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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녀 (1913.12.17~2001.1.8)

예술가
오복녀 (1913.12.17~2001.1.8)
출생지
평안남도 평양시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1.2.8.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 보유자 인정 2001.1.8.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 보유자 사망해제
학력(계보)
1929. 장금화에게 서도소리 사사 1930. 선경익에게 서도소리 사사 1931. 정학기에게 가곡가사 사사
생애(약력)
1968. 한국민요연구회 이사 1968.~2001. 민속예술제경연대회 참가 공로상 수상(5회) 1978. 한국인간문화재연합회 이사 1980.~1982. 추계예술대학 국악과 강사 1986.~2001. 서도소리보존회 회장 1986.~2001.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동대학원 국악과 강사 1994.~2001. 용인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 강사 1997. 은관문화훈장 서훈 1999. 방일영국악상 수상 2000. KBS 국악대상 특별공로상 수상
리뷰
서도소리 오복녀 ‘서도소리가 맥이 끊기지 않도록 많은 젊은이들이 배워줬음’ 하는 게 서도소리의 명창 오복녀 여사(75)의 소망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의 吳여사는 지난 60여 년간 大同江의 푸른 물이 넘실대는, 그 밑바닥으로 짙은 한이 관류하는 애절한 서도소리를 이 땅에 심어왔다. 전쟁으로 인한 남다른 슬픔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온 타고난 명창 오복녀 여사의 지난 삶의 흥과 한을 다시 들어본다. 1913년 12월 17일 평안남도 평양시 상수리 300번지에서 태어난 吳여사는 16살 꽃다운 나이 때부터 서도소리를 불렀다. 그는 당시 정학기 선생께 가곡가사를, 장금화 선생께 서도소리를 사사 받았다. 5살 때부터 서울에 살았던 그는 덕수학교(당시 경성여자공립고보)를 다닐 때 온 동네에 흉내 잘 내는 재간동이로 소문났다. 염소, 고양이 등 짐승은 물론 장사들 물건 파는 소리도 기막히게 뽑아냈다는 것이 어느 날 한 동네 언니 집 사랑방에서 벌어진 소리잔치에 들렀다가 입문하게 됐다. 그 때 40세의 장금화씨가 부르던 소리를 며칠 얻어듣고 놋재떨이에 담뱃대로 장단 치며 불렀던 것이 스승의 눈에 들어 월사금도 면제받는 제자가 됐다. 27살 때 평양에 옮겨가 제고장 풍속을 살렸고 이리 저리 불려 다니며 소리자랑도 많이 했으나 살림에 묻혔다가 54살 때 민속경연대회에 나간 것을 계기로 다시 소리일선에 나섰다. 吳여사의 노래는 삭아 곰삭은 목청에 익을 대로 익은 가락이 어울러 애원성마저도 자분자분한 흥취로 담아낸다. 목을 눌러 떨 때나 콧소리를 낼 때 웬만큼 익지 않으면 귀에 거슬릴 정도로 어렵고 힘든 곡조를 편안하게 풀어내는 솜씨지만, 기음 완전 5도 윗소리를 눌러 떨다 아래로 끌어내리는 호흡은 저고리 앞섶이 달싹거릴 만큼 격렬하다. 西道소리하면 수심가가 대표적이다. 장단 없이 느릿하게 부르는데 마냥 구슬픈 느낌을 준다. 이어 부르는 엮은 수심가에서는 정확한 템포로 온갖 사설을 인용해 엮어낸다. 가슴에 울음이 맺혀진 것을 끝 없는 푸념으로 후련하게 털어 내는 것이다. 吳여사가 무대에 복귀하면서도 꼭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인생 한평생을 돌아보듯. “노자 노자 젊어 청춘에 맘대로 노잔다. 나이 맡아 白首를 날리면 나 못 놀겠네. 인생이 한번 죽어지면 萬樹長林에 雲霧로다. 청춘 시절에 힘써 사업합시다. 천수만근 서릿바람에 日日夜夜 수심일레라. 이내 마음 풀어내어 수심가를 부르리라.” (수심가의 일부) 서도소리란 황해도, 평안도 지방에서부터 불리던 노래를 총칭한다. 그러나 크게 네 가지 형태로 나눠볼 수 있다. 시조를 창으로 읊는 시조라 서서 부른다 해서 입창이라고 하는 선소리, 그 반대로 앉아서 부른다 해서 좌창이라고 하는 잡가, 그리고 민요 등으로 대별된다. 서도소리의 밑바닥을 관류하는 큰 흐름은 짙은 한이다. 사설이 주는 비애감과 애절함의 농도는 다른 지방의 노래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서도소리를 하려면 목을 특히 잘 써야 돼요. 뱃속에서 누르고 목울대로 끼고 살짝 꺾었다가 방울소리처럼 쳐 올리기도 해요. 제자를 가르치다보니 들어서 배운다는 12선 심류로는 안 되겠습디다. 그래서 목 쓰는 요령과 기법을 정리하고 12선에다 선율을 표시해 책도 냈어요.” 그렇게 정리한 목쓰기는 무려 42가지나 된다. 吳여사는 한 때 춤을 배우고 가야금 산조를 익히기도 했다. 물론 그것을 발표할 기회를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음악적 소양을 닦는다는 점에서 적잖은 도움이 됐다 또 吳여사는 라디오 방송국이 생긴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인텔리 가수 출현은 장안의 화제를 모으기에 족했다. 오여사는 인기가 급상승하던 26세에 결혼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만 혼자서 흥얼거리기만 했다. 가정에서나 점포에서는 민요도 부르고 유행가도 불러 외로움을 달랬다. “서도소리, 특히 노래는 양악의 오선지에 채보가 잘 안돼요. 흔히 대동강 물을 먹어야 서도소리를 한다고 하죠. 그건 세청으로 감정과 애원을 잘 표현해야 한 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여사는 독자적인 12線採譜(선채보)의 책을 펴냈다. 그동안 후진에게 전수교육을 하면서 깨달은 결과가 마흔 두 가지 목내는 기법으로 정리됐고 그런 글과 말로써 형언 못하는 부분을 12선보로써 다소 보충했노라고 한다. 서울 상왕십리 지하철역 근처에 있는 건물의 4층을 오르면 ‘서도소리 보존회’라고 쓰인 조그만 현판을 읽을 수가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붉고 푸른 깨끼한복 차림의 고운 처자 댓 명이 앉아 있고 그 가운데로 살색 치마 저고리를 단아하게 차려입은 목진 머리의 染인네가 장고를 두드릴 채비를 한다. 이윽고 “불이 붙는다 불이 붙는다. 의주 통군정에 붙는 불은 압록강수로 꺼주련마는......”하는 수심가가 울려 나오고 전수생들의 구성진 소리가 그 뒤를 후렴한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두 번쯤 이곳엘 들른다. 유일한 수제자인 김광숙(38)씨가 이곳을 도맡아 꾸려가고 있기 때문에 번거롭게 자주 나올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대개의 시간을 강남에 있는 조그만 아파트에서 홀로 보내는 편이나 가끔은 외아들 집엘 들러 손자손녀를 안아보는 흐뭇함도 즐긴다. 늘상 아침 6시면 잠에서 깨서 1시간 동안 가벼운 운동을 하고, 그런 다음 기도문을 읽는다. 다섯 해 전 그녀는 ‘비비안나’라는 영세 명을 받고 가톨릭에 입교한 바가 있는데 성당교우들을 만나는 재미도 그녀에게는 솔솔치 않은 재미에 속한다. 식사는 주로 채식에 잡곡밥만을 섭생한다. 혈압관리를 위해서다. 그저 깨끗하고 단정한 노년을 보내고 싶을 따름이라지만 겉 매무새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곱게 늙어가고 있는가를 단박에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소리에 대한 그녀 스스로의 다그침은 여전하다. 무형문화재들의 정기공연이나 국악제, 또는 방송국의 특별 프로 등등해서 1년이면 꼭 10여 차례는 무대에 설 기회를 잊지 않고 갖는다. 그건 문화재로 인정받은 자의 책임감과 의무감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남도소린 익숙해 하지만 서도소린 귀에 싫어하는 편이다. 판소리의 신명과는 달리 서도소리의 애절함이 주는 친근한 느낌 때문일까. 오여사의 말마따나 대동강 물을 먹고 본바닥 사람들에 의해 본때있게 불려지는 그 애절하고도 구성진 서도소리를 들을 날이 있기를 모두가 바라는 마음뿐이다. 왜냐하면 실향민의 서도소리는 세월과 더불어 점점 사위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월간문화재>, 198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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