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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창순 (1934.1.10~)

예술가
성창순 (1934.1.10~)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6.5.31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선정 1987.1.5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후보 선정 1991.5.1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54.3.1 김연수에게 판소리 심청가 사사 김소희에게 판소리 심청가 사사 정응민에게 판소리 춘향가, 심청가 사사 박녹주에게 판소리 흥보가 사사 1965.10.1 우전 신호열에게 판자 및 서예사사
생애(약력)
1966.6. 제5회 신인예술전 서예부 특선(문공부) 수상 1968.2. 제17회 국전 서예부 입선 1968.1. 전국명창경연대회 1등(세종상) 수상 1969.1. 한국국악협회 이사 1970.2. 제19회 국전 서예부 입선 1975.10. 유럽 순회공연(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1977.6. 심청가 완창 발표회 (4시간 30분) 1977.6. 국립국악고등학교 창악강사 1978.5. 추계예술대학교 창악강사 1978.6. 제4회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판소리 부분 장원(대통령상) 수상 1979.11. 춘향가 완창 발표회(5시간30분) 1980.1. 와세다대학 초청 일본 동경 판소리 발표회 1982.3. 전남대 예술대국악과 강사 1982.11. 제1회 KBS 국악대상 수상 1985.3. 6회 판소리 완창발표회 1999.12. 공개행사 발표공연(광주 문화예술회관 소극장) 2002.10. 공개행사 발표공연(성창순제주전수관) 2003.7. 성창순제주전수관 2주년기념공연(제주문예회관 대강당)
리뷰
판소리 성창순 우리 전통문화의 소중한 유산인 판소리 고유의 멋과 맛을 감상할 수 있는 무대가 금년 들어 어느 때보다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중앙국립극장 소극장에 매달 마지막 토요일 오후마다 인간문화재를 비롯한 중진명창들이 심청가ㆍ춘향가ㆍ흥보가ㆍ수궁가ㆍ적벽가 등 판소리 다섯 마당을 완창하는 <完唱판소리發表會>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으며, 예술의전당도 역시 지난 3월부터 구내의 연못 옆 야외무대에서 매달 마지막 일요일 오후마다 인간문화재들의 야외판소리무대인 <한국의 소리와 몸짓-명창판소리 다섯 마당>을 펼치고 있다. 또한 예음홀에서는 지난달 24일부터 6월 25일까지 예정으로 <판소리 춘향가 네 바탕>의 공연이 정응민, 정정열, 김소희, 김연주 등 네 유파별로 여류명창들에 의하여 시리즈로 펼쳐지고 있다. <완창판소리發表會>와 <판소리 춘향가 네 바탕>에 연거푸 첫 가창자로 등장하여 왕성한 활동상을 보이고 있는 江山制의 여류명창, 판소리 심청가의 인간문화재 성창순씨를 서울 반포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 강산제는 어느 유파에 속합니까? “판소리는 동편제와 서편제, 그리고 中高制의 세 유파로 나누지 않습니까? 강산제는 그 중 서편제의 주류입니다. 강산제란 명칭은 서편제의 창시자로 알려진 朴裕全선생이 만년에 거주하였던 보성군의 강산리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며 혹은 朴裕全선생한테 직접 사사받은 정재근의 소리를 들은 흥선대원군이 “이 소리야말로 강산제일이라"고 칭찬한데 기인한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다른 유파의 창제는 그 보유자가 발상지를 벗어나 여러 지역을 유랑하는 동안 그 특수성을 고수하지 못한데 반하여 오직 강산제만은 전남 보성에서 그 법통을 이어왔기 때문에 강산제를 일명 ‘齋城소리’라고도 하지요.” 강산제는 朴裕全에게서 비롯되어 鄭在根을 거쳐 그의 조카 정응민에게 전수되고 그의 아들 정권진에게 대물림되어 오늘날 성창순씨가 그 법통을 이어오고 있다. 成昌順씨는 1934년, 당시 光州 권번의 기악선생이자 호남국악원에서 명고수로 활약하던 성원씨의 3남3녀중 맏딸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成씨는 한량으로 소리를 무척 좋아했으나 목이 좋지 않아 대신 악기를 다루었는데 그 솜씨가 워낙 뛰어나 따를 자가 없었다. 현재의 판소리 고법의 인간문화재 정철호씨도 그의 애제자였다. 성창순씨의 예능은 말하자면 부전여전으로 타고난 셈이다. 게다가 그가 어린시절을 보낸 곳은 이웃이 모두 기생들이 모여 사는 그야말로 풍류가 흐르는 곳이었다. “앞집 옆집이 모두 기생집인데 특히 옆집 기생은 예쁘기도 하거니와 목청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지요. 나도 저렇게 소리를 잘할 수는 없을까 하고 늘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또 하루는 여섯 살 때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어머니의 손을 잡고 광주극장엘 가서 <나무꾼과 선녀>라는 연극을 보았어요.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찌나 감동적이었던지 나도 배우가 되어 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어린 마음에도 가졌을 정도였어요.” 이를테면 어릴 적부터 싹수가 있었고 끼가 있었던 셈이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광주여중에 다녔지만 마음은 항상 소리판과 연극무대만 떠돌아다녔다. 16세 되던 어느 날 기어이 학교공부를 내던지고 부모 몰래 김연주창극단에 따라 나섰으며 이어 임춘앵의 여성국극단에 입단하여 전후 5년 동안 연극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이래봤자 광대 밖에 더 되느냐 싶어 회의를 느끼고 소리를 집어치우고 기악을 했다. 7년 동안에 걸쳐 김난주ㆍ원옥화ㆍ김영철씨 등으로부터 거문고ㆍ가야금ㆍ칠현금을 착실히 사사받았다. 그러나 기악의 기량이 경지에 이르자 소리에 대한 미련이 다시 살아났다. 5ㆍ16이 나던 해에 판소리를 끝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상경하여 金素姬선생에게 사사하였다. 金선생으로부터 소리공부를 하기 3년여, 수궁가를 배우던 어느 날 보성에서 鄭權鎭씨가 올라왔다. “金素姬선생께서 내 수궁가는 훗날 배워도 좋으니 정선생을 따라가 보성소리를 배우라며 정선생께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길로 보성에 가서 鄭權鎭선생과 선생의 부친인 정응민선생한테 1년간 사사하며 심청가ㆍ춘향가 등 朴裕全流 외 보성소리의 진수를 전수 받았습니다. 정응민선생은 음색도 정확하거니와 소리도 특이했습니다. 스승의 심청가를 듣고 있노라면 왜 나는 효도를 못했던가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반성할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주었습니다. 몸이 불편하여 몸져누워서도 소리를 가르치시던 스승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고 좋은 스승을 만나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너무도 행복합니다.” 정응민선생이 작고하자 서울로 다시 돌아와 박녹주선생을 모시고 안양의 삼막사에서 판소리 백일공부를 하였다. 이 때 흥보가와 단가를 익혔다. 판소리의 대강을 모두 완성하였지만 판소리의 사설이 한문으로 이어져 뜻도 모르고 소리로만 하는 것이 안타까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30을 전후해서는 우전 辛호열 선생을 만나 한문 겸 서예에도 전념하여 1960년에는 신인예술전 서예부 특선, 국전 서예부에 두 번(1958년과 1970년)이나 입선하기도 한 달필이다. 판소리의 참뜻을 한문으로 알고 나서 부르는 맛은 그렇게 절묘할 수가 없다고 강조하였으며, 완창발표회를 할 때면 자신이 직접 쓴 글씨로 병풍을 만들어 둘러치곤 한다. 성씨가 국악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제1회 전국명창경연대회(서울)에서 세종상(1등)을 타면서부터이다. 이어 1975년에는 제2회 전국명창경연대회(남원)에서 역시 1등상을 수상하였으며 1978년에는 제4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부문에서 장원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이어 1982년에는 제1회 KBS 국악대상을 수상함으로써 그의 소리는 반석 위에 놓여졌다. 그의 외국공연도 화려하다. 1969년의 재일교포 위문공연을 비롯해서 1974년 일본, 대판에서의 흥보가와 민요공연, 1975년 광복 30주년을 기념하여 동경, 대판 등 30개 주요도시에서의 재일교포 위문공연, 같은 해 10월에 유럽 5개국 순회공연, 1980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의 심청가공연, 1988년 독일 쾰른음악대학 초청의 심청가 공연 그리고 작년 11월에는 국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판소리공연을 가졌다. “여자로 태어나 세계유람도 원 없이 해 보았고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환호도 한 몸에 받아보았습니다. 성씨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그의 정력적인 完唱발표회무대이다. 1977년 서울시민회관 별관에서 4시간 30분에 걸쳐 심청가를 완창한 이래 1979년에는 춘향가를 완창하였으며 1989년에는 흥보가를 완창하는 등 전후 통산 열 두 차례의 의욕적인 완창무대를 가졌다. 成씨의 후학지도에 대한 열의도 대단하다. 1977년부터 추계예술학교와 국악고등학교의 강사로 출강한 것을 비롯하여 1980년대에 들어서는 단국대ㆍ전북대ㆍ전남대의 국악과 강사로 활약하는 한편 1980년부터는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20여명의 제자들과 더불어 산사 등지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판소리방학공부도 운영하고 있는데, 작년에 인간문화재가 된 것을 계기로 광주에 30평 규모의 연구실을 마련하여 금년부터는 이곳에서 방학공부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의 슬하에는 일점혈육이 없지만 친자식이나 다름없이 사랑하는 쟁쟁한 후학들이 있다. 한해자, 이임례, 허종열, 김명자, 조주선 등등. “판소리와 더불어 살아온 40년의 세월에 여한이 없습니다. 정응민선생이 누워서도 나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듯 나도 내 생애가 끝나는 날까지 제자들에게 내 한 몸 아끼지 않고 소리를 가르칠 겁니다.” <월간문화재>, 199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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