명
근현대음악사의 대들보
분야
국악인
개요
탕으로 ‘운초 장사훈 박사 기념관’을 만들어 국악학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성천은 광복 후 대학의 국악과에서 국악을 공부한 후 활동을 전개한 본격적인 국악 작곡 1세대에 해당한다. 국악을 전통의 차원이 아니라 전통에 바탕을 둔 현대적 개념으로 해석하여 ‘국악창작’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 독주곡에서 대규모 편성의 관현악곡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곡을 작곡하였는데, 그가 만든 곡은 창작국악곡의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실제 교육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교재를 개발하는 등 국악교육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국립국악원 원장으로 재임하면서는 국립국악원을 ‘시대와 호흡하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기관’으로 탈바꿈시켜 일반인들에게 많을 사랑을 받게 하였다. 이주환은 이왕직아악부에서 가곡, 가사, 시조 등 정가(正歌)를 습득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아악의 계승과 복고(復古)를 위해 노력하였다.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 초대원장, 국악사 양성소 소장, 한국장악원 이사장, 가곡보존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전통음악의 보존과 발전 및 민족음악의 수립을 위해 공헌을 하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가곡과 중요문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으며, 특히 정가의 전수와 보급을 위해 혁혁한 발자취를 남겼다. 김기수는 이왕직아악부에서 대금을 습득하였으며, 졸업과 함께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雅樂手)로서 활동을 하면서 조선조 아악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와 동시에 1939년 12월 이왕직아악부에서 신곡 현상공모에 자신의 신작인 <황화만년지곡>이 당선되어 창작국악곡 제1호의 작곡자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광복 후에는 창작국악운동인 ‘신국악운동’을 전개하였고, 국립국악원의 장악과장, 악사장, 국악사 양성소 부소장, 원장, 국악고등학교 교장 직을 역임하면서 아악의 계승과 보급 그리고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 1호 종묘제례악과 중요 무형문화재 제 39호 처용무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홍원기는 이왕직아악부에서 정가(正歌)를 습득하였고, 민간인인 최상욱을 통해 시조제(時調制)를 전수받았다. 그 때문에 일찍부터 궁중음악과 민간음악을 통달한 가객(歌客)으로 명성을 날렸다. 광복 후에는 시조 명창으로 유명했으며, 20여 편의 국악창작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 30호 가곡의 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으며, 전통가곡진흥원을 설립하여 전통 가곡의 전승과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정가와 가야금 정악의 연주 수준이나 연주 모습 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왕가(王家)의 마지막 가객’ 또는 ‘마지막 명금(名琴)’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이재숙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제1기생으로 가야금을 전공하였다. 1964년 정악과 민속악, 창작국악곡을 모두 포용하는 연주곡목을 가지고 우리나라 최초로 가야금 독주회를 개최하였고, 이어 수많은 독주회를 열었으며, 가야금산조의 모든 유파를 능히 연주하는 등 가야금 독주회와 가야금 연주자의 새로운 상을 정립하였다. 일생을 서울대학교 가야금 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야금 연주와 연구 그리고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가야금을 통하여 우리의 우수한 음악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도 일조를 하였다. 여러 종류의 가야금산조를 오선보로 채보하여 최초의 가야금산조 악보집을 발간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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