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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주 (1909.7.28~1979.5.26)

예술가
박록주 (1909.7.28~1979.5.26)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64.12.24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기능보유자로 지정 1979.6.26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기능보유자로 사망해제
리뷰
나의 이력서 38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에 들어간 것은 내 나이 61살이 된 1965년이다. 그때는 춘향가의 기능보유자만을 제5호라고 불렸다. 김연수(金演洙), 정광수(丁珖秀), 김여란(金如蘭), 박초월(朴初月), 김소희(金素姬)와 내가 모두 <춘향가>의 기능보유자로서 인간문화재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약간의 생활보조비와 후배양성비를 문공부로부터 받았다. 처음엔 5천원정도 받았던 것 같다. 지금은 생활보조비 2만원에 후배양성비 1만원을 받고 있다. 그나마 정부가 우리들에게 배려를 해 준 것은 감사하나 아직 개선의 여지는 많다고 본다. 문공부는 지난해 인간문화재를 소리마다 분류했다. 판소리를 모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에 넣는 동시 다섯마당의 소리를 사람마다 새로 배정한 것이다. 김연수 김여란 김소희가 <춘향가>, 정광수, 박초월이 <수궁가>, 정권진(鄭權鎭)이 <심청가>, 박동진(朴東鎭), 박봉술(朴鳳述)이 <적벽가>를 그리고 내가 <흥보가>의 기능보유자로 지명됐다. 명창들의 장기(장기)대로 배정한 것은 좋으나 어느면 아쉬운점도 있다. 춘향가의 김연수, 김여란, 김소희는 모두 정정렬(丁貞烈)선생의 소리다. 물론 정정렬 선생의 <춘향가>가 보편화돼 있지만 송만갑(宋萬甲)선생의 춘향가도 그 나름대로 대(代)를 이을 필요가 있다. 특히 아쉬운 것은 이동백선생의 소리는 하나도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하긴 그분들의 소리를 제대로 잇자면 어머어마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다. 정부가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국악계에 얼마나 배려와 혜택이 있을지 궁금하다. 우리나라의 판소리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고유하고 아름다우며 깊이 있는 음악이다. 50년을 판소리에 몸담아 오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소리가 대중으로부터 소원해지고 잊혀져 가는 것을 볼수록 안타깝기만 하다. 나는 내 성질과는 달리 예전부터 뭔가 모으기를 잘했다. 그 덕분에 옛날의 사진과 소리를 녹음해 놓은게 상당히 있다. 가끔 송만갑 선생이나 이동백 선생의 소리를 틀어보면 뭔가 새로운 각오가 선다. 그 연로(年老)한 분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피가 맺힌 듯 울려 나오는 것을 보면 바로 저분들이야말로 명창(名唱)이란 칭호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춘향가> 가운데 이동백선생의 <월매(月梅)창>, 송만갑 선생의 <적벽가>중 <호령소리> 그것 한대목만 들어도 예수의 깊은 경지를 새삼 느끼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분들의 소리가 이어지지 않고 있다.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섞갈리고 옛사람에 죄스러워 얼굴이 달아 오를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우리 소리하는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더 열심히 사명을 갖고 제자를 가르쳐야 한다. 그동안 문공부, 서울시 국립국악원,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등 수많은 데서 국악상, 상장, 감사장, 표창장등을 받았다. 상장과 상패들을 모두 집에 걸어 놓았는데 이들을 볼때마다 오히려 마음이 편치 못하다. 나의 은퇴공연은 1969년 10월 15일 당시 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서 가졌다. 65살 되던해였다. 수많은 시민이 나의 은퇴를 서러워해 줬다. 무대에 서니 불현듯 설움이 북받쳤다. 12살에 소리를 배우고 13살에 무대에 처음선때로부터 50여년. 그동안 수많은 관중앞에서 소리를 하며 나의 평생을 바쳐왔다. 어려서나 젊어서나 또는 늙어서도 무대에 설때는 일말(一抹)의 두려움이 앞섰었다. 그럴때면 호기(豪氣) 있게 단가 하나를 부르면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 그러나 은퇴공연의 그날은 두려움보다 슬픔이 내 마음에 꽉 차서 관중들이 희뿌연 안개속에 보이는 듯 했다. 나는 인사말씀을 간단히 했다. “여러분들을 이 자리서 보고 언제 다시 뵐지 이제 기약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저의 무대생활은 마지막입니다. 소리가 잘못되더라도 허물없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단가 <백발가(白髮歌)>를 불렀다. 울음이 나와 제대로 부를수가 없었다. 마냥 울먹이면서 겨우 불렀다. 여자관중가운데 많은 사람이 따라 울었다. <백발가>에 이어 부른 <흥보가>, <박타령>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다. 평소 춤을 추지 않았지만 이날은 마지막이다 싶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소리했다. 관중들은 자갈자갈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그날은 슬퍼서 울기도 했지만 가끔 싱긋 웃기도 했다. 어느 사람들은 “박녹주가 웃으면 꼭 기막힌 소리가 나온다” 고 하는데 사실 재미있는 대목을 부르기 전에 싱긋 웃는 버릇이 있다. 내 딴에 화사하게 웃으며 관중 앞에 소리를 한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은퇴공연엔 우리나라의 국악인들이 모두 나와서 나의 은퇴를 기념해 줬다. 새삼 그분들에게 감사한다. 나의 은퇴는 퍽 많은 관심을 불러서 이어 대구(大邱) 대전(大田) 부산(釜山)서도 간단한 은퇴공연을 가졌다. 그로부터는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다. 종로구 익선동 127의 4호의 1백50만원짜리 전셋집에 ‘판소리보존연구회’(73-8697)간판을 걸고 제자를 가르치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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