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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영 (본명:정재국, 1922.11.29~1997.3.4)

예술가
정달영 (본명:정재국, 1922.11.29~1997.3.4)
출생지
전라남도 화순군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88.4.1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인정 1997.3.4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사망해제
리뷰
유일한 남자 가야금 병창 기능 보유자 우리의 전통 민속 현악기 중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거문고와 가야금. 학문과 덕을 쌓은 선비나 세월 좋은 한량들이 즐겨 탔던 거문고는 울림통(위는 오동나무, 아랫부분은 단단한 밤나무) 위에 6현(명주실을 꼰 것)을 얹어 놓고 해죽(海竹)을 다듬어 만든 술대로 내려치거나 올려 뜯어 그윽한 소리를 낸다. 이와는 달리 가야금(만드는 재료는 거문고와 같음)은 울림통 위 12현을 안족(雁足)으로 떠받쳐 왼손으로 줄을 누르면서 오른손으로 뜯거나 퉁긴다. 원래 정악 연주에 쓰이는 풍류 가야금과 산조용의 산조 가야금이 있으며 주로 여인네의 응어리와 멋을 우려내고 있다. 이 중 산조 가야금 곡 중에는 두 갈래의 커다란 맥이 있다. 이름하여 김창조제와 한숙구제. 전남 영암 태생의 김창조(金昌祖, 1865~1919)는 가야금, 거문고는 물론 양금, 젓대, 퉁소, 해금 등 모든 전통 민속 악기에 능했던 달인으로 시나위 가락에 판소리 가락을 도입, 산조의 틀을 창제해 냈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대부분의 유파가 김창조 제자들을 통해 형성된 맥이며 다수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국악계서조차 생소한 한숙구(韓叔求, 1849~?)는 전남 화순군 남면 용리 태생으로 역시 전통 민속악의 대가였다고 현지 노인들이 전언하고 있다. 김창조보다 훨씬 수상(壽上)이었고 선비의 지조와 긍지로 ‘가객질’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숙구의 제자로는 한수동(韓洙東, 아들)과 정남옥(鄭南玉, 정달영 씨 당숙)이 있었으나 아들 수동 씨는 일찍 죽었다. 이 같은 내력의 한숙구제 가야금 산조 맥을 정달영(鄭達榮·70, 1922년 11월 19일생) 씨가 이어 내고 있는 것이다. “한 국가나 가문의 영고성쇠를 봐도 인물 나기에 달렸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한 시대를 어떤 형태로 살아가느냐도 큰 문제구요. 우리 선생님(한숙구)은 선비란 함부로 처신하는 게 아니라며 찾는 제자들만 가르치고 생전 놀음청에도 응하지 않아 궁색하게 사셨답니다.” 정씨는 “그러나 역시 역사에 남아 인구에 회자됨은 법석을 떨었던 사람들이 아니겠느냐”며 이런 역사의 기록성을 어찌 외면하겠느냐고 말한다. 생존 국악인 중 유일한 가야금 병창 남자 기능 보유자(제23호, 88년 4월 지정)인 정씨는 전남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태생이다. 고조 대부터 이어 온 무가의 혈통 내림으로 아버지(학기 씨) 역시 피리, 가야금 등 민속악에 능했다고 한다. 특히 부친 학기 씨는 가야금 제작에 능해 호남 일대 명금을 거의 만들어 낸 장인이었다고. 형님 백옥(白玉, 작고) 씨도 명금장(名琴匠)으로 현재까지도 소장된 명금들이 이 일대에는 적지 않다. 이런 전통 예술가 집안에서 정씨는 아버지의 권유로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7세). 스승은 안질로 장님이 된 김복술(金福述) 씨로 1년간 양금풍류, 잔영산에서 뒤풍류, 굿거리까지 배웠다. 능주보통학교를 다니면서는 당숙이었던 남옥(南玉) 씨를 집에 모셔다 가야금 정악(본영산에서 굿거리까지 48장)을 떼고 병창(죽장망혜, 함평천지, 녹음방초, 편시춘 등)까지 학습해 놓았다. 남옥 씨는 화순(사평면 독다리) 태생으로 가야금 산조와 풍류, 병창, 대금산조에 능했던 한숙구의 수제자이다. 한숙구제 가야금 산조는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로 구성되며 마지막 부분을 중모리로 여미는 독특한 가락이다. 우조(羽調)와 계면(界面)이 적절히 뒤엉켜 굿거리제로 넘어가는 엇가락은 특히 일품이다. 정달영(본명 재국) 씨는 가야금 외에도 피리, 아쟁, 해금, 호적, 거문고, 양금 등의 민속 악기를 거의 다룬다. 명고수였던 조때갈(趙頭·고모부), 고종사촌 형이었던 박점옥(朴㸃玉) 씨 등으로부터 장단과 판소리도 배웠다. 광주농업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와선 오태석(吳太石) 명인을 만나 가야금 산조를 배우고 ‘대동창극단’(임상문 단체), ‘국극사’, ‘임춘앵 극단’, ‘조선창극단’ 등에 들어가 그 시절 피할 수 없었던 부평초 인생을 살게 된다. 22세 때 능주면장이 억지로 보낸 일본 징용(나가사키 간척 사업장)은 평생 골수에 맺힌 원한으로 남는다. 남양군도의 ‘사이판’ 섬으로 비행장 닦으러 가다 연합군 어뢰 공격으로 배가 침몰, 보름 동안 구명정에서 살아남은 일이며 ‘사이판 옥쇄’ 중 땅굴 속에서 짐승같이 생존했던 기억 등. “그 때 일본군에는 와전옥쇄(瓦傳玉碎)란 말이 있었어요. 기와 같은 존재로 남기보다 옥같이 부서진다는 겁니다. 이 때는 살아남는 게 수치일 때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무열매를 따먹고 벌레, 도마뱀을 잡아먹으면서라도 살아야 했습니다.” 모질게 버텨 온 정씨의 목숨은 해방 뒤 귀국하면서도 크게 보상을 못 받는다. 악극단 무용 반주, 작곡 생활을 하며 궁핍 속에 허덕여야 했다. 6·25때는 7년 동거해 왔던 부인을 폭격 잔해 속에서 찾아내야 했고…… “이럴 때마다 마음 속에 육중히 자리잡은 건 예술이었습니다. 손에 잡히는 악기만 있으면 불어 댔고 그때마다 옆사람들은 즐거워 했지요. 요즘 와서는 한숙구 선생의 가야금 산조 맥을 이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먹는 것보다도 큰 힘을 줍니다.” ‘KBS 국악대상(88년)’과 함께 ‘전주대사습’ 심사위원, ‘충주가야제’ 심사위원 등 후진 양성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제자 가운데는 ‘전주 도립국악원’ 교사로 있는 강정열(姜貞烈) 씨와 미대(원광대) 졸업 후 국악에 심취한 양경숙(梁景淑) 씨가 전수자이며 문혜란(文惠蘭), 곽은아(이대 강사), 박정수(朴正洙, 추계예대 1년) 씨도 한숙구제 가야금 산조 맥을 이어 가고 있다. 서울 도봉구 미아7동 851의 16호 7평짜리 허름한 집에서 26년째 살고 있는 정씨. 못살고 천대받는 것이 서러워 자식들에겐 ‘이 길’을 권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대물린 불교인으로 반야심경을 가야금 병창으로 해내 많은 불교도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벙어리가 말하는 곳이 국악계”라며 늘 말썽없이 사는 게 신조라고 말한다. 특히 딸이 국악인의 길을 택하자 오랫동안 믿었던 기독교를 불교로 개종하면서까지 뒷바라지하는 제자 양경숙 씨의 어머니를 고마워했다. “말로만 국악을 양성해야 한다 하지 말고, 이래야 국악인이 제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한숙구(韓淑求)류 맥이어 가야금 외길 노령(老齡)불구 전수·연주활동 왕성 가야금을 퉁기면서 거기에 맞추어 스스로 노래하는 것을 가야금병창(倂唱)이라 한다. 거문고를 타면서 부르는 거문고병창도 있었으나 가야금병창만큼 발전하지 못하고 단절되고 말았다. 가야금 음악이 신라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으나, 가야금병창이 언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문헌이 없다. 다만 박황(朴晃)이 그의 <판소리소사(小史)>에서 가야금병창의 창시자는 김창조라고 말하고 그 유래에 대해 기술한 부분이 있어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가야금의 대가인 동시에 판소리의 명인이었던 만큼 즐겨 소리도 하였다. 소리할 때에는 반드시 고수가 있어서 장단을 짚어 주어야 하고 또 장단을 짚어줌으로써 흥이 고조에 이르며 소리할 맛도 우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판소리로 행세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는 수종고수가 없었다. 이따금 앉아서 무릎장단을 치든가 북을 치며 자장단으로 소리를 해보면 흥이 나질 않고 소리의 맛도 싱겁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 끝에 시험삼아 가야금으로 반주하면서 단가를 불러보니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진기한 풍미가 있었다. 그는 판소리 또한 못할 리가 없다 하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가야금병창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가야금병창의 유래에 대해서는 동감하지만 창시자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있다. 신재효(申在孝)의 판소리 사설에 가야금병창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김창조(金昌祖)(1865~1918년)보다 연상인 한숙구(韓淑求)(1850~1925년)도 가야금병창에 능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누가 창시자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아무튼 김창조의 가야금산조 및 병창은 오수관(吳壽寬), 한성기(韓聖基), 최옥산(崔玉山), 강태홍(姜太弘) 등의 여러 명인들에게 전승되었고 오수관의 가야금병창은 그의 아들 오태석(吳太石)에게 이어져 일제때 전무후무하다는 명창으로 꼽혔다. 한편 한숙구는 그의 아들 한수동(韓壽童)과 정남옥(鄭南玉)에게 그의 예능을 전수하였다. 가야금병창의 유일한 남자예능보유자인 정달영(鄭達榮)옹은 정남옥(鄭南玉)과 오태석(吳太石)으로부터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말하자면 가야금병창의 원류로 알려진 김창조류와 한숙구류를 한데 어우른 이 시대의 유일한 가야금명창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을 한숙구류라고 자랑스레 말한다. 정달영(鄭達榮)옹(본명은 재국(在國))은 1922년 전남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에서 예인(藝人) 집안인 정학기(鄭學基)씨의 3남매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친은 피리·가야금 등의 민속악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가야금을 만드는 솜씨 또한 뛰어나 호남 일대의 가야금을 거의 다 만들어낸 명장(名匠)이었다. 그의 형 백옥(白玉)씨(작고)도 명금장(名琴匠)으로 호남지역에서는 알아주는 처지였다. 정달영 소년은 집안의 내림 탓인지 어려서부터 소리에 관심이 많았다. 같은 또래 아이들이 동네 공터에서 팽이치기할 때 그는 능주 신청(神廳)에서 가객(歌客)들이 판소리·시조를 하고 양금과 가야금 타는 소리에 매료되어 있었다. 현이 자아내는 신묘한 음율에 홀딱 반한 정소년은 일곱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졸라 양금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스승은 그당시 양금의 명인이었던 김복구(金福逑)로, 양금풍류 잔영산에서 뒤풍류 굿거리까지를 20일만에 마치는 등 그의 음악적 재능은 일찍부터 신동으로 인정받았다. 능주보통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아버지의 주선으로 한숙구의 수제자인 정남옥씨를 집에 모셔다가 가야금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가야금의 두 갈래 큰 줄기중의 하나가 한숙구류인데 저는 그분의 맥을 이어왔습니다. 저의 두번째 스승인 정남옥씨는 한숙구선생의 수제자이면서 저의 당숙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가야금산조와 병창의 재능을 고스란히 전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때 그의 당숙인 정남옥으로부터 가야금 정악을 본영산에서 굿거리까지 떼고 가야금병창으로 <죽장망혜>, <함평천지>, <녹음방초>, <편시춘> 등을 배웠으며, 가야금산조를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세산조시까지 익혔다. 정달영(鄭達榮)옹은 가야금 외에도 피리·아쟁·해금·호적·거문고·양금 등의 민속악기를 거의 다 다룬다. 게다가 명고수였던 고모부 조상주(趙相朱)와 고종사촌형인 박점옥(朴點玉) 및 박기채 등으로부터 장단과 판소리도 학습하였다. 광주농업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오태석(吳太石)명인을 만나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그러면서 ‘동일창극단’, ‘대동창극단’(임상문단체),’ ‘조선창극단’ 등에 들어가 무대생활도 하였다. 22세 되던 해에는 일본군에 징용으로 끌려가 나가사키의 간척사업장에서 일하기도 하였으며 사이판 섬으로 비행장 닦으러 가다 연합군의 어뢰 공격으로 배가 침몰, 보름동안 구명정에서 살아남은 일이며 사이판의 땅굴 속에서 짐승같이 살아남은 기억 등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원한으로 남는다. 모질게 버텨온 정(鄭)옹의 인생은 해방 후 귀국해서도 소리판으로 이어졌다. ‘우리국악단’, ‘임춘앵여성국극단’, ‘대한국악원국극단’, ‘진경여성국극단’ 등과 함께 전국을 돌며 연주생활과 소리판을 벌여왔다. 소리와 가락에 미쳐 집도 잊고 살기를 근 30년, 37세에 때늦은 결혼을 할 때까지 그의 유랑생활은 계속되었으며 별로 빛을 못본 채 생애의 전반부를 마감하였다. 정(鄭)옹은 그후 ‘한국민속예술연구원’ 이사와 ‘한국국악협회’ 조사위원, ‘한국의집 민속예술단’ 반주단원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틈틈이 병창을 계속했으나 마침 여류 병창이 유행하고 대중이 여창만 좋아하는 까닭에 병창 부르기를 포기하기도 하였었다. 가야금병창은 한숙구, 김창조, 오태석, 강태홍, 정남옥 같은 명인들이 모두 남자였듯이 원래 남창이었는데 일제때 여류 병창들이 배출되면서 여창(女唱)이 성행함에 따라 남창은 전승이 끊어질 위기에 이르렀다. 이에 정(鄭)옹은 가야금병창의 남창이 내 대(代)에서 끊어질 수는 없다며 다시 일어섰다. “가야금병창은 본디 남자명창들이 부르던 것입니다. 어쩌다가 일제 때 여류병창들이 배출되면서 뒤바뀌기는 했지만 제자리로 돌려놓아야지요. 여창은 화창하고 섬세하고 교태가 있어 남창과 다른 맛이 있긴 하지만, 역시 가야금병창은 진중하고 정대하며 웅혼한 남창이라야 제격입니다. 저마저 포기하고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남창의 전승이 영영 끊어질 것 같고 한숙구류의 맥이 나로 말미암아 대가 끊겨지는 것이 마냥 안타까워 크게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정(鄭)옹은 1980년대에 들어 회갑을 지내고서야 새출발을 시도하여 줄기찬 활동을 펴나갔다. 1980년대 후반 이후 그가 펴보인 굵직한 공연만 보아도 그의 활약상을 금세 알 수 있다. ‘경주신라예술제’에 참가하여 가야금병창부 장원(85년)을 차지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 대판(大阪)(85년)과 동경(東京)(87년)에서 공연하였으며 ‘KBS국악대상’에서 영예의 대상(87년)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1988년 4월에 가야금병창의 예능보유자로 공식 인정된 후에는 발표공연과 후진양성에 더욱 열을 쏟고,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음반(20장 1조)을 취입하는 등 국악의 보급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고희를 넘긴 요즈음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으로 전수자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1985년도에 ‘전주대사습놀이 기악부문 장원’을 차지한 ‘전북국악원’의 강정열씨가 이수를 마치고 내 뒤를 받쳐주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신사영, 정설주 등 전수자와 김현숙, 우형실 등 제자들도 열성으로 배우려고 노력해 마음이 든든합니다마는 남창의 맥을 이르려는 젊은 남성을 좀처럼 찾기 어려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반야심경을 가야금병창으로 옮긴 정(鄭)옹은 요즈음 천수경을 병창으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데 올 가을까지는 작곡을 마쳐 제자들과 함께 발표회도 갖고 CD로도 출반할 예정이다. “일곱살의 어린 나이로 가야금과 인연을 맺은지 올해로 65년째가 됩니다. ‘경주신라예술제’에서 장원한 것이 한가닥 인연이 되어 늦깎이로나마 한숙구류와 남자병창의 맥을 잇는데 일조가 된 것은 참으로 보람된 일이었습니다. 이제 소중한 우리의 민족예술을 보존하고 전승 발전시키는데 남은 생을 바칠까 합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마음 먹었다면 애당초 이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라는 정(鄭)옹은 아직도 달동네(미아 7동)의 7평 밖에 안 되는 작은 방에서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채 가야금은 퉁기는 모습은 학처럼 고고하기조차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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