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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연 (본명:성육남, 1923.5.7~1986.7.29)

예술가
성금연 (본명:성육남, 1923.5.7~1986.7.29)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68.12.21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기능 보유자 인정 1975.5.30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기능 보유자 인정해제
학력(계보)
1929. 최막동에게 가야금 사사 1932. 안기옥에게 가야금 사사 1938. 조명수에게 가야금 사사 정정렬 선생에게 판소리 사사
생애(약력)
1960. 국악예술학교(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 1963. 지영희와 함께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창설 1967. 창작곡이 중심이 된 발표회 공연(국립극장) 1971. 한국민속연구원의 이사 겸 원장으로 취임 1972. 미국 아시아학회 초청으로 미주 순회공연(카네기홀 연주) 1976. 하와이에 한국민속예술원 개원 1986.6. 귀국 독주회(산울림소극장) 1986.7. 63세의 나이로 별세
리뷰
성금연(成錦鳶) 재발견(再發見) 피어나는 봄 - 기(起) : 1943~1959 스승인 최막동(1929), 안기옥(1932), 조명수(1938)에게 두루 익히고, 정정렬(1938)에게 판소리를 배운 후, 평생의 생과 예술의 반려자인 경기음악의 대가 지영희(1943)를 만납니다. 바로 이 때부터 성금연음악의 '봄'은 시작됩니다. 성금연의 산조가 스승 또는 다른 유파와 변별성을 갖는 계기가 되는 셈이지요. 경기시나위의 장단이라거나 경드름이라는 말로 집약되는 경기가락 등의 음악적 자산이 그의 가야금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시기입니다. 그는 이후 음반 녹음을 하기도 하고, 서울 중앙방송국의 전속 연주자로서 활약을 하면서, 음악계에 주목을 받습니다. 이 당시 성금연은 밝고 명랑하고 화사한 것을 좋아해서 무대에 오를 때도 늘 화려하다 싶은 치마저고리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의 성금연의 가락을 '봄날 종달새의 지저귐'에 비유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방송활동이 많았던 1950년대 후반부터, 그는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는 템포감이 느껴지는 산조의 틀을 확보해 나갑니다. 이른바 성금연 산조에 늘 붙어 다니는 '밝다', '명랑하다', '화사하다'는 수식어는, 바로 이 시기의 성금연의 생활, 정서, 가락 등과 여러모로 연관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금연은 6·25 이후 변화되는 문화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아주 빨랐으리라 짐작되며, 성금연은 누구보다도 많은 방송활동을 통해서 대중들이 원하는 산조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 시기는 성금연에 의해 처음으로 용어와 형식이 만들어진 '짧은 산조'라는 배태(胚胎)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런 짧은 산조가 완성되어, 후학들에게 가르쳐진 시기는 1962년입니다) 짧은 산조란, 이보형(음악학자, 문화재전문위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명쾌한 가락'이 중심이 된 산조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가락 속에서는 봄의 이미지를 강하게 느낄 수 있죠. 타오르는 여름 - 경(經) : 1960~1973 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가야금을 가르치는 교사생활(1960)을 시작하고, 이어서 서라벌예술대학(1964)에서도 가르치게 됩니다. 또한 이즈음 성금연은 지영희와 함께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창설(1963)을 하고, 이것은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모체’(1965)가 됩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짧은 산조'를 가르치고, 정형화된 '살풀이' 등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당시의 학생 세대들에게 산조나 시나위음악을 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민속음악을 인식시키고자 하는 음악적 사고가 저변에 깔려 있는 가치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적인' 측면이 강한 음악들이 이후에 성금연의 가야금은 '쉽다'라는 인상으로 굳어지게도 했다고 생각됩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초반에 걸쳐서, 성금연 만큼 TPO(time, place, occation)에 맞게 자신의 음악을 보여준 가야금연주가는 없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는 방송이나 공연 등에서 주어진 시간, 연주되는 장소, 청중들의 수준의 '삼박자'에 들어맞는 연주를 해 늘 갈채를 받게 됩니다. 한편 작곡 발표회(1967, 국립극장)를 갖게 됩니다(이것을 그저 성금연의 가야금 독주회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성금연의 창작곡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민속악인이 마련한 창작발표회로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시기 그가 만든 작품들은 기존의 가야금곡들과 다음 몇가지 면에서 변별성을 갖습니다. 기존의 열두줄로 된 전통가야금에서 벗어나서 15현가야금을 사용해서 '즉흥성'이 강조된 무용음악적인 작품을 발표했는가 하면(춘몽), 산조의 장단진행을 따르지 않고 '농악' 장단 등을 가야금 속으로 옮겨 온다거나(꽃의 향기), 15현 가야금을 통해 '평조'적인 가락을 살리고 특히 '고음'의 매력을 십분 살린 곡도 있고(흥), 또한 경기 '무속'장단을 가야금을 통해 담아내고자 하는 의지 등을 읽어낼 수 있는 걸작도 있습니다(새가락별곡). 성금연은 '드디어'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의 기능보유자(1968)로 지정이 됩니다. 한 마디로 이 때는, 노재명(음반연구가, 명인기획 대표)의 표현을 옮긴다면, '가야금 산조의 대명사처럼 군림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한 시기입니다. 성금연은 인간문화재가 된 후, 당시 문화공보부가 주최하는 <제6회 중요무형문화재 발표공연>에서 가야금산조를 연주하게 되는데, 바로 이 시기 이런 연주들이, 지금까지도 일반인들의 생각하는 성금연 산조의 정형(定型)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성금연은 우리음악에 관련된 보다 넓은 시각과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일본에서 열린 ‘EXPO '70’에 한국민속예술단장의 자격으로 참가(1970)를 했으며, 남편인 지영희와 함께 세운 '한국민속연구원'의 이사 겸 원장으로 취임(1971)을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미국아시아학회 초청으로 미주 순회공연(1972)을 갖게 됩니다. 김소희, 지영희, 김윤덕 등과 함께 참여한 이 공연 가운데서 아마 카네기홀 연주는, 성금연이 연주가로서의 경험한 가장 절정의 무대가 아니었나 짐작합니다. 이 시기의 그의 음악 속에는 강한 자신감, 도도함, 당당함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성금연의 음악여정(音樂旅程)에 있어서, 뒤도 돌아볼 겨를 없이 숨 가쁘게 달려온 시기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마치 작열하는 태양처럼 너무나 뜨겁고 대단했기 때문에, 그 열정이 때로는 다른 것과 충돌의 소지를 안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시기의 그의 음악생활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생전 성금연이 종종 이야기한 것인데, 한명희(음악평론가, 전 국립국악원 원장)의 글(음악동아, 1984년 11월호) 속에도 인용돼 있습니다. "1972년 미국공연 다닐 때의 일이지. 어느 독주회에서 내가 독주를 하고 그이가 장고 반주를 했는데, 그 때 장고소리가 어떻게 크던지 슬며시 화가 났어. 그래서 끝나자 마자 앙칼스럽게 푸념을 했지. '차라리 장고 혼자 독주를 하지 그랬어'하고 말이여. 그런데 그 후의 일이 재미있지. 그날 밤 호텔에서 돌아와서 자고 있는데 옆에서 무슨 인기척이 자꾸 나는 것 같아. 그래서 눈을 떠보니 그이가 잠을 자지 않고 일어나 앉아서 삭삭 장고채를 가늘에 갉아내고 있잖아. 그것을 보는 순간 왠지 찡하게 정을 느끼게 되더구먼…… " 돌이켜보면 지영희는 성금연의 남편이나 고수(鼓手)이기 전에, 새로운 음악세계를 열어준 '스승'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성금연이란 인물이 이 1970년대 초에 얼마나 대단했었는가, 그의 가야금 음악가로서의 당당함과 도도함을 간접적으로 시사 받을 수 있는 일화이기도 한 셈입니다. 이렇게 미국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후, 미국과 한국에서 음반 녹음을 하기도 했으나, 이후 지영희, 성금연 부부는 다른 민속악인들과 갈등과 마찰을 겪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을 종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만, 그 갈등을 '예술'에 '한정'시켜 볼 때, 그것은 당시 음악인들 사이에서 '굿'을 보는 시각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국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새마을운동'이 한참이던 시기에, 과거의 미신으로밖에 취급되지 않는 '굿'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였던 지영희, 성금연 부부는 점차 국악인들 사이에서 소외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성금연은 이후 한국국악예술학교 현악과장을 사임(1973)을 하게 됩니다. 맺어지는 가을 - 결(結) : 1974~1983 지영희, 성금연 부부는 이 당시에 여러차례 외국 순회 공연을 다닙니다. 그리고 오히려 국내보다는 자신들의 음악을 더욱더 따뜻하게 대해주고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외국인들에게 더욱 끌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족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것이 지영희, 성금연 부부가 하와이에 정착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하와이에서 한국민속예술원을 개원(1976)하기도 하고, 하와이 대학 초청 연주를 갖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금연이 무대에 오른 회수가 그리 많지 않으며, 오히려 그는 과거의 음악활동을 되새겨 볼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는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담담하게 자신의 과거를 반추했을 것이고, 그러면서 산조 가락을 다시금 정리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 시기는 성금연의 가야금이 새롭게 변화 발전되어 가는 시기이기도 한데, 우리는 그동안 이 시기를 너무도 많이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산조 속에는 그것을 타는 사람의 인생이 반영됩니다. 산조에는 연주자의 '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의 소리라 함은, 연주자의 음악적인 주장을 뜻하는 것이 되기도 하지만, 실제 산조라는 음악이 대개 선율로 진행되는 것이고, 그런 '(단)선율'이라는 것이 사람의 '목소리'와 연결되는 것이라면, 이 시기의 성금연의 산조(소리)는 점차 담담해져가고 낮아져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환경과 나이가 만들어낸 산물이라 할 겁니다. 실제 성금연의 가야금의 청(音高)이 낮아져 갔는가 하는 것은, 성금연의 남긴 모든 음향자료 등을 시대적으로 정리해 가면서, 과학적인 입증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성금연의 성음이 낮고 묵직해진 가장 큰 원인은, 분명 지영희의 타계(1980)와 관련이 깊지 않을까 합니다. 이후 그가 남편을 그리며 망부가(亡夫歌)라 할 <눈물이 진주라면>(1980)을 듣게 되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곡을 듣는 나의 느낌은 마치 여러 여인들이 함께 모여서, 순차적으로 나와서 자신의 신세를 이야기하는 '육자배기'와도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성금연이 '진양조' 장단과 '계면조' 가락에 대한 끝없는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세상을 뜬 후, 그는 가야금에 더 큰 애착을 가지면서 자신의 산조의 큰 틀을 완성했다는 사실입니다. 돌려주는 겨울 - 해(解) : 1984~1986 성금연이 남편을 잃고 대략 삼년여간에 걸쳐 다듬었던 이런 가락들. 이것들은 역시 대략 그의 마지막 생의 삼년동안 일반인들과 해후(邂逅)하게 됩니다. 1977년 민속악회 시나위 주최로, 서울에서 지영희, 성금연 초청 연주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만, 그 때의 연주가 큰 주목을 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금연의 경우, 남편과 사별 후 한국에 와서 처음 갖았던 연주회(1984)의 열기는 정말 대단했었습니다. 성금연은 이 때 성음레코드를 통해 가야금산조를 녹음합니다. 또한 일본의 빅터 레코드에서 지성자와 함께 '향수의 가야금'을 녹음(1986년 2월)을 하기도 했고, 일본의 동경과 요코하마 등지에서 <성금연 가야금 세계>라는 공연을 마련했고, 일본의 문화인들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귀소(歸巢)의 의식처럼, 우리나라에 돌아와 산울림소극장에서 <귀국독주회>(1986년 6월)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마지막 공연입니다. 그리고, 성금연은 남편이 묻혀 있는 하와이로 다시 돌아가서, 1986년 7월 29일, 예순셋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금연의 타계와 관련해서, 김양기(재일학자, 비교민속학)의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5월말부터 6월초에 걸쳐 집중적으로 열린 <성금연, 가야금의 세계>로 인해 도쿄지방은 성금연여사의 가야금 바람이 난무하다시피 크게 불었다. 6일간 장소를 세 번 옮기면서 다섯 번이나 연주하였으니 가야금 열풍이 도쿄지방을 석권할 정도였다. 그 연주 효과와 음악적 박력은 가야금 해외연주사상 영원히 남을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는 최초의 쾌사였으며 그 주어진 감동은 파문을 그리면서 길이길이 넓어질 것이다. 연주곡목 중에서 특히 듣는 이에게 와 닿은 것은 가야금산조, 즉 <성금연 가야금산조>였다. 첫 날 연주에서는 자연을 상징한 대숲으로 무대장치를 하여 그 속에서 가야금을 탔다. 관객들은 색다른 죽림(竹林)을 주시하며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가야금 산조를 귀담아 들었다. 성여사는 한국음악의 자연성(自然性)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며, 그 자연성을 이번에 시도해 보았다고 말했다. …(중략)… 성여사는 멀고 먼 황천길로 떠났다. 인생의 통과의례이긴 하지만 너무나 극적인 이별이었다. 조급한 이별이었다. 그러나 가야금 연주자 성금연으로서는 행복한 마지막이었다. 가야금을 타기 위해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그 훌륭한 기능을 딸들에게 전승하고 가야금 일가(一家)를 일으켰으며, 그 사회적 피로연(披露宴)을 대대적으로 끝내고 고요히 잠든 성여사의 생애는 행복한 가야금 인생이었다. …(하략)… " 춘사(春史) 성금연(成錦鳶). 그의 음악인생은 춘하추동에 비유될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소리'에 '빛깔'이 있다면, 성금연의 음색(音色)은, 산뜻하고 밝은 노란빛으로 다가와, 열정적인 붉은빛으로 익어갔고, 그리고 넉넉하고 고아한 갈색빛을 띠면서 영글어 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정갈한 흰 눈 속에 겹겹이 감쳐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영희와 성금연은 모두 독실한 불교신자입니다. 그들은 윤회(輪廻)를 믿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지금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 '봄'같은 세상을 다시금 펼칠지 모릅니다. 윤중강(尹重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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