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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본명:이윤란, 1922.10.6~)

예술가
이은주 (본명:이윤란, 1922.10.6~)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5.7.12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36. 청구민속학원 입학 1936. 원경태, 이창배 문하에서 경기민요 사사
생애(약력)
1941.3. 라디오 방송국 전속민요방송 1942.10. 청구민속학원 교사 임명 1942. 서울 중앙방송국 경기민요 전속단원으로 근무 1946. 청구고전성악학원의 민요강사로 지냄 1950. 단성사 국악대회 1등 수상 1953.10. 국악원민속연구회 부회장 선임 1964. 제4회 TBC 방송 명인명창대회 대상 수상 1969.2. 국악협회이사 1971.3. 한국민요연구회 부회장 역임 1983.3.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강사 1990.6. 후계자 김금숙 개인발표회 지도 1991.1. 한국국악대상 수상 1991. 고희기념 축하무대 <바람 한자락 소리 한자락> 공연 1993. 옥관문화훈장 서훈 2001.9. 공개행사 발표공연(국립극장 해오름극장) 2002.6. 월드컵 문화행사공연(국립극장 문화마당)
리뷰
경기민요 보유자 이은주는 1936년 원경태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소리를 시작했으며 수차례의 해외공연을 통해 한국 민속 성악의 진수를 세계무대에 알려왔다. 1996년 8월 <75년 소리의 길> 발표회 무대를 가지면서 이미 원숙의 경지에 다다른 소리 인생의 귀감을 보여준 바 있다. 현재 목원대학, 경북예술대 국악과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제28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 프로그램 중에서) 14세에 입문, 경기민요 외길인생 「짜증은 내어 무엇하나…」작사 경기민요 이은주여사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 성화는 받쳐서 무엇하나 속상한 일도 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세 니나노 닐니리아 닐니리아 니나노 얼싸 좋아 얼씨구나 좋다 벌나비는 이리저리 펄펄 꽃을 찾아서 날아든다 대중가요만큼이나 친숙해진 이 민요는 전래민요가 아니고 <태평가>의 곡에다 앞 소절을 만들어 붙인 노래이다. 경기민요의 인간문화재 이은옥여사가 6·25피난 시절 대구의 한 극장에서 이 노래를 지어 불렀을 때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짜증스러운 피난살이의 설움을 달래는데 크게 공감이 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맑고 고운 목이 고달픈 피난살이에 청량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여사가 지난 9월 5일 호암아트홀에서 고희기념무대를 가졌다. 월령체의 소리로서 경기십이잡가중 가장 많이 불리는 <달거리>를 시작으로 <정선아리랑>, <이별가>, <태평가>, <긴아리랑>, <노랫가락>, <청춘가> 등을 타고난 맑은 목으로 불러 만장의 청중을 휘어잡았다. 이날의 기념공연에는 같은 경기민요의 인간문화재인 묵계월, 안비취씨가 우정출연하여 춘향이를 매질하는 대목의 집장가를 함께 부르기도 하였으며, 인간문화재후보 김금숙을 비롯한 이수자, 전수자 등 문하생들이 출연하여 <선유가> 등 경기민요의 대표적인 노래와 무속을 재현하고 <대감놀이굿>과 <창부타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려 그의 고희기념무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스스로 장구채를 잡고 꼿꼿한 자세로, 늦추고 죄는 변화있는 장단을 구사하면서 경쾌하고 구성진 가락을 맑은 목으로 정갈하게도 넘긴다. 70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곱살하기도 하거니와 목소리는 더더욱 청아하다. 할머니라고 불러야 할 노인네가 어쩌면 저럴까 싶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인 그의 본디 이름은 이윤란이다. 그는 1922년 음력 8월 14일 경기도 양주군 서산면 삼성리의 중농 집안에서 2남 1녀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의 민요인생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생철쓰레받기니 뭐니 손에 잡히는대로 두드리면서 노래 비슷한 것을 흥얼거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여사는 자신의 민요인생을 ‘타고난 팔자’라고 말했다. 동네 노인들의 "소리 참 좋다"는 칭찬에 그의 싹수를 인정한 아버지는 유성기를 사주었다. 그래서 더욱 신이 난 그는 노상 유성기 앞에서 살다시피 하였으며 학교에 오갈 때면 으레 길에서 책보를 툭툭 치면서 장단을 맞추어가며 복습 겸해서 흥얼거렸다. 어린 그가 열 두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홀어머니와 함께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맛보아야만 하게 되었다. 집안 살림을 돕는 것은 물론이고 철부지 두 동생도 돌보아야만 했다. 그가 소리의 길로 들어서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물론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해 동네 어른들로부터 이 다음에 커서 명창이 될 것이라는 칭찬을 들은 것도 큰 용기가 되었지만 집안의 장녀로서 홀어머니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기 위한 효심때문이었다. 어렵사리 서울교동국민학교를 졸업한 이윤란소녀는 졸업하자마자 이내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때 나이 열 넷. 당시 장안에서 소문난 소리꾼이던 경기민요의 대가 원경태선생의 문하에 들어갔다. 원경태선생으로부터 12잡가와 갖가지 경기민요를 두루 익혔으며 간간이 이창배선생으로부터도 지도를 받았다. “요즘 같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악보집과 레코드에 녹음기도 있고요. 그때만 해도 민요악보는커녕 가사책도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었어요. 가사·음성·박자 등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를 선생님의 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다고 같은 소리를 여러 번 가르쳐주시기나 했나요. 한 두 번 해주고는 해보라는 거예요. 그날이야 제대로 되지요. 그러나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가면 제대로 되지를 않아요. 게다가 토요일이면 한 주일동안 공부한 것을 선생님 앞에서 혼자 노래해야 했지요. 여기에서 실수하면 실수한 대목의 숫자만큼 회초리로 치시며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선생은 ‘매 맞고 배운 노래라야 진짜 소리’라며 인정사정 없었단다. 그래서 매를 맞지 않으려고 밤새 복습에 복습을 거듭하여 목이 쉬기도 하고 피가 나온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엄한 가르침 덕에 소리공부를 한지 1년만인 1937년 인천 홍명극장으로 콩쿨대회 구경을 갔다가 같이 갔던 친구들의 권유에 못 이겨 마지못해 부른 것이 1등으로 뽑혔다. 그때만 해도 심사위원이 심사를 해서 뽑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들의 투표로 뽑았었다. 그때 그는 부르기 힘든 긴 잡가를 막힘없이 신명나게 잘도 불러댔다. 1등을 하고 돌아왔을 때 원경태선생이 몹시 기뻐하신 일과, 엄하기만 하고 칭찬이란 걸 모르던 이창배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듣고는 그날밤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이때 원경태선생이 ‘경기민요는 쟁반에 은구슬 구르듯이 불러야 하느니라. 네 목은 타고난 음성이라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렇게 해야만 되고’ 하면서 은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그는 여기에서 소리에 자신을 얻었다. 이대로 계속 정진하면 나도 명창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계속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경기지역의 폭포를 찾아다니면서 소리공부에 정진했다. 이렇게 소리공부에 정진하길 6년 만에 경기민요의 명창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20세가 되던 1942년 3월에 정동에 있던 경성방송국(현 KBS전신)과 전속계약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방송과 무대를 통해 많은 활동을 해왔으며 경기민요의 보급에 한몫을 단단히 해냈다. 8·15광복 후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1946년부터 청구고전성악학원에서 민요강사로서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지구, 오아시스, 아세아, 신세계 등 여러 회사에 의한 레코드취입과 수없이 많은 국내공연은 물론 제일동포 위문을 위한 여러 차례의 일본순회공연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공연뿐만 아니라 우리 민요의 보급과 발전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 한국 민요연구회 부회장과 한국국악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국악발전을 위해 일하기도 하였으며 1969년에는 ‘TBC명인명창대회’에서 대상을 타기도 하였다. 1975년에는 이와같이 경기민요의 보존과 전승에 기여한 공로로 묵계월, 안비취씨 등과 함께 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다. 인간문화재가 된 후에는 후진양성에 정진. 경기민요보존전수회를 통해 김금숙(인간문화재 후보)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이화여대 민요강사로 4년 동안 활약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30여명의 문하생을 두고 후진 양성에 온갖 정력을 다 쏟고 있다. “요즈음 애들은 머리가 좋아 빨리 배워요. 게다가 옛날에 없던 악보와 녹음기까지 있으니 공부하기가 얼마나 편해요. 그런데 성의와 끈기가 없어요. 예전처럼 매질해가며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걱정입니다. 힘들여 살려고 하는 세상이 아니니 딱하기만 합니다.” 기자가 취재차 권농동 자택으로 이여사를 찾아가 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문간방에서 10여명의 문하생들이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귀에 익은 곡이긴 한데 가사가 좀 별난 것 같습니다. “제대로 들으셨네요. 곡은 오봉산타령인데 가사는 찬송가이지요. 제가 초동교회엘 다니는데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오봉산타령에 맞추어 찬송가를 부르기로 했지요. 그 연습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고희를 맞고도 어쩌면 그리 건강하시고 곱살하며 소리가 깨끗하십니까. 비결이라도…… “화장도 안한 얼굴인데 그리 보아주시니 고맙습니다. 건강의 비결이요. 저 아침에 일찍 일어나 30분정도 체조하는 게 고작인걸요. 소리요, 목소리가 굵어져서 야단났어요. 남들은 아직도 깨끗하다고 하는데 녹음을 해서 재생해보면 그렇지 않아요.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나 봐요.” 그러나 그의 청아한 목소리는 팔순기념공연도 기대할 만했다. <월간 문화재>, 1991년 11월, 제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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