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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을선 (1915.4.6~2000.5.26)

예술가
조을선 (1915.4.6~2000.5.26)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86.4. 제주도 무형문화재 1-가호 오돌또기 보유자 인정 1989.12.1 중요무형문화재 95호 제주민요 보유자 인정 2000.5.26 중요무형문화재 95호 제주민요 보유자 사망해제
생애(약력)
1980.10. 제19회 한라문화제 최우수상 수상 1983.10. 제22회 한라문화제 민요경창부 최우수상 수상 1990.10. 1990문화장터 전통음악 공연(국립극장 대극장) 1992.10. 제23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1996.6. 팔도예능보유자 초청 큰잔치 공연
리뷰
재인-전통 예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61 50년 공방 삭여 준 안골 탐라 노래 “하늘에 달이 훤히 떠오르면 심란해서 흥얼댔고 얼래이(어린애) 업고 추스릴 땐 절로 나오는 게 자탄가올시다. ‘얼래이’ 적부터 동네 할망(할머니)들한테 배워 둔 노래를 늙어질 때까지 부르니 수년 전에 인간문화재라 하여 방송에도 출연하고 무대 공연도 하랍디다.”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에서 나고 자라 결혼하고 자식 낳아 여위살이 시킨 뒤 혼자 살고 있는 조을선(1915년 4월 6일생) 할머니. 그가 살고 있는 성읍리 일대는 민속 마을로 지정돼 집의 돌담 하나 함부로 손댈 수가 없다. 표선면소재지에서 바닷가까지는 8Km나 되는 전형적인 제주 내륙 마을이다. 방아 찧고 밭매며 힘에 겨워 흥얼대 왔던 노래가 중요무형문화재 제95호(오돌또기 1989년 지정)로 지정된 제주 민요들이다. 어려 어려 에헤야 응월월월 에헤야 한라산에 산목이 잘르면(구름이 걸리면) 삼일 안에 비가 온다. 들 위에 가고 보면 태역(잔디)밭에 잔거미줄이 박싹(바싹) 일면 그날 일은 메지(날이 좋아 계속할 수 있다는 뜻) 않는다. 유월절 전후 삼일이 되면 뒤웅박의 스슥(좁쌀)이 춤을 춘다(파종 때가 되었음을 뜻함)…… 가짓수도 많은 제주 특유의 전래 민요는 조을선 씨뿐 아니라 이곳 성읍 마을에 사는 10여 명의 ‘할망’들에 의해 아직까지는 완벽히 전수되고 있다. 모두가 한동네 친구지간으로 언니 동생하며 지내고 ‘인간문화재’가 안 됐다하여 섭섭히 여기는 사이들도 아니었다. 이선옥(李仙玉, 79, 보유자 후보), 송인선(宋仁善, 66), 김경화(80), 김향란(金香蘭, 73), 강인옥(姜仁玉, 70), 홍태옥(68), 현순옥(玄順玉, 63), 이미생(李美生, 61), 조일수(59), 이창순(李昌順, 59)씨 등은 공교롭게도 성읍 마을에서 나고 자라 동네 혼인하여 지금껏 한마을에서 살고 있는 ‘할망 친구’들이다. 나이 차이 가릴 것 없이 요즘도 몰려다니며 마을 정자나무에 달이 걸리거나 타관땅 갔던 사람 고향 찾아오면 둥그레 덩실 노래하며 춤춘다. 이들이 지켜 온 제주민요의 전승 맥은 자신들을 지켜 내고 한을 삭히기 위한 다분히 자기 방어적인 요소들도 많았다. “20대 과댁(寡宅)은 수절해도 30대 들어선 힘들다지요. 어인 팔자소관인지 스물 아홉에 청상이 된 후 50년 가까이를 혼자 살고 있수다. 딸 셋 키우며 공방을 지켜 내야 했던 그 속이 어땠겠수까.” 조씨를 통해 듣는 한 여인네의 응어리는 한 시절 질곡 속에 살아 왔던 우리 시대 어머니의 또 다른 자화상이었다. 노안에 괸 눈물을 옷고름으로 받아 내며 “왜 이전엔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조씨 친정은 현재 살고 있는 집의 바로 세 집 건너다. 어려서 자랄 땐 쌈질도 하고 서로 말대꾸를 하던 이웃집 총각, 처녀가 신랑과 각시 사이로 변한 건 조씨 나이 열 일곱 때였다. 열 아홉 때 남편(이병우) 따라 일본 가서 살 땐 아래 윗집 모두가 부러워했다는 것. 일본 대판에서 한약사 면허 내고 침술 허가 받아 간판 걸고 살아 봄직했는데 딸 셋 남겨 놓고 홀연히 가 버렸다. 그 때 나이 스물 아홉. “남편 하나 살려 보려고 별짓 다 했수다. 신방 불러 굿도 하고 단지해 피도 흘려 넘겨 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입디다. ‘헛나이 먹어도 태산’이고 ‘누워만 있어도 서방’이라는데 청상과부의 남은 평생이 오죽했겠소……” 한 이레(1주일)를 지나도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쌀밥, 스슥(조)밥에 강냉이 멀건 죽으로 힘든 허기를 이겨 낼라치면 솟구치는 건 오기뿐이었다. 이럴때마다 헛소리처럼 흥얼대며 읊은 게 어려서부터 배운 민요, 타령 들이었다. 마을에서도 변여옥(邊如玉) 할머니와 이경춘 할머니(오돌또기민요 보유자 후보 이선옥 씨 사촌 언니)가 유별나게 잘해 놀이 때마다 쫓아다니며 배운 것이다. 친정 어머니(송신화) 또한 목청이 좋아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하며 삼삼히 부르던 노래들도 귀동냥으로 얻었다. 집을 지을 때 보름 동안 지경 다지며(집터 고르는 일) 어머니가 메기던 <지경밟기 노래>도 그 중 하나다. 어어어 아헤 아헤 멀고 구 년 묵은 궁묵낭(굴목나무) 구시(구수, 소 여물통) 삼 년 묵은 초나무 장치(절구대) 부러지캥(부러질까) 근심 마라 덕신덕신(세차게) 찧어 줍사 칠성(별자리)같이 벌어진 적군(모여 있는 사람) 담을거지 모다집서(하늘처럼 모아 줍사)…… 이처럼 조을선 씨 몸에는 제주 내륙의 생활 민요가 넉넉히 담겨져 있다. 이선옥, 송인선씨 등 동네 민요 패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이토록 어렵사리 구전돼 오는 제주 민요는 근자에 와 원형 상실의 위기에 처해 있다. 외지의 배웠다는 사람들이 찾아와 말뜻을 찾고 문법을 맞춘다며 제멋대로 해석해내기 때문이다. 조을선 씨를 비롯한 할망 소리꾼들은 버스 옆구리에 큼지막히 쓰인 번호판도 못 읽는 그야말로 일자무식들이다. 학문적 체계와 논리도 중요하겠으나 제주 내륙인의 생활상과 고유방언이 응축된 전래 민요는 원형 그대로의 보존이 우선돼야 하겠다는 동네 주민들의 소청이기도 하다. 몰방아(연자방아)를 돌리고 힘내라고 부추기던 노래, 도리깨질하며 미운사람 후려패듯 뚝심 주는 노래, 산두(발벼)밭 발리는(밟는) 노래, 상여앞 다포(줄)잡고 구성지게 뽑아 대던 상여소리 등 제주의 생활 민요는 이들 ‘할망’의 입을 통해 불려지는 게 대부분이다. 조씨와 언니 동생하며 늘그막까지 붙어다니는 이선옥 씨도 “이래 저래 자탄가 하다 보니 소리꾼이 되어 버렸다.”면서 30년 전까지만 해도 남녀가 섞여 노래했는데, 요즘엔 여자들끼리만 모여 부르다 보니 ‘여자 소리’가 되어 간다고 말한다. 조씨는 몇 대째 살아오는 삼간모옥에서 말년을 혼자 정리하고 있다. 한동네로 시집 간 딸들이 가끔 보살피며 외손녀(강경화, 강문희) 둘을 집으로 불러 소리 공부 시키는 게 유일한 낙이다. “이놈의 집은 어느 세월에 죽 안 끓일 것인가.”라며 괴춤에 쌀 한줌씩 몰래 갖다 주시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요즘 성읍민속촌을 찾는 타지인을 지켜본다고 한다. 돈은 원수처럼 써 버릴 게 아니라 새신랑이 새각시 대하듯 조심하며 챙겨 다뤄야 할 것인데, 그렇질 못하다는 것. 또한 처음 온 사람들한테야 제주가 신기하겠지만 누대에 걸쳐 살아 온 이곳 사람들에겐 바로 일상의 생활 터전임을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는 ‘조할망’의 바람이다. <세계일보>, 이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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