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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기 (1922.2.10~1997.1.26)

예술가
홍원기 (1922.2.10~1997.1.26)
출생지
서울시 종로구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5.7.12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보유자 인정 1997.1.26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보유자 사망해제
학력(계보)
김영윤에게 가야금 사사 이주환, 이병성에게 가곡, 가사, 시조 사사 최상욱에게 시조제 사사 1941.3 이왕직아악사 양성소 졸업
생애(약력)
1941.4. 서울중앙방송국, 문화, 동양, 동아방송국에서 남창가곡 가사 시조창 및 가야금 등을 방송 1946.12. 제1회 전국음악경연대회 가야금 1등, 시조 2등(문교부) 수상 1951.4. 국립국악원 예술사 1959.1. 전승기록 자료(문화공보부) 남창가곡 시조창 등을 녹음 1960.5. 한국국악예술학교 교사(국악개론 및 시조창) 15년 1961.3.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강사(가야금) 9년 1965.2. 서울특별시립국악관현악단 근무(작곡-악장-교체지휘) 10년 1966.3.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강사(이론 실기) 13년 1968.2. 건국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3년필 1974.3. 정악가야금 전곡(여민락 제외)을 녹음(문화재 관리국)
리뷰
이왕직(李王職) 아악부원 양성소(雅樂部員 養成所)서 수업(修業) 가야금과 정가(正歌)에 모두 능한 달인(達人) 벽사창이 어른어른커늘 임만 여겨 펄떡 뛰어 나가보니 임은 아니 오고 명월이 만정(滿庭)한데 벽오동 젖은 잎에 봉황이 와서 깃 다듬는 그림자로다 이는 가곡(歌曲)의 예능보유자 홍원기(洪元基)씨가 즐겨 부르는 가곡 우조(羽調) <음악(音樂)>의 가사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곡이란 <고향생각>, <바우고개>, <가고파> 등과 같은 시(時)를 노랫말로 하여 곡을 붙인 서정적인 성악곡으로서의 서양음악의 한 갈래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통음악 중 정가(正歌)의 한 갈래로서의 성악곡이다. 우리나라 재래음악으로서의 가곡(歌曲)은 시조시(時調詩)를 관현악 반주로 부르는 오장(五章) 형식의 노래이다. 가곡(歌曲)이라는 이름은, 가곡을 위하여 많은 시조를 모아 엮은 책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청구영언(靑丘永言)·해동가요(海東歌謠)·고금가곡(古今歌曲)·가곡원류(歌曲源流) 등이 있는데 고금가곡이니 가곡원류라 부르던 그 가곡에서 따온 이름이다. 가곡은 원래 만대엽(慢大葉)·중대엽(中大葉)·수(數·삭)대엽(大葉)이었는데 만대엽과 중대엽은 없어지고 삭대엽만 남아 거기에서 많은 파생곡이 생겨 오늘날 남창(男唱) 26곡, 여창(女唱) 15곡이 불리워지고 있다. 가곡과 시조창은 같은 시조시(時調詩)를 얹어 부르면서도 음악적인 형식은 다르다. 시조창은 3장(章)형식인데 반하여 가곡은 5장형식으로 전주(前奏) 또는 후주(後奏)에 해당하는 대여음(大餘音)과 간주격(間奏格)인 중여음(中餘音)이 3장과 4장 사이에 낀다. 또한 시조창은 장구 반주 하나면 족하고 장구마저 없으면 무릎장단으로도 무관하나, 가곡은 피나는 훈련을 쌓아야 하는 전문가의 음악으로, 특히 한가지 정도의 악기를 전공함으로써 거문고·가야금·세피리·대금·해금·장구 등으로 편성되는 관현악반주에까지 익숙해야 한다. 현재 가곡의 전통은 하규일(河圭一)(1867~1937년)이 ‘이왕직아악부’의 이병성(李炳星) (1909~1960년)과 이주환(李珠煥)(1909~1972년)에게 전수하고 이들로부터 현재의 예능보유자 홍원기(洪元基)·전효준(田孝準)·김월하(金月荷) 등에게 이어지고 있다. 청운(淸韻) 홍원기(洪元基)씨를 분당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국악이 양악의 절반 대우만 받아도 좋겠어요. 피아노를 배우려는 아이들은 많아도 가야금이니 거문고를 배우려는 아이는 별로 눈에 띄지를 않아요. 교육당국의 국악교육에 문제가 있어요. 내 나라 음악을 두고 남의 나라 음악부터 가르치는데 아이들이야 별수 있나요. 국악도 요즈음 너무 민속악에 편중되어 있어요. 그러니 가곡이나 가서·시조와 같은 정가(正歌)는 뿌리를 내릴 수가 없어요.” 홍원기(洪元基)씨는 ‘국악의 해’이면서도 국악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그중에서도 가곡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시류에 밀려나 있는 현상이 안타깝다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1922년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서 홍성우(洪性禹)의 5남1녀중 3남으로 태어난 그는 궁내부(宮內府)에 근무했던 아버지로부터 “네 음성이 좋은데다 네 사주팔자의 세 기둥에 예(藝)자가 들어 있어 예능방면으로 나갈 사주를 타고 났으니 그쪽으로 나가야 이름을 크게 떨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홍씨가 국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서울청운국민학교를 졸업하던 1936년의 일이었다. “마침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에 다니던 둘째 형의 친구인 장사훈(張師勛)씨가 그곳에 입학하면 음악뿐만 아니라 중학교 과정을 가르쳐 준다고 권하는데다, 일제침탈의 울분을 속으로 삭여오던 아버지가 ‘아무리 극악한 왜놈들이지만 우리 말과 음악만은 가져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네 사주팔자대로 국악에 정진하여, 이름대로 우리 음악의 으뜸(元)되는 기틀(基)이 되도록 하라’는 당부에 따라 입학했지요.” 홍(洪)소년은 이곳에서 2년 동안에 걸쳐 여러 악기와 소리를 두루 익혀 기본과정을 마치고 3학년이 되면서 가야금과 성악을 전공으로 택하였다. 가야금은 김영윤(金永胤)으로부터 배우고 가곡·가사·시조 등 성악은 하규일(河圭一)의 수제자인 이병성(李炳星)·이주환(李珠煥)으로부터 사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방과후에는 누상동에 살던 가무별감을 지낸 최상욱으로부터도 따로 전수받았다. 그당시 가장 명성을 떨쳤던 하규일은 그가 2학년 때 작고하는 바람에 직접 사사 받을 기회가 없었다. 1941년 양성소의 5년과정을 마친 그는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가 되어 경성방송국의 국악프로에 출연하는 등 활동하다가 몇해 지나지 않아 해방을 맞게 되었다. 이때 전국적으로 일기 시작한 우리것찾기 운동에 편승하여 국악계에도 생기가 되살아났다. 홍씨도 시조강습이다, 국악강습이다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1946년 12월에는 문교부가 주최한 ‘제1회 전국음악경연대회’ 국악부문에 나가 가야금에 1등, 시조에 2등을 차지하였으며, 다시 이듬해에도 출전하여 시조에서마저도 수석을 차지하였다. 6·25때 부산으로 피난한 그는 ‘국립국악원’ 예술사로 취임하여 예인의 길로 돌아왔으나 그도 1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그가 진주(晋州) 친구의 부탁으로 진주여중에 한달 동안 국악 강의하러 간 사이에 그의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고 앉았기 때문이다. 이 일로 해서 그는 국악원과 한동안 소원한 관계로 지내게 되었다. 진주에 눌러앉은 홍씨는 진주여중 국어 강사로 외도를 하게 되었고 수복 후에는 서울사범학교의 국어 강사로 이어졌으며 1960년에는 한국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취임, 1974년까지 본격적인 교사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러나 국악예술학교에서는 국악개론과 시조창을 담당하여 자기의 전공을 반이나마 찾은 셈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1년에는 서울대 음대 국악과에서 가야금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의 후학에 대한 국악전수는 이후 30년이 계속되었다. 서울대 음대 국악과(가야금) 8년을 비롯하여 건국대(국악개론) 13년, 한양대(장단 및 가야금) 7년, 경희대(국악개론 및 실기) 11년, 전남대(가곡 및 정악 가야금) 10년 등 후학지도에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홍씨는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하여 37세의 늦은 나이에 건국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하였고 이어 대학원의 석박사 과정까지를 이수하였는데 그의 석사학위논문은 ‘송강(松江)의 장진주사(奬進酒辭)연구’였다. 1962년부터는 동아일보사 주최의 ‘전국명인명창대회’에 출연, 7년을 계속하였고 1965년에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 입단하여 9년 동안을 작곡담당·제1악장(樂長)·교체지휘자 등으로 활약하였다. 홍씨는 이때 <망향(望鄕)>, <회상(回想)>, <산장(山莊)의 밤> 등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홍원기씨는 방송을 통한 국악보급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일제시대 경성방송을 통한 국악 선양을 비롯하여 KBS와 여러 민간방송을 통하여 가곡과 가사·시조창 등에 대한 국악해설을 맡아왔으며,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의 청탁으로 1974년·1976년·1979년 세차례에 걸쳐 정악가야금과 가곡을 녹음, 음반화하기도 하였다. 한편 1974년에는 ‘국립국악원’과 다시 인연을 맺어 정악과의 연주원으로 활약하게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예능보유자로 인정된 이후에는 기곡의 보급을 위한 공연활동과 후계자 양성을 위한 전수활동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각종 국악공연에는 빠짐없이 출연하는 한편 서울대 국악과 출신 문하생 중심으로 ‘한국전통가곡진흥원’을 창설, 정기발표회를 갖기도 하였다. 제자들도 튼실하게 길러냈다. 보유자 후보 김경배(金景培)(경북대 교수)와 조교 이오규(李五奎)(국립국악원 거문고수석 연주자)를 비롯하여 이두원(부산대 강사)·조용석(전북도립국악원교수)·김영욱(돈보스모대 교수)·윤중강(음악평론가·현재 渡日中)·김기철(KBS국악관현악단) 등 7명. 이밖에도 현재 박영기와 조길호 두 명의 전수생을 지도하고 있다. 1983년에 예술원 정회원이 된 홍원기씨는 그동안 국악의 보급과 선양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85년에는 예술원의 공로상을 받았으며 1989년에는 ‘대한민국 화관(花冠)문화훈장’을 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슴이 답답하다. 작년 말에 악화된 당뇨로 올해는 공연과 전수활동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연말까지는 완쾌될 듯하다니 그때까진 기다릴 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손 모아 완쾌를 빈다. 그래서 내년 초에는 미국의 작곡가 알렌 호바네스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오페라 이상의 아름다운 천악(天樂)’이라고 찬탄한 가곡을 그의 맑은 목을 통해서 듣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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