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고흥월포농악 (高興月浦農樂)

작품/자료명
고흥월포농악 (高興月浦農樂)
전승지역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신평리 월포마을
지정여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7호
구분
민속악
개요
<고흥월포농악(高興月浦農樂)>은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신평리 월포마을에서 전승되는 도서해안권에 속하는 농악으로 임진왜란 당시 군영의 사기를 돋우기 위한 승전악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확인하기는 어렵다. ‘월포’는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동북쪽에 위치한 해안마을로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으며 어업에 종사하는 집도 있다. 농악은 농부들이 두레를 짜서 일할 때 치는 음악으로 꽹과리, 징, 장구, 북과 같은 타악기를 치며 벌이는 음악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다. ‘남도농악’은 연행 방식, 복식, 음악성 등을 기준으로 볼 때 크게 <좌도(左道)굿>, <우도(右道)굿>, <도서해안굿>으로 분류할 수 있다. <좌도굿>은 남도의 동북부 산간지대에서 발달한 농악이며, <우도굿>은 남도의 서부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발달한 농악이다. <도서해안굿>은 남해와 서남해 일대인 고흥군 금산면과 완도, 진도 일대에서 연행되는 농악으로, 당제를 중심으로 신과 친근성을 지니고 <길굿>이 육지의 것과는 다른 점 등 좌도, 우도 어느 권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자성을 지닌다. 여기에 해당되는 농악으로는 고흥군 금산면의 <월포농악>, 완도 <장좌리농악>, 진도군 <소포농악> 등을 들 수 있다.
구성과 복색
<월포농악>의 구성은 덕석기1, 농기1, 농악기1, 영기2, 쇠4, 농부2, 징3, 장구3, 북5, 벅구11, 소고14, 잡색2(대포수, 양반)로 되어 있다. 쇠잽이의 복색은 상쇠, 부쇠, 끝쇠가 동일하다. 흰 바지저고리를 입고 황색, 청색 띠가 둘러져 있는 빨간색 쾌자를 입는다. 어깨에 띠를 두르지 않고 허리에만 황색띠를 한다. 쾌자 등쪽에는 청색과 홍색 띠가 늘어져 있어 뒤에서 보면 허리의 황색 띠까지 합해 청색, 황색, 홍색의 삼색띠가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쇠잽이들은 머리에 부들상모를 착용한다. 농부의 복색은 쇠잽이와 동일하다. 악기를 다루지 않는 대신 등쪽에 늘어져 있는 띠를 양손에 하나씩 잡고 춤을 추면서 상쇠가 하는대로 상쇠의 일거수 일투족을 그대로 흉내낸다. 징, 장고, 북, 벅구, 소고잡이들의 복색은 서로 동일하여 흰 바지 저고리에 청색 조끼를 입고 삼색띠를 두르며 쇠잽이와 달리 고깔을 쓴다. 벅구는 북보다 작고 소고보다는 조금 큰 악기로 과거에는 북보다 벅구를 주로 쳤다. 대포수는 머리에 ‘大將軍’이라 쓰여진 대포수관을 쓰고, 어깨에는 꿩과 짚신이 매달린 망태를 짊어지고, 손에는 총을 든다. 그리고 양반은 흰 도포를 입고 관을 쓰며 손에는 부채를 든다.
연행형식
세시절기나 걸립에 치는 농악는 그 목적에 따라 때마다 연행형식에 차이가 있다. 그 중 월포에서는 정월 초에 치는 농악이 가장 성대하며 대표적인 것이라 한다. 음력 1월 3일 저녁 12시 무렵에 당제를 모시는데, 이날 <당산굿>, <제굿>을 치고, 이튿날부터 <마당밟이>를 하며 <문굿>을 친다.①당산굿 음력 1월 3일 오전에 당산을 맞이하고 모시기 위해 치는 굿이다. 당할아버지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곧 당제를 모신다는 ‘예고굿’이다. 마을 앞의 당산나무 아래나 넓은 공터에서 친다. 먼저 <당산>을 치고, 끝나면 마을 공동 우물에서 <샘굿>을 친다. 이어 고깃배를 매어놓는 선창으로 가서 <선창굿>을 친 다음 마을 왼쪽의 간척지에서 <풍년굿>을 친다. ②제굿 1월 3일 밤 12시경에 모시는 당제를 친다. 제관 1명과 집사 2명이 제를 모시기 위해 당집에 올라가 있을 시간에, 오전에 <당산>을 치던 자리에서 치는 굿이다. 당집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진설을 끝내고 불로 농악을 치라고 신호하면 농악대는 <제굿>을 친다. <제굿>은 다른 굿과는 달리 한 가락도 더 들어가거나 빼서는 안 되는 정성들여 쳐야 하는 굿이다. ‘외채-당산-외채-늦은삼채-외채-된삼채-외채-일채-외채-이채-외채-쟁걷음-너나리굿-쟁걷음-외채-재배굿-쟁걷음-외채-너나리굿-{응매깽깽-외채-쟁걷음}(3번반복)-외채-영산다드리-외채’ 순서로 친다. ③마당밟이 당제를 모신 다음 날(정월 4일)부터 3~4일 동안 가가호호 돌면서 치는 굿이다. <질굿>을 치며 이동한 농악대가 <마당밟이>를 할 집에 이르면 <문굿>을 친다. 이어 <샘굿>을 치고 <안굿(마루에서 치는 마루굿)>-<정지굿>-<철용굿(집을 한바퀴 돌며 치는 굿)>-<판굿>으로 계속된다. <판굿>은 그날 <마당밟이>가 거의 끝날 무렵 마당 넓은 집에서 술과 음식을 먹으며 노는 굿이다. <판굿>에서는 춤굿, 노래굿, 도둑잽이 등이 행해졌다. 이 중 풍물을 치며 춤을 추는 <춤굿>만이 현재까지 행해진다. ④문굿 마당밟이를 하면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마당이 넓은 집에 이르게 되면 <문굿>을 친다. 이 <문굿>은 마당밟이 때 집 앞 문에서 치는 <문굿>과는 다른 것으로 한 바탕의 놀이판 전부를 일컫는 이름이다. 이 <문굿>이 <월포농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또한 높은 기량이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능을 과시하고자 할 때에 이 굿을 친다고 한다. 문굿의 절차는 ‘질굿-삼채-외채-당산-외채-예절-갈림쇠-외채-예절-춤굿-정문삼채굿-외채-예절-쟁걷음-창영산-접영산-도리동산굿-옹매깽깽-문굿-외채-인사굿-너나리굿-“주인주인문여소”문굿-외채-이라로굿-“열문아뢰오”-응매꽹꽹쟁걷음-영산다드리-진풀이’ 순이다.
특색
<월포농악>의 특색 중 첫번째는 <문굿>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기를 세우고 두 줄로 늘어서서 농악을 치는 <문굿>은 고흥 이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소멸되었기 때문에 월포에서 행해지는 그 전승이 더욱 중요하다 할 수 있다. 두번째는 당제와 관련되어 종교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당산>과 <제굿>은 당제와 관련하여 행해지며 <마당밟이>와 <문굿> 역시 당제의 연장에서 이루어진 <마당밟이굿> 때 연행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제굿>을 칠 때에는 정성을 들여 조심해서 쳐야 하며 다른 굿과 달리 한 가락 한 가락을 첨삭없이 그대로 쳐야 한다. 세번째 특징은 힘차고 빠르게 연주되는 가락이 많다는 점이다. 가락이 빠르고 힘찬 만큼 춤과 기예가 활기차고 기민하며 더불어 상쇠를 비롯한 잽이들의 뛰어난 연주 실력도 볼 수 있다. <좌도굿>에서 흔히 쓰이는 영산가락이 보인다. <문굿>에서의 창영산, 접영산, 영산다드리와 같은 가락이 그 예인데 ‘좌도굿’의 영산가락과 다른 점은 2분박, 3분박이 섞인 혼합박자이며 징이 쓰인다는 점이다. 다섯째는 농악대의 구성에서 벅구놀이가 흥겹게 행해지는 점이다. 예로부터 <고흥농악>은 다른 지역의 농악과 달리 북보다 벅구를 많이 사용했는데, <월포농악>에서도 이런 벅구놀이가 흥겹게 놀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농부’라는 소년의 역할이 돋보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농부에는 열살 전후의 끼가 있어 보이는 소년이 뽑히는데, 쇠잽이와 똑같은 복장으로 상쇠 뒤를 따르며 상쇠가 하는 대로 흉내를 내는 역할을 한다. ‘농부’는 이러한 방법으로 가락과 춤사위, 상모놀이, 진풀이, 농악의 전체 진행 등을 익힌 뒤 ‘쇠잽이’가 된다. 이것은 쇠잽이들을 훈련하는 교육과정이자 농악이 전승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쇠잽이들은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하는데 현재 상쇠인 최병태도 이러한 ‘농부’ 과정을 거쳐 쇠잽이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여러 특징들을 가진 <월포농악>은 좌도와 우도 어느 영역에도 편입시킬 수 없는 매우 개성적인 농악이며, 이러한 현상은 완도 <장좌리농악>과 진도 <소포농악>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들 농악을 ‘도서해안굿’으로 분류하여 구분하고 있다.
전승자 정보
<월포농악>의 현재 상쇠는 최병태(1918.2.5)다. 그는 진야무와 박홍기에게서 쇠가락을 배웠으며 이웃 마을 상쇠인 김웅선과 박홍기의 영향도 받았는데 이들에게서 <문굿>을 전수받았다. 상쇠 최병태는 부친 최치선과 선배 상쇠인 진야무에게서 배웠다. 그는 열 두 살 때 상쇠의 뒤를 따라 다니며 기능을 익히는 ‘농부’의 역을 시작으로 농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농부’역을 3년 한 뒤 16세부터 끝쇠가 되었다가 67세부터 선배 상쇠였던 진야무의 뒤를 이어 상쇠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월포농악>은 마을 자체에서 쭉 전승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근의 이름난 상쇠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김응선과 박홍기는 인근 오천리 사람들로 대단히 뛰어난 기량을 지닌 상쇠들이었는데 이들로부터 전해받은 것은 <문굿>이다. <문굿>은 월포에도 있었던 것이었으나 이들은 보다 체계화된 것을 전했다. 당시 월포의 상쇠인 최치선이나 진야무 등은 <문굿>을 제대로 치지 못했다고 하는데, 김웅선과 박홍기가 체계화된 <문굿>을 전해주어서 그것을 지금까지 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의 전수과정에서 박홍기는 <야류농악(野遊農樂)>이라는 세 쪽짜리 문서를 남겼고, 이 문서에는 <판굿>이라고 생각되는 농악의 여러 절차들이 기록되어 있다.
연계정보
· 관련도서 <고흥월포농악 조사보고서>, 전라남도 <문화재도록-도지정문화재편>, 전라남도, 1998 · 관련사이트· 관련가치정보
연계정보
-풍물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멀티미디어(전체1건)
이미지 1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