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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주 (1937.12.3~)

예술가
황용주 (1937.12.3~)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2.7.1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전수 장학생 선정 1977.2.14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이수자 선정 1985.7.1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조교 선정 1991.5.1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타령 보유자후보 선정 1992.7.1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60.10.14 청구고전성악학원 입학 1960. 이창배, 정득만에게 가사, 시조, 경서도창, 선소리산타령 사사
생애(약력)
1968.9.26~1984.10.5 대한민속예술학원 설립 후배양성 1974.2. 한국국악협회 이사역임 1974.~1985.4. 선소리산타령 발표공연 1979.9. 동부노인대학설립 1981.9. 한국고전음악선집 발간 1983.2. 선소리산타령 전수소 개설 1983.10. 선소리산타령 및 경기창취모리 등을 취입 1990.1. (사)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회 의원 1991.9. 안양영화예술고등학교 국악 강사 1992.11. 한국국악협회 공로상 수상 1992.12. 선소리산타령보존회 단체대표 1996.12.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공로상 수상 1997.10. 제38회 전국민속경연대회 우수상 수상 1998.1. 서울특별시장 표창 수여 1998.10. 제39회 전국민속경연대회 우수상 수상 1998.12.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대상 수상 1999. 서울특별시장 표창장 수여 2000.1. (사)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 중앙대학교 한국음악대학 대학원 국악강사 2000.2. (사)한국국악협회 이사장(직무대행) 2001.3. 문화재연합회 부회장 2001.10. 대통령훈장 화관문화훈장 서훈 2003.3. 제12회 선소리산타령 발표공연(국립국악원 예악당)
리뷰
시조에 심취··· 선소리 득음 이론도 정립··· 책자·테이프 펴내 과천 관악산 염불암은 연주대요 도봉불성 삼막으로 돌아든다 단산봉황은 죽실을 물고 벽오동 속으로 넘나든다 경상도 태백산은 상주 낙동강이 둘러 있고 전라도 지리산은 하동이라 섬진강수로만 다 둘러 있다 동불암 서율관 남삼막 북승가요 도봉 망월이 천축사라 해외 만호강일천리 넓은 물에 구비 출렁 동정호로만 다 둘러 있다 성절 덕절 학림암을 구경하고 화계사로만 돌아 든다 탁자 앞에 앉은 노승팔대장삼을 떨쳐입고 고부랑 꼬박 염불만 한다. <선소리산타령> 중 앞산타령의 일부 가사 내용이다. 서울 근교의 산과 암자는 물론 팔도강산의 유명한 산과 강 그리고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의 이름을 줄줄이 외면서 낭랑하고 힘찬 목소리로 엮어 나간다. 이 앞산타령의 앞쪽이 놀량을 더하고 뒤쪽으로 원산타령과 잦은 산타령, 개구리타령을 보태면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된 <선소리산타령>이 된다. 그 뒤에 도화타령을 비롯하여 방아타령·사설 방아타령·잦은 방아타령·경복궁타령·양산도 등을 잇대어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선소리산타령>의 원 계보는 아니고 여흥으로 부르는 소리이다. <선소리산타령>의 ‘선소리’는 서서 부르는 소리(입창)라는 뜻으로 앉아서 부르는 좌창에 대칭되는 개념이다. 산타령 노래의 사설이 산천경개를 내용으로 하는 산에 관한 것이기에 이르는 말이다. <선소리산타령>은 과장적인 모가비가 장구를 치면서 앞소리를 메기면 여러 소리꾼들이 소고를 치면서 뒷소리를 받아주는 형식으로 여러 곡을 접속으로 부르는 데 한 줄로 서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며 부른다. “<선소리산타령>은 가사내용에 명산대찰과 불교에 관한 내용이 많은 것으로 보아 불교계에서 전래된 음악이라고 봅니다. 고려 때에 전성기였던 불교가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어렵게 되자 산 속으로 밀린 승려들이 파계하여 사당패로도 전락하고 비승비속의 신분으로 가무기예를 익혀 절의 건립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에 의하여 전해지던 음악이 조선조 중기(중종 때)부터 민간음악으로 전래되면서 정착되었다고 봅니다.” <선소리산타령>의 유일한 예능보유자인 황용주씨는 <선소리산타령>의 유래에 대하여 군더더기 없는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설명하였다. 황용주는 1937년 충남 광주군 장기면 송선리 43번지에서 황희 정승의 17대 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조부가 서당 훈장이라서 당집으로 불렸던 만큼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한학과 접할 수 있었기에 6세때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 17세까지 논어·맹자·시경 등 많은 한학을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시조 읊기를 좋아했다. 그는 왜놈이 만든 학교에는 보내지 않겠다는 훈장 할아버지의 고집으로 11세가 되어서야 국민학교에 입학, 23세가 되던 1960년에야 공주영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해에 상경 서울 동대문시장 우산도매상의 점원으로 일하던 어느날 운니동의 게시판에 붙었던 국악강습생 모집을 보고 이주환씨(초대 국립국악원장)한테 시조를 배웠으며 이어 이창배씨가 운영하던 청구고전성악학원에 들어가 이창배씨에게 사사하게 된다. “보통노래조차 잘못했어요. 소질도 없었고요. 한학을 바탕으로 시조에 취미가 있던 터라 시조나 몇 수 제대로 흉내 내고 싶어 이창배선생을 찾았지요. 처음에는 두세달만 할 생각이었는데 시작하고 나니 그렇게 안 되더군요.” 그렇게 시작된 그의 소리공부는 시조에서 가사, 좌창, 입창으로 이어졌다. 낮에는 점원으로 일하며 저녁공부를 3년하고 나니 스승인 이창배씨가 청구고전성악학원의 조교(강사)를 시켰다. 그때부터 점원생활을 그만두고 소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로만 살아 왔다. 이창배씨한테 만이 아니라 정득만씨와 묵계월씨한테도 사사했다. 득음을 위한 그의 노력도 대단했다. 학원에서 기식하며 매일 새벽 삼청동 꼭대기에 올라 1년 반 동안에 걸쳐 피나는 노력을 경주한 끝에야 득음을 했다. 31세 때인 1968년에는 종로 5가에 대한민속예술학원을 차리고 독립하여 11년 동안을 운영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리고 스스로의 소리공부에 정진, <선소리산타령>의 이수를 마치고 그동안 조교, 예능보유자후보를 거쳐 1990년에는 개인 발표회 무대도 마련하고 이어 지난해 7월에는 예능보유자의 반열에 올린다. “동대문시장의 우산가게 점원이 나라의 국록을 먹는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까지 되었으니 여한이 없습니다. 사는 동안 <선소리산타령>의 보급과 추진 양성에만 몰두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2천 2백만원짜리 반 지하 전세 집에서 노모와 두 자녀 등 다섯 식구가 살면서도 마음이 편하다면서 종로 3가 단성사 건너편에 있는 <선소리산타령> 연구보존회에서 후진 양성에 여념이 없다. 황씨는 작년에 한국경서도창악대계 상하권 한질을 낸데 이어 금년에는 테이프 8개로 구성된 황용주국악전집도 펴냈다. 한국경서도창악대계는 황씨가 1981년에 간행한 노랫말집 한국고전음악선집에 악보를 붙이고 <선소리산타령>의 의의와 유래, 분포, 음악적 특징, 종류, 가창방식, 장단 등을 총망라하고 시조, 가사, 서울경기지역의 속가, 서도창, 각도민요, 불가, 배뱅이굿, 송서까지도 다루고 있다. “우리 음악은 모두 구전음악이라서 누가 배울라치면 배우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가르치기도 쉽지 않지요. 그래서 지난 12년 동안에 짬짬이 나름대로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게 된 것입니다.” 자그마치 원고분량이 4.800장에 채보한 악보만도 170곡에 이른다. 카세트 테이프 8개로 된 황용주국악전집에는 <선소리산타령>을 비롯하여 각종 민요 81곡이 황용주씨와 그 문하생들의 창으로 녹음되어 있다. “민요라는 것이 서양식 오선보 위에 딱 떨어지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리의 미묘한 맛을 전달할 수 있게 음반화를 했지요. 이제 제가 할 일은 대충 끝난 것 같습니다. 국악전문 2년제 초급 대학을 설정했으면 하는 꿈이 있습니다마는 이는 제 혼자 힘으로는 될 일이 아니고...” 남은 여생 동안 <선소리산타령>의 저변확대에 기여하고 후배들의 활동무대를 확충하는데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 황씨의 다짐이자 바램이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기자에게 황씨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에는 다행히도 우리 젊은이들이 그전보다 국악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 같아 기쁩니다. 이런 계제에 외국 것을 먼저 배우기보다 우리 것을 먼저 익히고 아끼며 살려나가는 국민운동 같은 것이 펼쳐져야 합니다.” <월간 문화재>, 1991년 11월, 제112호 인간 문화재(文化財) 새로 지정(指定) 8명의 삶과 예술 2 우리가락 사랑 영원한 소리꾼 “과천 관악산 염불암 연주대…” 전국 유명 산과 사찰 이름을 줄줄 외면서 낭랑하고 힘찬 목소리로 <앞산타령>을 불러젖히는 이는 올해 7월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예능보유자로 인정된 <선소리산타령>의 황용주(黃龍周)씨(56)이다. “소감이요? 감사한 일이지요. <선소리산타령>은 이미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어요. 저는 말하자면 제2세대 선소리산타령꾼인 셈으로 그 동안의 수고가 결실을 맺은 것으로 봐야지요.” <선소리산타령>은 잡가의 하나로 7~8명이 일렬로 늘어서서 장구를 멘 한 사람이 앞소리를 매기면 소고(小鼓)를 든 나머지 사람들이 뒷소리를 받아주는 형식이며 정해진 여러 곡을 접속으로 부른다. 여기서 선소리란 입창(立唱), 즉 서서 부르는 소리라는 말이다. “좌창이 보통 목소리가 고운 여자들 것이라면 입창은 주로 목소리가 씩씩한 남자들의 소리랍니다.” 우리나라의 산과 물을 부제로 하고 사찰암자 바위 등 서정적 풍물을 주로 노래에 담고 있는 <선소리산타령>은 다른 노래에 비해 음역의 폭이 넓고 힘찬 것이 특징이다. 그에 따르면 <선소리산타령>은 본래 사당패 소리로 각 지방으로 분산돼 그 지방에 맞는 형식과 특징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즉, 서울 경기도를 중심으로 발달한 <경기 선소리산타령>, 평안도 황해도를 중심으로 발달한 <서도 선소리산타령>, 전라도 경상도 산타령을 중심으로 발달한 <남도 선소리산타령>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형식과 구성은 지방마다 다르지만 대개 먼저 몇 별곡으로 구성된 긴 <선소리산타령>을 부르고 끝에 짧은 장절 형식의 민요를 덧붙입니다.” 즉, <경기 선소리타령>은 <놀량(놀량사거리)>,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도라지타령)>에 <긴방아타령>, <자진방아타령>, <경복궁타령>, <청개구리타령>과 같은 민요를 덧붙여 하게 된다. 이 같은 3가지 <선소리산타령> 가운데 원형격인 <경기 선소리산타령>이 1968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기에 이르고 황(黃)씨의 스승인 당시의 대가 이창배선생이 이의 예능보유자가 됐던 것이다. 황(黃)씨는 원래 충남 공주 출신으로 어렸을 때 한학을 공부했고 당시 사람들로서도 드물게 시조를 읊길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고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들어가기 전 시조나 몇 곡 배우려고 들어선 길이 바로 평생의 업이 되고 만다. “처음에는 시조 몇 수를 제대로 흉내 내고 싶어 학원을 찾았어요. 한학을 바탕으로 한데다 시조에 취미가 있어 스승님이 제 소질을 눈여겨보시다가 저를 후계자로 키운 것이죠.” 그때가 바로 24세 되던 해로 당시 이창배선생은 <선소리산타령> 학원을 갖고 있으면서 일찍이 동양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분이었다고 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두세달만 할 작정이었는데 8개월이나 계속 하게 됐고 한번 시작해놓으니까 그만 두기가 어렵게 됐다. “한참 사회에 나가 펄펄 뛰며 일할 나이에 가계에도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소리꾼이 되고자 사방팔방 배우러 다녔으니 고생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득음(得音)하기 전까지가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소리를 하면서 목이 트이는 이른바 본격적인 소리꾼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인 ‘득음’을 위해 새벽마다 집 근처 산에 올라 소리를 지르고 밤에는 새벽 2~3시까지 소리연습에 몰두하곤 했다는 그는 다른 노래와 달리 고음영역이 많아 배우기에 더욱 힘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른 살 되던 해에 서울 종로 5가 쪽에 ‘대한민속예술학원’을 차리고 독립을 시도하게 된다. 빠른 독립만큼 정신적 재정적 부담도 적지 않았지만 그 동안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고 독립한지 25년, 5년 과정의 긴 설움을 견뎌낸 장한 이수자들도 다수 나왔다고 한다. 다행히 요즘에는 국악에 젊은이들이 관심이 많아 처음 시작할 때보다는 힘이 덜 들고 제자 수도 더욱 늘어나고 있어 보람이 가득하다는 그는 젊어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자식들에게는 별로 소리를 권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전념할 생각밖에 없단다. 그가 최근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국악의 이론적 체계를 잡는 일이다. “우리 음악은 다 구전음악이라서 누가 배울라치면 직접 가서 배우지 않으면 힘들지요. 서양사람들이 와서 배우고 싶어해도 쉽게 가르치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뭔가 남겨두고 싶어 시작한 것이 한국경서도창악대계 상하권의 집필이다. 무려 7년이나 짬짬이 써 온 원고가 장장 4천5백장, 채보한 악보가 2백장이나 된다. 이미 탈고돼서 편집작업 중이라는 이 책은 연말께 일반에 선을 보이는데 꼭 자식을 낳는 것처럼 설레고 기대가 된다고 말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우선 숨을 좀 돌리고 나머지 여생 동안 <선소리산타령>을 보다 발전시키고 후계자 양성에 전력할 생각입니다.” 그는 이 종목에 이미 준기능 보유자와 많은 후계자가 있는 만큼 국악의 대중화와 저변을 확대하는데 앞장 설 생각이다. 그런 노력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이 출강하는 안양영화예술고교에서의 제자훈련이다.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와 부리나케 쫓아가야 안양까지 겨우 시간에 대 갑니다. 일주일에 3번이나 나가는 것이 힘이 들기도 하지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매일매일 달라지는 학생들의 변화하는 모습에 힘을 얻곤 하지요.” 그리고 그가 가진 소원 한가지는 의외로 거창하다. “할 수만 있다면 국악후계자 양성을 위한 2년제 초급대학이라도 설립하고 싶어요. 마음 맞는 이와 후원자가 나서준다면 꼭 해보고 싶은 일입니다.” 무용에 이홍구씨 판소리에 조상현씨 등과 친하게 지낸다는 그는 젊은 후학들에게 우리 것을 먼저 배우라고 간절히 충고한다. “외국 것을 먼저 배우기보다 우리 것을 먼저 익히고 아끼며 살려 나가는 것이 애국입니다.” 그가 30여 년간 소리를 하며 수많은 제자들에게 되풀이해온 듣기 싫지 않은 잔소리이다. 글 박기현(朴起賢) 기자, 사진 이용우(李龍雨) 기자, 1992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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