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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농악(右道農樂)

작품/자료명
우도농악(右道農樂)
전승지역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와우리
지정여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7호
구분
민속악
개요
<우도농악(右道農樂)>은 전라남도의 서부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발달한 농악이다. 농악은 본래 신을 위한 종교 음악으로 민족신을 제사하는 의식에서 연행되어 명칭도 ‘굿’, ‘매구’, ‘매굿’ 등으로 불렸다. 한편 마을 공동 노동이나 기금 모금, 군사 행동과 관련되는 경우에는 그 기능을 중시하여 ‘풍물’, ‘건립’, ‘걸궁’, ‘금고’, ‘군고’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당산제’, ‘갯제’, ‘마당밟이’와 같이 마을신을 제사하기 위해 연행하는 것이 농악 본래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남도농악은 연행 방식, 복식, 음악성 등을 기준으로 볼 때 크게 <좌도굿>, <우도굿>, <도서해안굿>으로 분류할 수 있다. <좌도굿>은 남도의 동북부 산간지대에서 발달한 농악이며, <우도굿>은 서부 평야지대, 그리고 <도서해안굿>은 남해와 서남해 일대인 고흥군 금산면과 완도, 진도 일대에서 연행되는 농악이다.
내용
<우도농악>은 농기, 영기, 나팔, 쇄납, 쇠, 징, 북, 장구, 소고, 잡색으로 편성되며 그 전모는 <마당밟이굿>에서 잘 표현된다. <마당밟이굿>은 정초에 당산제를 지낸 다음 집집마다 돌면서 가정의 축복을 비는 조직적이고도 종합적인 굿이다. 구정 초삼일이 지나면 마을 앞에서 굿(農樂)을 이룬 다음 농기(農旗)를 앞세우고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으로 가서 ‘촌태민안(村泰民安)’과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無病長壽)’, ‘풍요(豊饒)’를 비는 <당산굿>을 친다. 이어서 마을의 공동 샘으로 와서 샘물이 일년 내내 마르지 않고 솟아달라고 샘각씨에게 축원하는 <샘굿>을 친다. 이 <샘굿>이 끝나면 비로소 <마당밟이굿>을 치는데 그 순서는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대개 다음과 같다. <문굿>, <성주굿>, <조왕굿>, <철용굿>, <곳간굿>, <외양간굿>, <측간굿>, <판굿>, <잡색놀이> 순으로 되어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 그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생략되기도 한다. 이때 판이 어우러지거나 그 마을의 부잣집 마당에서 <판굿>이라는 것을 치는데 이 대목이 농악의 꽃이라 할 수가 있다. 특히 <우도농악>에서는 이 <판굿>이 중시되며 그 순서는 상쇠의 주도하에 <오채질굿>-<늦은삼채(벙어리삼채)>-<된삼채>-<오방진>-<호호굿>-<구정놀이> 순으로 진행된다. <호호굿>까지는 전원이 같이 하나 <구정놀이(개인놀이)>에서는 먼저 <상쇠놀이>를 하고 이어서 상쇠의 유인을 받아 <소고놀이>, <설장구놀이>, <북놀이>로 이어지면서 각각의 특기를 자랑한다. 이 구정놀이에서는 무엇이 중심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관중들의 흥미와 갈채를 받는 놀이는 단연 <상쇠놀이>와 <설장구놀이>라고 할 수 있다.
전승자 정보
<우도농악> 상쇠였던 전경환(全敬煥)은 1921년 영광 남천리에서 태어났다. 60여 년의 농악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이는 그에게 끼를 물려준 부친 전병남씨. 마을에서 유명한 상쇠였던 부친의 신명을 물려받은 그는 어릴 때 정월대보름에 벌어졌던 마을 농악패의 <마당밟기>, <판굿> 소리를 들으면서 농악의 매력에 빠졌고 부친 몰래 뒷산으로 올라가 양철판으로 꽹과리를 연습하면서 10대부터 쇠잡이의 꿈을 키웠다. 17세 되던 해에 장성에 사는 상쇠 명인 최화집(崔化集)에게서 쇠치는 법을 익히고 20세에 전북 고창군 성숙면 남창리에 사는 강성옥(姜聲玉)에게서, 23세에는 고창 아산면 남촌에 사는 박성근(朴成根)에게서 배우고 33세에는 전남 영광군 법성포 김성락(金成洛)의 종쇠가 되었다. 그리고 40세 되던 해에 상쇠로 독립하여 활약하였다. 그러다 1970년대 초 ‘영광농악단’을 조직하여 공연하였다. 1962년 당시 명성을 날리던 임방울명창의 악극단 ‘협률사’의 단원, ‘신여성국극단’, ‘자랑국악단’ 등에서도 활동했다. 1979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농악개인특기상’ 등을 수상하면서 기량을 인정 받게된 그는 1986년 창단된 ‘전남도립국악단’의 단원으로 입단, 젊은 단원들에게 전통가락과 기예를 가르쳤으며, 1995년 영광농악전수관이 완공되자 본격적으로 전수에 매진하는 등 후학양성에 힘쓰다가 79세에 타계했다. 현재 보유자인 설장구 김동언(金東彦)(1942.7.1)은 1994년에 작고한 설장구 명인 김명선(金明先, 예명 김오채)의 설장구를 이어받았다. 1942년 담양 봉산면 와우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부터 대보름 농악에서 무동의 역할을 하였다. 15세에 이동래 선생에게서 사사하기 시작하여 광주 사람 채막동에게서 5년, 여수 출신 임재식 선생, 그리고 김오채 선생에게서 사사했다. 이 외에도 정진만, 김종해 선생 등에게 설장구를 사사하면서 보다 특색있고 화려한 <우도농악> ‘설장구’를 익혔으며, 현재 <우도농악>의 진수인 ‘설장구’를 계승 발전시키고 있다.
이미지
음원
연계정보
· 관련도서 <우도농악 조사보고서>, 전라남도 <문화재도록-도지정문화재편>, 전라남도, 1998 · 관련사이트· 관련가치정보
연계정보
-풍물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사이트
우도농악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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