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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자 (1942.1.3~)

예술가
강정자 (1942.1.3~)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4.6.12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전수 장학생 선정 1980.12.31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선정 1982.9.1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조교 선정 1993.8.2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후보 선정
학력(계보)
1964. 박동진에게 판소리 사사 1965. 우리국악단 입단 1967.~1977. 김죽파, 김병호, 박귀희에게 가아금병창 사사 1980.12.1 중앙발표공연 시 판소리(적벽가) 이수평가 받음
생애(약력)
1967.1.1 국립국악원 연주원(국악사 양성소) 재직 1967.1. 난계예술제 판소리 특상 수상 1975.12. 일본 NHK 초청 민속예술제참가 1976.4. 제1회 판소리 적벽가 완창발표회 1977. 유럽, 미주지역 순회공연, 제2회 판소리(심청가) 완창 발표회 1978. 국립창극단 입단, 중앙국립극장 우수단원 표창 수여 1980.4. 중앙국립극장 우수단원 표창 수여 1981.10. 홍콩아시아예술제 1984.4. <토생원과 별주부전> 공연 1984.6. 서동가 공연 1984.9. 홍보가 공연 1985.11. 판소리 유파 발표 1985.12. 오대가 유명 대목공연 1993. 판소리 적벽가 완창 발표회 1995. 흥보가 완창 발표회
리뷰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 ‘피울음’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중에서 남성적인 호탕한 소리로 유명한 박동진씨의 <적벽가>를 배워 뒤를 잇고 있는 제자는 남자가 아닌 여류 판소리꾼 강정자씨다. 판소리는 1964년 문화재 지정 당시부터 여러 명창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고 그들의 소리제가 각각 하나씩 줄기를 이뤘다. 지금까지 총 12명의 인간문화재들과 그들의 뒤를 이은 제자들의 소리가 듬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적벽가>는 판소리 5바탕 중에 다른 소리인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와는 달리 인간문화재는 박동진씨 단 한 분뿐이다. 강정자씨는 1982년 9월 1일 박동진씨의 <적벽가> 전수 조교로 인정받았다. “어려서 재주있다는 소리도 들었고 성실하고 부지런한 면에서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를 해 왔는데 10여 년 전 집에 불이 나고 크게 화상을 입은 후부터 건강문제로 힘을 내지 못하고 내 속에 뭔가가 죽어버린 것 같다.”고 스승의 소리를 이어가는 제자의 힘겨움을 털어놓는다. 강정자씨는 1942년 1월 3일 강릉에서 태어났다. 집은 원래 서울이었는데 어머니가 그를 갖고 강릉에 가시게 돼 거기서 태어났다. 국민학교 3학년까지는 강릉에서 자랐고 졸업은 피란지는 대구에서 했다. 그가 판소리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58년, 첫 스승은 동초 김연수씨였다. 그리고 일찌감치 17세 때부터 국극·창극 무대에 출연해서 국극전성기의 끝자락을 경험했다. 그가 소리를 배운 것이나 창극 무대에 일찍 서게 된 것은 고모님의 영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고모 강숙자씨는 국악을 좋아해서 국극단체에 뒷돈을 대기도 했고 나중에는 직접 단체를 조직해서 이끌기도 했다. “김연수선생이 하시던 남·여 혼성단체인 우리 국악단의 뒷돈을 좀 대셨고 나중에는 같은 이름의 여성국극단을 만드셨다.”고 말한다. 그의 첫 국극무대는 그 단체의 <유정화>, 희극적인 성격의 단역이었다. 데뷔는 여름방학이었지만 그 후 국극무대출연이 잦아지면서 학교공부는 흐지부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 시기에 그는 국극무대의 각종 아역을 했다. <유충열전>에서 유충열의 어린 시절을 맡았고 <연산군>에도 어린 연산 역을 했다. 김연수씨에게 <흥보가>, <수궁가>, <춘향가>의 중반까지 배운 그는 그 후 김여란씨에게 한달간 배운 적도 있다. 박동진씨에게는 1962년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1967년~1977년에는 스승과 함께 국악원에 있으면서 그는 국악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스승인 박동진씨는 고교과정에서 판소리를 가르쳤다. 국악원에 이어 1978년부터는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일했다. 판소리를 배우고 지켜온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생, 공부할 데가 없다든지 일자리나 설 무대가 없다는 것을 그는 거의 모르고 산 셈이다. 1976년 4월 국립극장에서 <적벽가>를 완창했고 1977년 12월에는 <심청가>로 완창무대를 가져 꾸준하고 힘있게 자신을 키워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상당히 지쳐있다. ‘화재로 인해 받은 물질적인 손실, 정신적인 타격, 육체적인 질병 때문’이라고 그는 한숨을 쉰다. 만성 저혈당으로 항상 피로를 느끼는 그는 ‘어서 추스려서 기운을 내 아득하게 보이는 스승의 뒤를 한걸음이라도 쫓아가 보겠다’는 결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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