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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국 (1942.3.10~)

예술가
정재국 (1942.3.10~)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2.4.1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전수 장학생 선정 1977.5.1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이수자 선정 1982.9.1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 후보 선정 1993.8.2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62.2.12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 6년 졸업
생애(약력)
1966.1. 국립국악원 연주원 1972.4. 제1회 피리독주회 1974.3. 이화여자대학교, 추계예술대학 국악과 강사 1981.4. 중요무형문화재 피리, 태평소 독주회 1984.3. 서울대학교 강사 1986.1. 공로표창 수상 1991.3. 국립국악원 연주단 지도위원 2003.3. <피리정악 및 대취타의 대를 잇는 예술혼>(국립국악원 예악당)
리뷰
정악(正樂)피리와 태평소의 제일인자(第一人者) ‘대취타(大吹打)보존회’ 결성, 활성화(活性化) 노력 대취타(大吹打)는 태평소(날라리), 나팔, 나각(소라) 등 취주악기와 징, 장구, 용고, 자둥이나 귀인(貴人)의 행차 및 군대의 행진 등에 연주되던 행진음악으로 우리나라의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취타(大吹打)는 무녕지곡(武寧之曲)이라고도 하는데, 취타(吹打)란 용어는 글자 뜻 그대로 불고(吹) 치는(打) 형태의 음악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취타는 악기의 편성에 따라 대취타와 소취타로 구분되며 이에는 취타내취(內吹)와 세악(細樂)내취가 있어 이 두 내취가 합성하여 조직된 것이 대취타이고, 세악내취가 없이 짜여진 것이 소취타가 되는 것이다. 이들의 악사를 취고수(吹鼓手)와 세악수(細樂手)라 부르는데 취고수는 앞에 서고 세악수는 뒤에 선다. 대취타의 편제는 의식의 성격이나 신분에 따라 악기의 종류와 사람의 수효가 다른데 숙종 37년(1711년)에 일본에 파송된 통신사의 행렬을 보면 정사·부사·종사관 등 494명의 일행 속에 51명으로 구성된 대취타의 편제가 보이며, 창덕궁 내 동행각(東行閣)에 전시된 능행도에 의하면 대취타의 총인원이 62명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취타의 정규편성은 50명 이상인 것으로 보인다. 대취타는 궁중에서는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해 있었고 오영문(五營門), 즉 용호영(龍虎營),훈련원(訓練院),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 등에도 있었으며, 각 지방의 감영, 병영, 수영에는 소취타가 있었다. 대취타와 소취타는 편제로서의 대소 외에 음악의 악절에서도 역시 대소의 차이가 있었었던 듯하다. 정조 11년(1787년)에 간행된 <병학지남(兵學指南)>에 명취타호(明吹打號)라고 하여 취타의 호령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책자에 ‘군악대개문칙대취타십이절(軍樂大開門則大吹打十二節), 격고대삼소사소개문소취타칠절(擊鼓大三小四小開門小吹打七節)’ 운운하였으니 대취타 가락은 12절이요, 소취타 가락은 7절임을 알 수 있다. 대취타의 음악적 특성은 전곡을 통하여 한결같이 장단을 12박으로 엮어 진행하고 있는데 2박자가 여섯이 모여 한 장단을 형성한 형태이니 행진곡풍의 특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취고수들은 작우(雀羽)가 꽂힌 전립(戰笠)을 쓰고 누런 철릭(天翼)을 입은 위에 남색 띠를 두르고 미투리를 신었는데, 손에 등채(지휘봉)를 든 집사(執事)가 ‘명금일하대취타(鳴金一下大吹打)하랍신다’ 하고 크게 호령하면 징수가 징을 한번 크게 울리고 이어 고수가 북채로 용고의 변죽을 세번 딱딱딱 치면 태평소를 비롯하여 모든 악기들이 일제히 장중하게 울리는데 태평소가 시종 주선율을 담당한다. 이중 등채를 잡는 집사(執事)의 역할과 태평소의 주선율을 담당하여 대취타를 시종 이끌어 가는 사람은 대취타의 유일한 예능보유자 정재국(鄭在國)씨(54세)이다. “의식음악으로서의 취타악은 이웃나라인 일본이나 중국에도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입니다. 다만 서양에서는 유일하게 영국에 하나 있습니다. 따라서 동양에는 한국, 서양에는 영국, 하나씩 밖에 없는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한 음악이지요. 그러한 고전적인 음악이 1907년 우리나라 군대가 일제에 의하여 해산된 이래 거의 인멸상태에 있다가 지난 61년 국립국악원에서 이를 부활하여 그 해 국군의 날에 기념행사로 재현하였으며, 68년에는 육군군악대 안에 국악군악대가 창설되어 이의 보존과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 대취타가 7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조선시대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해있던 마지막 취고수 최인서(崔仁瑞)옹(1892~1978년)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으나 최(崔)옹마저 78년에 작고하자 예능보유자가 10여년 동안 없는 상태로 지속되어 오다가 작년 8월, 최(崔)옹이 작고한지 15년만에야 ‘국립국악원’ 원로단원 정재국(鄭在國)씨를 예능보유자로 인정, 우리의 전통군악인 대취타의 전승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정재국씨는 1942년 충북 진천군 진천읍에서 정희변(鄭禧變)씨의 2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실부모하여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사는 큰아버지의 밑에서 자라면서 혜화국민학교를 마쳤다. 향학열이 남달리 강했던 그였지만 6·25동란 직후의 어려움 속에서 큰아버지에게 중학교육을 의탁할 수가 없어 놀고 있던 중에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 국악중고등학교의 전신)의 1기생인 4촌형을 만나 국비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1956년 ‘국악사양성소’ 제2기생으로 입학한 그는 먼저 피리와 인연을 맺었다. 입학한 이듬해인 1957년에 피리의 명인 김준현(金俊鉉)선생을 만나 정악피리를 사사하고부터 피리를 전공으로 선택하였으며 이어 김태변(金泰變)선생에게도 피리를 배우고 이충선(李忠善)선생에게는 민속음악을 사사하였으며 성경린(成慶麟)선생에게는 국악이론을 사사하였다. 1961년 국군의날 행사에 대취타가 재현된 것을 계기로 최인서(崔仁瑞)선생으로부터 피리와 유사한 태평소의 가락을 사사하고 태평소의 서(舌)의 가늠이며 그 제작기법까지도 전수 받았다. 1962년 봄에 ‘국악사양성소’의 6년과정을 마친 그는 그 해 가을 5.16재단이 구성한 민속예술단원의 일원으로 6개월 동안의 미국순회공연에 참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군에 입대하여 군예대에서 이주일·이생강씨 등과 함께 활약하다가 65년 12월에 제대하였다. 정재국(鄭在國)씨는 이내 ‘국립국악원’ 악사가 되었으니 1966년 1월 연주단 연주원으로 임명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도위원(79~81년)·악장(82~92년)·원로단원(현재)을 역임하며 수(首)피리(수석 피리주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면서 1971년에 대취타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최인서 선생으로부터 태평소를 비롯하여 갖가지 취주악기와 타악기를 본격적으로 전수 받아 1977년에는 이수자로 지목되고 1978년에 최인서 선생이 작고하자 대취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활약하다 82년에는 예능보유자후보로 선정되었다. 정씨는 이때부터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개인종목으로 지정된 탓에 그동안 7명의 이수자를 배출하고 현재 4명의 전수생을 지도하고 있을 뿐이다. “7명의 이수자와 4명의 전수생으로는 소취타 규모밖에 안 됩니다. 이래가지고는 50여명에 이르는 대취타의 편제를 메울 길이 없으니 단체종목으로 지정해서 악기별로 한 사람씩의 전수생을 기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어야 합니다.” 문외한인 기자의 생각에도 귀담아 들을 의견인 듯싶다. 정(鄭)씨는 대취타의 전수생들을 양성함에 있어서도 태평소는 필수과목으로, 그밖의 취타악기는 선택과목으로 지도를 하는데 피리 전공자를 위주로 전수생을 선발, 양성하고 있다. 피리를 연주할줄 아는 사람은 태평소를 익히기 쉽기 때문이다. 정재국(鄭在國)씨는 이밖에도 국방부 취타대에 주1회씩 나가 지도하고 있으며 서울여상 취타대 등 여러곳의 고등학교 취타대의 편성과 교육에도 관여하는 등 대취타의 보급에 대단한 열의를 쏟아왔다. 이에 작년 8월 문화체육부는 예능보유자가 없어 전승의 맥이 끊어질 우려가 있는 대취타의 전승 보급을 위해 전통예능인으로서의 인품과 경륜을 두루 갖춘 적격자로 그간 대취타 전승의 활성화에 노력해온 예능보유자후보 정재국씨를 예능보유자로 승격 인정한다고 발표하였었다. 이에 정재국(鄭在國)씨는 작년 9월 ‘대취타보존회’를 결성하고 대취타 전승의 활성화에 열의를 불태우고 있다. 그러면서도 “무슨 영문인지 청와대 행사에 내 나가던 국방부 취타대가 올해부터는 나가지 않게 되었다니 동양의 유일한 취타대를 국가적인 공식행사에서 배제한다면 설 자리가 없지 않느냐”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정씨의 외아들 O(한자 모르겠음)鍾군(23세)은 단국대 국악과에 다니다 현재 군에 입대하여 국방부 취타대에서 그의 전공을 살리며 복무하고 있는데 그가 전공하는 악기는 여자들이 흔히 연주하는 해금과 아쟁이다. 이제까지는 대취타의 예능보유자로서의 측면에서 정재국씨를 살펴보았지만 실은 대취타보다는 피리의 명인으로서의 성가가 더 높다. 정악의 합주에서는 뭐니뭐니해도 피리가 주선율인데 그는 그중에서도 수(首)피리로, 당피리·향피리·세피리의 전곡(全曲 28곡)을 다 외우고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처지이며 현재의 젊은 피리주자의 대부분은 그의 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씨는 그동안 피리 독주회와 태평소 독주회를 여러 차례 가져 사계의 정상임을 과시하고 해외공연도 30여차례 가졌으며, ‘문화공보부장관 표창’, ‘KBS국악대상’ 수상, ‘대한민국 문화포장’ 수상 등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1961년 ‘국립국악원’ 악사로 인연을 맺은 이래 한번도 한눈을 팔지않고 국립국악원만을 지켜온 연주자로 최장수 악장을 역임한 정악 제2세대의 선두주자이다. ‘국립국악원’ 원로단원인 정재국씨는 지금도 서울대, 이대, 추계대, 한대 등에 강사로 나가 후계자를 양성하는 일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이제 피리연주에 쏟던 정열을 대취타의 예능을 전수하고 활성화하는데 정진하도록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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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타(吹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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