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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희 (1947.11.11~)

예술가
이춘희 (1947.11.11~)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80.12.31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선정 1983.6.1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조교 선정 1989.12.1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후보 선정 1997.11.11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66.1 이창배, 정득만 학원 입학 1975.1 안비취에게 사사
생애(약력)
1978.5. 지구레코드회사 전속계약 1983.10. 서울 경기 12잡가 이춘희전수소 개원 1985.9.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 전임강사 1986.9. 제주한라문화재전국대회 대통령상 수상 1986.4. 민요대잔치 대공연(호암아트흩) 1986.11. 미국 LA 재미국악협회 초청공연 1987.3. 이춘희 12잡가 발표회 공연(국립극장 소극장) 1987.4. 무형문화재 예술단공연 공로상 수상 1987.5. 서울흥사단 주일강사 1987.12. KBS 국악대상 수상 1988.10. 제2회 개인발표회 1988.11. 미국 뉴욕 국악원 초청공연 1990.2. 국악대공연 1990.3. 우리노래 우리공연 큰잔치 1990.7. 대전 연정국악원 초청공연 1990.7. 중앙관현악단 초청공연 1999.10. 공개행사 발표공연(국립국악원 예악당) 2000. 국립국악원 지도위원 2001.10. 백제문화제 참가 발표공연 2001.12.3~9 월드컵 홍보관련 미주공연(미국 LA, 워싱턴) 2002.12. 중요무형문화재 찾아가는 공연(강릉문화원) 2003.4.8~10 한국전통춤 연구회 <천지무-동양춤의 원류를 찾아서>(일본동경예술극장)
리뷰
스승에게서 삶과 예술의 자세를… 1989년 1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의 예능보유자후보로 인정 받아 새 목소리로 우뚝 선 이춘희(43)씨는 경기명창 인간문화재이고 그의 스승인 안비취(64)씨의 예술과 사람을 모두 이어받은 것을 보람과 자랑으로 안다. “그 어른이야 모시기 전부터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존경했던 분이죠. 나는 그 어른 말씀이라면 무조건 법으로 알고 따랐습니다. 민요 배우시기 전에 가곡을 하신 분이라 목이 깨끗하고 맑고 힘이 있으셔요. 그런 목이기 때문에 탁성보다 배우는 입장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소리만이 아녜요. 그 분은 늘 사람을 가르치세요. 성품도 온화하시고 인자하시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여자로서 갖춰야 할 것은 다 갖춰야 한다고 늘 말씀하세요. 매무새도 음식장만에도 단정하고 깨끗한 법도를 알고 지켜야 한다고요.” 그는 스승에게서 그 모든 것의 모범을 발견한다. “요즘 선생님 댁에 가보면 아드님 따님 모두 출가시키시고 남자어른이나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식사 때 격식이나 예법이 그대로예요. 우리 제자들은 그런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를 모두 존경합니다.” 그런 스승 밑에서 자란 것이 그의 자랑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재주를 길렀고 앞장선 제자로 인정을 받아 더욱 기쁘다. 그는 1947년 서울 한남동에서 태어났다. “한남동은 요즘이야 번화한 동네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서울 변두리 한적한 곳이었죠. 아버님이 채소 농사를 지으셨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노래 좋아해서 아무 노래나 잘 따라 부르는 아이’였다고 표현한다. 민요풍의 노래가 어울리는 가수 황금심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했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라면 모두 쉽게 따라 부르는 아이였다.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고 그냥 듣고 따라 부르다가 학교에서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적도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베틀가 창부타령 같은 노래였어요.” 그러나 그가 노래를 배우겠다고 처음 찾은 곳은 국악 쪽이 아닌 대중가요 족이었다. “국악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했고 눈에 띄는 게 가요학원이었거든요.” <선소리 산타령>의 인간문화재 이창배·정득만씨가 경영하는 학원을 연줄로 알고 처음 찾은 것은 그가 20세 때였다. “처음 그 학원에 가 보니 작은 방에 초라한 장소여서 실망이 컸었죠. 6개월쯤 배우다가 집어 치울 생각을 했죠.” 그 때 그를 다시 돌려세운 것은 명동국립극장에서 열린 국악무대였다. “그 무대를 보고 감격했어요. 아름답고 너무 좋았어요.” 그의 배움은 빨랐다. “선생님들께서 소질이 많다고, 어디서 배우다 온 게 아니냔 말씀들을 하셨어요. 3년쯤은 배우면 배우는 대로 그럴 듯 하게 잘 따라 했고 배우지 않아도 잘 한다고 뻐길 정도였죠. 3년쯤 지나니까 목에 쓰임새 한계 같은 게 발견되더군요. 뭐가 뭔지도 모르고 했고 멜로디만 알면 소리가 되는 줄 알았죠. 그 후 10년쯤 까지는 정말 고생스러웠어요. 어찌된 건지 입만 열면 목이 쉬는 거예요. 이 어려운걸 배워 뭘 하나 무대도 없고 희망도 없는 걸 이토록 고생하며 해서 뭘 하나 고민도 많았구요.” 10년이 지나면서 그의 목을 다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원래의 맑은 목소리가 제자리를 잡고 더욱 단단해졌어요. 몸이 완전히 달라졌구요. 지금은 아무리 오래 노래해도 목이 쉬는 법이 없어요.” 그는 그의 스승들이 수업기에 겪었다는 강훈련과는 다르지만 그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뭔가 성취해냈다는 자랑은 안고 있다. 10년 전부터 학원을 시작한 것도 자신만의 공부방을 얻기 위해서다. 요즘 그는 기막힌 어린 제자를 얻었다고 자랑한다. “국민학교 6학년짜리가 8분짜리 회심곡을 3일만에 다 배웠어요. 그 애 어머니가 옛날 이창배 선생님께 같이 공부했던 사람이어서 이해도 많구요. 한번 제대로 가르쳐 보고 싶어요.” 그는 어느덧 제자 자랑으로 신이 나는 젊은 소리꾼이다. <일간스포츠>, 구히서, 1990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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