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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숙 (1935.6.21~)

예술가
오정숙 (1935.6.21~)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6.5.31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선정 1982.9.1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후보 선정 1991.5.1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50.~1972. 김연수에게 판소리 5마당 사사 1967.1.2 무형문화재 김연수 후계자로 지정
생애(약력)
1972.1. 판소리 5마당 완창발표(국립극장) 1972.4. 무형문화재 전수생발표회 1등상 수상 1975.9.21 제1회 전주대사습전국대회 장원상 수상 1977.1. 국립극장창극단 입단 1980.1. 재일교포 및 재미교포위문공연 1981. 제6회 아시아예술제 참가 공연(홍콩) 1982.3. 국립극장장 표창장 수여 1983.10.30 제1회 남도문화제 판소리부문 대통령상 수상 1984.3.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강사 1984.12.5 KBS 국악대상 수상 2001.12. 전국문화재 명예관리인대회 공연(대전 레전드호텔) 2002.6. 월드컵문화행사공연(국립극장 문화마당)
리뷰
판소리 오정숙 조선조 후기에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한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그의 광대가에서 인물(人物), 사설(辭說), 득음(得音), 발림을 소리 광대(廣大)가 갖추어야 할 4대 요건으로 지목하였다. 판소리는 서사적(敍事的)인 긴 이야기를 소(노래)와 아니리(말)와 발림(몸짓)으로 엮어나가는 극적인 노래이다. 따라서 체설(諦說)의 표현이 정확해야 하며 소리는 득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나 사설이나 소리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그때 그때의 감정표현을 위한 발림이 빈약하거나 부적절하면 현장예술로서의 감흥이 반감된다. 그러므로 판소리는 사설과 득음, 발림 3박자가 적절히 어울려야만 하며 거기에 출중한 풍채를 갖추면 금상첨화이다. 오정숙(吳貞淑)씨는 이 같은 요전들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여류명창이다. 그를 서울 논현동에 있는 아파트로 찾아갔다. “사람들이 저더러 가사 전달이 정확하고 아니리와 발림이 좋다고 하는데 그건 다 저의 스승이신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선생님을 흉내낸 것에 불과해요. 저에 대해서 글을 쓰지 마시고 김연수(金演洙)선생님에 관해서 쓰시고 저는 다만 동초제(東超制)를 이어받은 후계자라고만 토를 달아주세요.” 그는 기자와 대담하는 동안 자신에 대해서는 시종 어눌하다가도 선생님 이야기대목에 이르면 그저 신바람이 나서 자랑이 대단하다. 그가 말하는 김연수(金演洙)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옮기면 이러하다. 전남 고흥 태생인 동초 김연수(金演洙)는 서울에서 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늦게야 판소리에 입문하였는데 류성준, 송만갑, 정정열, 이동백, 정응민 등 여러 명창들로부터 판소리 다섯 마당을 배웠으며 그들의 더늠을 집대성하여 독자적인 동초제를 이룩하였다. 동초(東超)는 특히 학식이 높아 판소리 다섯 마당의 사설을 모두 정리하였는데 오자낙서(誤字落書)를 바로잡기 위하여 유명한 한학자의 자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춘향가>의 염불대목의 가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큰스님을 찾아가 문의하기도 하고 춘향이가 허(許)봉사를 불러 점치는 대목의 사설을 정리할 때에는 유식한 봉사를 찾아가 묻기도 하였으며 거상남행대목에 나오는 서울에서 남원(南原)까지의 노정에 나오는 지목을 정리하기 위하여 현지답사도 하였다. 또 <수부가(水富歌)>에서 류성준제 약성가의 약명과 약리를 정리할 때에는 이름있는 한의사를 찾아가 묻기도 하였다. <수궁가>의 약성가에는 설사 약방문이 나오는데 설사가 나서 약성가의 방문대로 약을 지어 먹었더니 나았다는 일화도 있다.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는 제자의 교육에도 매우 엄하여 소리의 장단고저가 좀 어긋나는것은 공력이 부족한 탓이라며 용서하였지만 사설의 발음이 틀리거나 발림이면(가사의 내용)에 맞지 않으면 예술이 아니라며 호되게 꾸짖는 성품이었다. 이 엄한 동초의 더늠을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오정숙(吳貞淑)씨이다. 오씨는 1935년 전북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의 소농집안에서 태어났다. 시조도 잘하고 꽹과리를 즐겨 치는 한량이던 아버지 오삼룡씨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소리에 익숙해 있었다. 10대에 들어서자 남도민요를 흥얼거리며 귀동냥으로 들은 판소리사설까지 흉내를 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싹수를 인정하여 소리 선생을 붙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그때에(1949) ‘김연주창극단’이 전주로 공연을 왔다. 그의 아버지는 동초(東超)를 찾아가 싹수있는 딸아이를 길러달라고 간청하여 동초의 문하생으로 내 맡겼다. 이때부터 그는 갈래머리의 어린 소녀로서 ‘김연수창극단’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소리와 연극수업을 받았다. 이 창극단원으로 4년간 수행하는 동안 그는 동초(東超)로부터 처음으로 춘향가를 배웠다. 19세 때에는 ‘삼성여성국극단’으로 옮겨 2년동안 활동하였는데 이 단체에는 박옥진, 박보아, 조양금 등이 활약하고 있었다. 21세 때부터는 창극활동을 그만두고 판소리학습에 주력하였으며 23세 때에 상경하여 김소희선생에게 사사, <심청가>의 범패중류를 배웠으나 오래지않아 건강상 소리계를 떠나 한동안 은거하기도 하였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27세 되던 1962년 김연수(金演洙)선생의 전수생이 되어 본격적인 판소리업을 시작하여 10년 동안의 각고 끝에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을 모두 마쳤으며 그 동안 득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백일공부만도 다섯 차례나 갖는 등 총력을 쌓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백일공부란 산 속 절이나 재각 등에 선생을 모시고 들어가 1백일 동안 눈만 뜨면 소리공부를 해야 하는 가혹한 배움의 과정이다. 아무리 목이 쉬고 배가 부어 올라도 선생은 가르침을 멈추지 않았다. “선생님의 소리는 전통적인 소리마디가 많아 전수하는데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진지한 가르침 덕분에 동초제(東超制)의 특이한 무대 연기술, 사설마다 맺고 풀고 굴리고 뻗고 흘리고 떠는 소리의 오묘한 창법을 터득할 수 있었으며, 그 어려운 동초제 판소리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헤아리기 어려운 고통을 극복하고 동초(東超)의 후계자로 태어난 오씨는 1972년 <제1회 무형문화재 전수생발표회>에서 1등을 하고 이어 명동국립극장에서 8시간에 걸친 <춘향가 완창무대>를 가짐으로써 그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작달막한 체격에 수줍고 조용한 성품이면서도 무대에 올라 부채로 허공을 치면서 정확한 가사와 뛰어난 발림으로 고음과 저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의 성음은 관객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다. 오씨는 이듬해인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매년 한차례씩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의 완창발표회를 차례로 가져 여류명창 중에서는 최초로 판소리 다섯 마당을 완창하는 값진 기록을 남김으로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동초(東超)의 더늠을 이어받은 오씨는 지금도 1974년의 수궁가 완창무대를 잊지 못한다. 간암을 앓던 동초(東超)가 공연날 새벽 2시에 타계했으나 그의 유일한 후계자인 吳씨는 정작 이를 까맣게 모른 채 무대에 올랐다. “저와 같이 동초선생에게 판소리를 공부했다가 훗날 고수로 돌아선 김동준씨가 그날 고수를 맡기로 했는데 그가 나오질 않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대신 세워 공연을 시작하였는데 객석에서 동료들이 자꾸만 우는 거예요. <수궁가>는 결코 슬픈 소리가 아니거든요. 주변에서 저의 공연이 끝날 때까지 이 사실을 숨겼던 거지요. 김동준씨는 그 시간 빈소에 있었고요.” 오로지 동초제만을 전수받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오씨는 1975년 ‘전주대사습’ 판소리 부문에서 ‘장원’한 것을 비롯하여 ‘제1회 남도문화제’ 판소리 ‘장원’, ‘KBS국악대상’ 등 수상경력도 화려하며, 1982년에는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후보로 선정되었다. 오씨는 해외공연을 통하여 우리 소리의 탁월한 예술성을 세계 속에 드높이는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1981년 ‘홍콩민속예술제’ 참가를 비롯하여 ‘미국순회공연’, ‘베를린세계민속음악제’, ‘제4회 국제평화음악제’(바그다드), ‘일본 무사시노음악제’, 세계페스티벌 유럽순회공연,’ 범민족통일음악회’(평양) 그리고 최근의 ‘92한국문화통신사’행사의 창극 <심청가> 공연 등에 참가하여 세계인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오씨는 동초에게 배운 대로 후진 양성에도 남다른 공을 들이고 있다. 서울대, 이화여대, 중앙대의 국악과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많은 이수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이일주, 홍성덕, 오성춘, 은희진, 성준숙, 조소녀 등 모두 오씨가 길러낸 쟁쟁한 제자들이다. 동초의 막내아들 김규형도 현재 그의 제자로 있다. 작년 5월에 인간문화재로 인정된 吳씨는 동초제의 맥을 이을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치겠다며, 스승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광주(光州)에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선생의 동상을 세우는게 꿈이라 했다. 가히 득음의 경지를 느낄 수 원숙한 창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오정숙씨는 지금도 ‘국립창극단’의 지도위원으로 있으면서 창극의 도창을 맡고 있으며, 지금도 소리연습에 몰두하는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월간문화재>, 19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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