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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관 (1917.11.27~)

예술가
이은관 (1917.11.27~)
출생지
강원도 율천군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84.10.15 중요무형문화재 29호 서도소리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42.5.10 조선음악협회 가무단원 1940. 황해도 황주 이인수선생님에게 서도소리 배뱅이굿 사사
생애(약력)
1946.5. 대한국악원 민요 부원 1965.3. (사)한국국악협회 이사 1970.3. 이은관 속예술학원 설립 원장 1982.1.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 1982.11. 한국방송공사 국악대상 수상 1990.10. 보관문화훈장 서훈 2000.2. 공개행사 발표공연(문예회관 대극장) 2001.5. 공개행사 발표공연(국립국악원 우면당) 2002.5. 공개행사 발표공연(국립국악원 우면당) 2002.11. 공개행사 발표공연(국립민속박물관) 2002.11. 제9회 방일영국악상 수상 2003.3. 제12회 선소리산타령 발표공연 특별출연(국립국악원 예악당) 2003. 4. <이은관 서도소리 배뱅이굿 (국립국악원 우면당) >
리뷰
후계자양성에 여생 바칠 “왔구나. 왔소이다. 불쌍히 죽어서 황천 갔던 배뱅이 혼이 평양 사는 박수무당의 몸을 빌고 입을 빌어 오늘에야 왔구나. 오마니 오마니 우리 오마니는 어딜 가고 딸자식 배뱅이가 왔다고 하는데도 모른 체 하나요. 살았을 적 같으면 내가 어딜 갔다 온다면 우리 오마니가 나를 보고 동지섣달 꽃 핀 듯이 화다닥 뛰어 나오련만 죽어지고 길 갈라서니깐 쓸 곳이 없구려. 오면 온줄 알며 가면 간줄 아나. 오마니 오마니‥‥‥ 어딜갔소. 오마니!” 이 소리는 <배뱅이굿>의 하이라이트인 가짜 박수무당이 배뱅이의 혼신을 불러들이는 대목이다. <배뱅이굿>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 서도소리이다. 그러나 서도소리의 대표적 노래인 수심가와는 달리 판소리와 그 형태가 아주 비슷하다. 소리와 아니리·발림의 형태로 공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고한 국문학자 김동욱씨는 <배뱅이굿>을 가창방식은 비록 다르나 장르개념에서는 판소리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호남지방에서 주로 부르는 판소리를 남방계 판소리라 하는데 비해 <배뱅이굿>은 북방계판소리라 부른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어우야담에 나오는 동윤설화와 같은 근원설화가 밑바탕이 되었다는 <배뱅이굿>은 황해도를 중심으로 서도지방에 널리 퍼져 있는 연극적인 굿 놀이인데, 절에 있던 상좌승이 탁발을 나왔다가 정승의 딸 배뱅이와 사랑하게 되고, 상자승이 입산한 후 배뱅이가 상사병이 들어 죽게 되자 청춘에 요절한 배뱅이네 집에서 배뱅이의 죽은 넋을 천도하기 위하여 각도의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데 평양의 가짜 박수무당이 기지로 배뱅이 부모를 속이고 재물을 걷어간다는 내용이다. 이 <배뱅이굿>은 조선말기에 유명했던 평안남도 용강의 소리를 김관준이 처음 지어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관준은 <배뱅이굿> 외에도 <안중근가>와 <까투리 타령> 등의 많은 소리를 지었다고 한다. <배뱅이굿>은 그 후 그의 아들 김종조와 이인수, 최순, 김칠성, 김동호와 같은 명창으로 이어졌으며, 김관준의 수제자 이인수에 의하여 오늘날의 이은관옹에게 전수되었다. <배뱅이굿> 하면 이은관, 이은관 하면 <배뱅이굿>을 연상하리만큼 이은관옹은 <배뱅이굿>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이은관옹은 1917년, 지금의 휴전선 이북인 강원도 율천군 이천면 회산리에서 논 20마지기의 중농집 맏아들로 태어났다. 율천 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소리에 귀가 트인 소년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산에 나무하러 가면서도 ‘산타령’을 지게 작대기로 장단을 맞추면서 곧잘 불러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을 뿐만 아니라 학예회 때는 어김없이 뽑혀 나가 노래를 불러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학교를 마치고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면서도 귀는 늘 유성기나 라디오를 향해 열려 있었다. 농사일을 거두는 둥 마는 둥 빈둥거리고 있던 열여덟 살 때에 반가운 소식이 그에게 전해진다. 태평레코드사와 매일신문 철원지국이 공동주최하는 ‘전국신인남녀콩쿠르’대회가 철원지방에서 열린다는 것이다. 그 당시 산골짜기에 사는 젊은 ‘촌놈(?)’치고 그런 콩쿠르대회에 나가고 싶은 충동을 안 느끼는 사람이 없을 때이기는 하지만 그도 “드디어 가수가 될 기회가 왔구나”하며 철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이 콩쿠르 대회에서 ‘사설난봉가’와 ‘창부타령’을 불러 당당히 1등을 했다. 소리 선생에게 배운 일도 없이 스스로 좋아서 불렀던 노래솜씨가 드디어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이때 심사를 맡았던 분의 추천으로 서울에 올라와 경성방송국에 출연, ‘초한가’를 불렀다. 그의 고향에서는 소년명창이 났다고 떠들썩했다. 천성적으로 재주를 타고났다고는 하지만 유성기나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듣고 배운 솜씨만으로는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몇 날을 궁리한 끝에 정식으로 소리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몰래 집을 빠져 나왔다. 그때 서도소리로 가장 이름을 날렸던 사람은 이인수(李仁洙)명창이었다. 황해도 황주의 소리선생이었던 이씨의 집안 일을 거들어주면서 소리를 배웠다. 2년 남짓 동안에 <배뱅이굿>을 비롯하여 공명가·초한가·배따라기와 같은 서도소리를 거의 다 익힌다.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배운 셈이었다. 이인수 문하에서 소리공부를 마치고 23세 되던 해에 서울에 올라온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왕십리에 살던 이명길 명창으로부터 노래가락, ‘창부타령’, ‘청춘가’, ‘사발가’ 등 경기민요를 배우고 이어 마포에 사는 최경식 명창으로부터 시조를 배워 소리의 기초를 모두 닦았다. 소리공부를 다 마친 그는 황해도 장연의 귄번에서 잠시 소리선생을 하다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 조선가무단과 인연을 맺으면서 무대생활을 시작했다. 쟁쟁한 사람들 틈에 끼어 단가 몇 마디 부르는 게 고작이었던 햇병아리단원에 불과했지만 그는 평양, 해주, 강계, 신의주, 원산, 청진 등을 돌아다니며 유랑극단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가무단의 생활도 오래 가지 못했다. 이 무렵 그에게 한 흥행가로부터 뜻밖의 교섭이 왔다. 그 시절 <배뱅이굿>으로 인기가 대단했던 김계춘과 한 무대에서 <배뱅이굿>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야말로 그로선 스타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김계춘의 소리에 눌려 매장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김계춘과의 소리 겨루기 판이 벌어졌는데, 김계춘이 관객을 온통 울려 놓으면 그가 나가 실컷 웃겨 놓고, 김계춘이 높은 소리를 내면 그도 보란 듯이 높고 간드러지게 받아넘겼다. 사흘예정이던 공연이 구경꾼이 몰려들어 사흘을 더 연장하는 히트였다. 이 무대가 그를 배뱅이꾼의 터줏대감으로서 자리를 굳히게 한 계기가 된 셈이었다. 이때 그는 작고한 연출가 박진씨에게 발탁되어 당대 최고의 만담가 신불춘에게 소개되었다. 심사 끝에 신불출일행의 단원이 되었다. 신불출일행의 공연은 박춘복과 송홍란이 재담을 하고 이은관이 <배뱅이굿>을 하면 마지막에 신불출이 만담을 하는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때의 인기는 대단했다. 해방이 되면서 신불출 일행과 헤어져 대한국악원 민요부의 회원으로 활약하며 이제 막 소리꾼으로 기량은 뽐 낼 무렵 그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목이 주저앉았다. 6·25사변 2개월 전의 일이다. 농촌위문공연 순회 중 전북 김제에서 공연을 마치고 다음 공연장으로 가던 중 비를 맞았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목이 꽉 잠겨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며칠 지나면 깨끗해질 줄 알았던 목이 몇 달이 지나도 트이질 않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2년 남짓 쉬고 있던 1952년 가을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왠지 시원하게 느껴졌다. 조심스레 소리를 내어보니 목이 트이는 게 아닌가. "왔구나. 왔소이다. 배뱅이가 왔구나"가 아니라 "왔구나. 왔소이다. 2년 전에 죽었던 내 목소리가 살아서 왔구나" 였다. 이옹은 그때를 상기하며 목이 잠길 때는 무리하지 말고 쉬는 게 상책이라고 했다. 목이 되살아난 李옹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957년 영화 <배뱅이굿>에 출연, <배뱅이굿>의 대명사로서 그의 자리를 굳혔으며 또 그의 목소리를 음반에 담아 널리 알리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국악협회 이사와 민속예술학원 원장으로서 국악의 보급과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이은관 민요단을 구성, 전국 순회공연과 일본 등지의 해외공연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82년에는 KBS 제정 국악대상을 수상하였으며 1984년에 서도소리 <배뱅이굿>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고 지난해에는 정부로부터 보훈문화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이옹은 <배뱅이굿>에 관한 한 감히 추종할 자가 없는 독보적인 존재이며, 70이 넘은 고령임에도 목과 기능이 조금도 쇠함이 없이 원숙한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이옹에게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그를 이을 만한 든든한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다. - 후계자를 양성하시지 않는 겁니까? “일찍 키우지 못해 아쉽기는 합니다만 지금 김경열, 김경선, 박기옥, 박정욱, 박준영 등 목이 좋은 젊은이들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네 나이 80이 될 때까지는 두 명 정도를 큰 재목으로 키워 놓을 작정입니다.” 옹이라는 칭호가 걸맞지 않을 만큼 정정한 그의 모습에서 넘어도 되겠다는 확신을 얻고 돌아섰다. <월간 문화재>, 199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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