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조공례 (1930.10.3~1997.4.23)

예술가
조공례 (1930.10.3~1997.4.23)
출생지
전라남도 진도군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3.11.5 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 남도들노래 보유자 인정 1997.4.23 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 남도들노래 보유자 사망해제
리뷰
재인-전통 예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99 내뱉는 절구마다 사랑, 애환 절절 이 이야 하아 아아아 아하 이헤에 헤에헤어 하즈허을 노허어 노호오헤야아. 청을 좁혔다 넓히면서 서서히 높이는가 했더니 갑자기 내리 꽂는다. 길게 늘이면서 애원성(계면성)이 섞여 나오고 ‘노허어’ 하는 대목에 이르러선 건넌방 시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처럼 목젖이 내려앉는다. 허두소리(소리를 메기기 위한 앞소리)를 겸한 후렴이지만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중모리의 장단이 고루 배분돼 있다. 그리고 이내 노래가 이어진다. 비가 졌네(쪘네) 비가 졌네 남산 너머 비가 졌네 어떤 사람 팔자가 좋아 부귀 영화로 잘 사는데 우리 같은 인간들은 무슨 팔자로 일하는가. <남도 들노래> 중 애벌(첫벌)논을 매며 신이 나라고 부추기는 노래다. 주인집 상머슴은 말할 것 없고 품앗이 나온 서낭 너머 동네 일꾼까지 이 소리에 취해 힘든 줄 모르고 죽어라 일한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마누라는 허리 밟고 애들한테는 팔다리 주무르라며 끙끙 앓았다. 트랙터·이앙기 등이 논밭일을 거들어 준다지만 잔손가고 뼛심드는 뒤치다꺼리는 아직도 사람 몫이다. 특히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 중에서도 전남 진도 지방을 중심으로 불려지는 소리가 바로 <남도 들노래>다. 이 지역에 가면 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1976.5.30)된 조공례(曺功禮·69, 1925년 5월 21일생)씨뿐만 아니라 어린애들까지도 한 자락씩 거든다. 깔깔대며 웃다가도 소리청으로만 바뀌면 정한을 포개 담은 구성진 성음들이다. 타고난 풍토 기질에 저마다 살아 온 온갖 풍상이 보태지면 들을수록 애절해질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조씨의 남도소리는 점잖은 과객조차 발길을 멈추게 한다. 진도(지산면 갈두리)에서 나고 자라 시집 가고 이젠 뼈까지 묻으려는 조씨는, 공례(꽁례)라는 이름보다 윤덕(允德)이란 어릴 적 이름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동생 호적으로 바뀐 탓에 ‘민적’에는 1930년생으로 되어 있다. “지긋지긋한 인생길이었제. 단 한 번도 호강을 해 봤다거나 기를 펴고 산적이 없응게. 친정 아버지가 죽을둥 살둥 바람을 펴 대더니 서방네(박정옥)도 여자라면 사죽을 못 씁디다. 나(내)가 속이 천만 번은 뒤집어졌소.” 한의 넋두리로 풀어 내는 ‘여자의 일생’은 그 또한 기구하고 가슴 짠했다. 응어리가 속살로 박혀야 제대로 산 것 같은 우리네 어머니·할머니 대의 삶이어서인가. 시집 가 이꼴 저꼴 다 봐도 ‘서방 계집질’은 못 본다 했다. 눈에 생불이 나며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꼴을 ‘꽁례’는 삭히며 2남 1녀를 키워냈다. 그 중 외동딸(박동매·34)이 자신의 조교로 소리 대를 이어 주고 있다. “친정 아버지(차정옥) 소리가 참말로 기막혔시오. 수 차례 살림을 뒤엎으면서도 집에만 돌아오면 동네 사람 청해다가 북치고 장구치고 난리였제. 나가 시방 하는 노래들은 그 때 배운 것이여.” 이 판에 속이 문드러진 건 친정 어머니(이장금)였다. 어린 윤덕(7)을 업고 그 꼴을 다 이겨 냈다. 그 때 아버지가 부르던 노래들이 <둥덩이타령>, <들노래>, <강강술래>, <상여소리>, <진도아리랑타령> 등이었다. 쏘아 놓은 살같이 빠른 세월이 무심하다던가. 지금은 가고 없는 아버지가 부르던 그 노래 가사가 원전이 되어 인간문화재로까지 지정받고 뒤늦은 세월에 대접받으며 괜찮게 살고 있다. 호미 들고 텃밭을 매면서도 흥얼댔고 열 네 살 먹은 ‘큰애기’가 소 뜯기러 나가서도 사정없이 질러 댔다고 한다. 둥덩에 덩 둥덩에 덩 당기 둥덩에 둥덩에 덩 (후렴) 내려온다 내려온다 새신랑이 내려온다 아랫동네 귀공자 새신랑이 내려온다 걸쾌자 걸쾌자 유명 갑사 걸쾌자 아무리 보아도 내 솜씨가 아니다 (둥덩이타령 중 앞소절) 등잔 심지를 돋우며 해 입힌 서방님의 갑사 걸쾌자가 남의 솜씨로 바뀌었다는 야유 겸 하소연이다. 진양조의 수십 소절 내용에는 걸쭉한 재담과 송곳 같은 해학이 넉넉히 담겨져 있다. 조씨가 기억해 내는 남도소리 가운데 상여소리는 멀쩡한 사람 오장육부까지 헤집어 놓는다. 에헤 에헤에야 에허어허 에헤에야 (후렴 반복) 어이가리 어이가리 어리를 갈꺼냐 바람도 쉬어 넘고 날짐승도 쉬어 넘는 심산험로를 어이를 갈꺼냐 – 후렴 공자님 맹자님은 책장마다 실리건만 오늘 가시는 망제님은 어느 책장에나 실릴꺼나 – 후렴 삼천갑자 동방삭은 삼천 갑자를 살았건만 가시는 망제님은 백 년도 못 살았네 – 후렴 세상사를 다 믿어도 못 믿을 건 죽음이로구나 – 후렴 부부일신도 뒤에 두고 살던 집도 다 버리고 차마 서러서 어이를 갈꺼나…… 조씨는 이 상여소리를 앞서서 메길 때마다 철들어 겪어 온 자신의 인생사가 어쩌면 그리도 어제 일같이 되살아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정신대에 안 끌려가려고 나이 열 일곱에 철모르고 시집을 갔던 일, 북해도로 징용 떠난 낭군을 기다리며 그 꿈 하나로 살아 온 새색시 적 5년. 해방(22)과 함께 여수항으로 귀국한 ‘서방네’는 난데없이 딴 여편네를 끌고 들어와 조씨를 눈물짓게 했고, 이러다간 새끼들마저 굶겨 죽이겠다 싶어 신안 진다리에 가 굵은 독을 받아다 새우젓 장사로 연명하며 한맺힌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당고초’보다 더 맵던 시어머니 시집살이는 그칠 줄 몰랐고…… “죽을 결심 먹고 지산면 바닷가 절벽에도 서 보고 높은 바위에도 올랐지만 새끼들이 걸립디여. 그럴 때마다 아래, 윗동네 사람 모여 소리를 했제. 1971년 ‘전국민속경연대회’(전주)서 박대통령이 들어 보더니 ‘어쩜 그리 노래를 잘할 수 있느냐’며 손을 잡아 줍디다.” 그 뒤 전남대, 방송국 등에서 녹음을 해 가고 대학 교수며 문화재관리국의 왕래가 잦더니 인간문화재가 되더라고 한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역경을 헤쳐 나온 지난 일을 떠올리고, 무식한 탓에 보태지도 못하며 어려서 듣고 배운 그대로일 뿐이라고 말한다. 진도에서야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지만 원형 보존을 위해 이영자(50, 상업)·박종단(51, 상업)·김송숙(51, 농업)·이복자(52, 농업)·정복심(44, 농업)·설정순(43, 농업)씨를 등록 이수자로, 박춘자(43, 농업)·설귀자(47, 농업)·박연복(47, 농업) 씨는 일반 이수생으로 지정해 놓고 있다. 곽서희(45, 농업)·이원심(44, 농업)·박영순(37, 농업)·이윤선(31, 공무원)씨 등은 전수생들. 이들 모두는 너나 할 것 없이 진도 토박이로 타고난 소리꾼들이다. 남도소리 가운데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남도 들노래>는 일하는 데 협동심을 더하고 고통을 잊기 위한 노동요지만 그 안에 사랑이 있고 애환이 있다. 모 찌는 소리, 모 심는 소리, 논 매는 소리를 ‘메기는 소리’와 ‘받는 소리’로 이어 내는 것이다. 이 고루(고리) 걸고 저 고루 걸어 열 두 보루를 다 걸고야 소리 없이 열리길래 님 오는가 내다보니 온다는 님은 아니 오고 동남풍이 날 속이네 – 후렴 앉았으니 님이 온가 누웠으니 잠이 온가 잠도 잃고 님도 잃어 양단간에 다 잃었네. 애잔한 노랫말들이 청산유수처럼 풀려 나간다. 이 소리에 취해 모를 찌고 심으며, 논을 매다 보면 어느덧 하루 해가 뉘엿뉘엿 졌던 것이다. 남의 사랑 얘기라도 남녀간 귀밑 얘긴 자다가도 귀가 번쩍 띄는 법이다. 방학 때면 남도소리를 배우겠다고 전국에서 진도를 찾는 학생들이 60~70명씩이나 되는데 전수 회관 하나 없는 게 조씨의 남은 한이라고 한다. “사람이 사람한테 모함받고 시달리는 게 가장 못 당할 짓이여. ‘인간문화재’가 뭔지 나를 씹어 대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있다요. 환장할 노릇이제.” 알고 나면 모두가 힘든 인생길, 서로 덕담하며 살았으면 쓰겠다고 조공례씨는 맺었다. <세계일보>, 이규원, 1993년 8월 24일
연계정보
관련사이트관련가치정보
연계정보
-민요
관련사이트
아태여성정보통신센
관련사이트
SOUNDSPACE
관련멀티미디어(전체0건)
이미지 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