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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현 (1939.11.7~)

예술가
조상현 (1939.11.7~)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1.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전수 장학생 선정 1976.5.31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선정 1991.5.1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53.~1960. 정응민에게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사사 1960. 박봉술에게 적벽가 사사 1970.~1974. 박록주에게 홍보가 사사
생애(약력)
1957.2.1 이승만대통령탄신 84회기념 전국명창대회 2위 1974.4.1 제1회 전국명창대회 춘향제 1위 입상 1975. 일본 해양박람회 초청공연 1975.~1980. MBC 내강산 우리노래 전속출연 1976.5.1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판소리부 대통령상 수상 1981. 아시아민속예술제 참가(홍콩) 1982. 판소리보존연구회 이사장 취임, KBS창극단장 역임 1983. 제2회 재미교포 위문공연, KBS 대한민국 국악대상 수상 1984. 국회, 국방부, 각 대학 및 사회단체 초청 강의 1986.~2003. 전남대학교 국악과 전임강사 2001.7.28~29 제2회 서울전국전통고수대회(풍류극장) 2001.10.27~28 서울전국판소리명창대회 참가 2001.11.25 판소리 유파발표회 2001.9.~10. EBS특강 조상현의 ‘이것이 한국의 소리이다’ 출연 2001.10. 경기도지사 초청 판소리 특강, 한국가스공사 특강 2002.8.19 제3회 전국전통고수대회(풍류극장)
리뷰
판소리 조상현 훤칠한 허우대에 우람한 체구, 게다가 타고난 목청에 넉살 좋은 재담. 그가 갓 쓰고 도포 입고 부채를 펴 들고서 소리를 할라치면 무대가 온통 꽉 찬 듯한 느낌이 든다. 이는 TV나 공연장에서 만나게 되는 조상현 명창에게서 대중들이 언뜻 떠올리는 첫 인상이다. “개악지정에 관무지덕이라, 음악을 들으면 그 나라 정치를 알 수 있고 춤추는 것을 보면 그 나라 덕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록인지 팝인지 댄스인지 하는 양악과 양춤이 들어와 온통 흔들어대며 난리를 치니 나라꼴이 제대로 될리가 있겠습니까. 올해는 ‘국악의 해’이니 우리 것을 되찾고 그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잃었던 제정신을 되찾아야지요. 제 바탕이 있고 난 연후에 국제화라든가 세계화니 개방화도 있는 것 아닙니까.” 소리만 잘 하는 게 아니라 말도 청산유수이다. 고사성어를 종횡으로 구사해 가며 정연하다. 국악의 해를 맞아 서울 강남의 대치동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 있는 사무실로 그를 찾아갔다. 몇 살 때부터 소리를 했습니까. “열세 살 때부터 정응민선생 밑에서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선생님이 작고할 때까지 7년 동안을 같이 기거하면서 소리를 배웠지요. 처음 단가 몇 마디 배우고는 2년은 심청가, 3년은 춘향가, 나머지 2년간은 수궁가를 배웠습니다. 선생님은 매우 엄했지요. 어쩌다 잡가를 하다 선생에게 발각되면 노랑목이라고 야단을 치시는데 몇 번 되풀이하면 담뱃대로 때리기가 일쑤였고 항상 몸가짐은 조신하고 신중히 하라고 성화였습니다. 혹독한 수련이었습니다. 덕분에 오늘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조상현, 그는 1939년 전남 보성군 겸백면 팽호리에서 태어나 국민학교에 다니는 동안 내내 서당에 다니며 한문공부를 했다. 그는 이때 천자문을 비롯하여 동몽선습, 소학, 대학, 논어, 맹자, 통감까지를 다 떼었다. 오늘날 그가 자유자재로 고사성어를 구사하는 것도 이때 익힌 한문 실력이다. 그는 공부도 잘했거니와 소리도 꽤 잘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곧잘 유성기 앞에 앉아서 소리를 따라 부르며 혼자 흥얼거리기를 잘했다. 이를테면 어릴 적부터 싹수가 있었고, 끼가 있었던 셈이다.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그의 소리 실력을 인정한 한 경찰관이 조소년을 강산제의 정응민 명창에게 소개하였던 것이다. 강산제란 판소리서편제의 주류이다. 강산제란 명칭은 서편제의 창시자로 알려진 박유전이 만년에 거주하였던 보성군의 강산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박유전에 사사받은 정재근의 소리를 들은 흥선대원군이 “이 소리야말로 강산제 일이라”과 칭찬한데 기인한다는 설도 있다. 또한 이 강산제는 보성 지방에서 그 법통이 이어왔다 해서 일명 ‘보성소리’라고도 한다. 박유전에게서 비롯된 강산제는 정재근을 거쳐 그의 조카 정응민에게 전수되고 그의 아들 정권진에게 대물림 된 후 오늘날 조상현씨에게 그 법통을 이어지고 있다. 조상현씨는 이런 연유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정응민 명창의 집에서 기거하며 율포중학과 보성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하루 10시간 이상의 혹독한 소리 학습을 받은 끝에 춘향가와 심청가, 수궁가 등 세 바탕의 판소리를 마쳤다. 그는 소리공부를 시작한지 4년째 되던 1957년 이승만대통령 84회 생신기념 전국명창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으니 그의 소리실력은 일찌감치 알려진 셈이다. 그의 나이 18세에 불과 할 때의 일이다. 20세 되던 해부터는 광주에 있는 호남국악원에서 4년간 조교로 있으면서 박봉구에게 적벽가를 배웠으며 23세부터 3년간은 군에 입대해 있었는데 군 복무 중에도 다행히 3군단 군예대에 배속되어 소리를 계속할 수가 있었다. 군에서 제대한 趙씨는 1965년부터 목포국악원의 판소리 사범으로 있으면서 목포 MBC 전속으로 국악방송을 전담하다가 1970년에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조상현씨의 소리를 들은 여류명창 박녹주씨가 “이 사람아, 자네 목소리 목포에서만 썩긴 아깝네. 큰물에서 놀아야지. 나하고 같이 서울로 올라가세.” 하면서 손목을 끈다. 그 길로 상경, 박녹주씨 수양아들이 되어 한집에서 기식하며 3년 동안에 걸쳐 흥부가를 완벽하게 해냈다. 이로써 그는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마친 셈이다. 서울에 올라온 조상현씨는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종횡무진으로 활약하게 된다. 1970년에 상경하자마자 중앙국립 창극단에 입단한 뒤 주역을 맡아 세련된 목과 연기로 명성을 떨쳤다. 그 중에서도 1974년의 <창극 수궁가>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어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 공연을 계기로 趙씨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비단 창극무대만이 아니었다. 라디오 방송과 TV출연으로 그의 인기는 정상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고전유머극장>, <TBC향연>, <내강산 우리노래>, <우리 가락 좋을 씨고> 등 그가 출연하는 프로마다 시청률이 올라갔다. 방송평론가들은 그를 ‘멀리 있는 국악을 우리 가까이로 끌어 온 사람’이라고 치켜 세웠다. TBC(동양방송)가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故 이병철회장이 조씨의 녹화현상을 지켜보다가 소리가 끝나면 “야. 소리 쪼매 더 해줄 수 없나?”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1973년에는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설립, 박녹주를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스스로 사무국장직을 맡아 판소리의 전승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1974년 남원춘향제의 제1회 전국남녀명창대회에서는 1등상을 받았으며 1978년에는 제2회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차지함으로써 명창의 반열에 안착하였으며 이어 판소리 전수 장학생으로 선정되고 이수자가 되었으며 1970년에는 국악협회 상무이사로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활동은 국외로도 뻗어 나갔다. 1975년 일본 엑스포, '75해양박람회의 초청공연을 필두로 한미친선예술단의 미국순회공연, 재일동포위문순회공연, 소련순회공연, 아시아민속예술제 참가 등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 개국에서 공연, 우리 가락의 우수성을 만방에 과시하였다. 그는 “아프리카지역만 빼고는 어느 나라인지도 모르고 다닐 정도로 자주 돌아다녀 이제는 해외공연이 지겹다”고 했다. - 완창무대는 왜 안 갖습니까?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데요, 벌써 여러 차례 가졌습니다. 제가 완창무대를 가질 때만해도 ‘완창’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발표회’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들 생각하는 것 같아요. 1980년에 판소리학회 주관으로 세 차례 완창무대를 가진 것을 비롯하여 1983년에도 두 차례 가졌으며, 1986년 파리 뽕삐두 문화센터에서 한불수교1백주년기념으로 5시간에 걸쳐 춘향전을 완창하여 많은 갈채를 받았던 일은 지금도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씨는 1982년 국립창극단을 사퇴한 후 판소리보존연구회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라디오방송과 TV출연은 물론 대학과 사회단체의 국악강사로 눈부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중앙공무원, 교육원 등 정부기관의 각 연수원, 금융기관과 대기업의 연수원 등에 나가 전통음악가 판소리에 관하여 강의해온 지는 12년째, 그 동안 출강한 회수는 자신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는 1983년 KBS국악대상을 받았으며 1987년에는 판소리 예능보유자 후보에 선정되고, 1991년에는 보유자의 반열에 올랐으며, 1984년부터의 전남대 국악과 전임 강사 생활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 광주에서도 국악 활동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매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광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1989년에 창단한 광주시립국극단의 활성화와 전남대 국악과 강의를 위해서지요. 이제 고향 쪽에서도 봉사해야 할 것 아닙니까.” 목요일과 금요일이면 EBS 교육방송의 <우리 가락 노래가락>이라는 국악프로 1주일분을 녹음하고 토요일이면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판소리를 지도하는 등 지금도 별로 틈이 나질 않는다. - 체격이 장대하니 건장하신데 술과 담배는 어느 정도나... “두 가지 다 안 합니다. 바쁜데 그런 것 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담배와 술은 삼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목에도 안 좋고요.” - ‘국악의 해’에 특별한 기획이라도 있으면... “제 자신은 특별한 기획이 없습니다. 판소리보존연구회 이사장, 광주시립국극단장, 전남대 국악과 전임강사 등의 소임을 다하는데도 빠듯합니다. 그저 온 국민이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재인식하고 전통문화를 생활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조상현씨가 소리에 입문한지도 40여 년, 국악의 해를 맞이하여 그가 이 나라 국악의 중흥에 기여해주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월간문화재>,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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