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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률사

단체명
협률사
장르
극단
개요
협률사는 황실에서 설립한 최초의 실내극장이다. 당시 극장은 단체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연극개량운동을 내걸고, 한국 근대극의 중요한 기점 중 하나인 창극 <은세계>를 공연했다.
해설
협률사는 황실의 막강한 지원을 받아 탄생한 극장이다. 고종황제가 등극 40주년 경축식을 전후해 창설된 군악대 운영을 위해 하사한 내탕금 4만원으로 세워졌다. 극장의 책임자도 참령 장봉환이었으며, 극장 건물은 궁중의 혼상제례와 종묘사직의 춘추향제 담당의 내무부소관 봉상시 건물 일부를 터서 만들었다. 현재 새문안교회자리에 세워졌고, 규모는 5백석 정도의 중형극장이었다. 협률사는 먼저 전국의 명기들로 전속단체를 꾸렸다. 두 번째로는 고종의 칙명을 받은 김창환, 송만갑이 전국의 명인 명창을 수소문해 170여 명의 대단원을 모으게 된다. 김창환이 대표이며, 이동백, 송만갑, 강용환, 염덕준, 허금파, 강소향 등 남녀 명창과 박유재, 문영수, 홍도, 보패 등 경서도 명창 등이 그들이다. 협률사는 영친왕 등극 40주년 기념식을 형식적으로 치른 이후 일반적인 영업극장으로 운영되게 된다. 첫 일반 공개 공연이 12월 2일의 <소춘대유희>라는 것이었다. <소춘대유희>는 기녀들의 춤과 판소리, 명창들의 판소리, 재인들의 무동춤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연희였다. 재래의 전통연희가 서구의 실내극장으로 들어간 공연이다. <소춘대유희>는 정동극장 예술단에서 복원을 목적으로 최근 공연된 바 있다(정동극장, 2004년 4월 17일~18일). 이외에도 활동사진 등을 상영하기도 했던 협률사는 당시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이끌어냈다. 협률사 폐지를 주장하는 상소문까지 등장한 것을 보면 협률사에 대한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알 수 있다. 1906년 3월 8일자 <매일신보>의 논설은 관인이 내탕금으로 세운 협률사가 극장수입으로 사복을 채우는 점을 지적, 또한 창부기녀의 풍악으로 청소년들의 심지가 동요하고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세월을 허송한다며 비판한다. 결국 사회문제로까지 확장돼 협률사는 잠시 고급관리들의 사교장이 된다(1907년 관인부락부로 개관). 하지만 당시의 대표적인 극장을 원한 시민들의 압력으로 다시 공연장으로 쓰이게 된다. 1908년 이인직, 김상천, 박정동 등은 궁내부 소관이었던 협률사를 임대해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연다. 이제 완전한 사설극장이 된 것이다. 원각사 극장은 명창 이동백을 단장으로 하며 당대 최고의 가기 24명과 명창 40여 명 도합 64명의 호화진의 전속 단체를 두며, 공연을 올린다. 원각사에서는 협률사와 마찬가지로 전래의 판소리,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화용도 등을 공연하면서 민속무용과 농악 등을 가미했다. 소년 시절에 원각사 공연을 구경했다는 연극이론가 현철은 원각사 레퍼토리는 첫째 과정 관기춤, 둘째 과정 걸립(농악), 셋째 과정 춘향가, 심청가 등의 판소리를 공연했는데, 3일씩 나누어 공연했다고 회고했다. 그때는 연극이 앞 과정과 뒷 과정이라 하여 판소리의 <춘향전>, <심청전>, <흥보타령>, <별주부타령> 등을 이틀 혹은 사흘에 걸쳐서 상연하고 간혹 배비장타령이나 장화홍련전 같은 것을 상연하기도 했지마는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이 상연되는 것이 <춘향가>임에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춘향전은 극적 구성이 아닌 한갓 옛날 소리 그대로 토막토막 따서 한 사람이 소리하던 것을 여러 사람이 각각 동작과 아니리라 하는 말과 소리를 섞어서 무대 위에서 움직임에 다름이 없었다(이두현, <한국신극사연구>). 원각사는 구태의연한 판소리에 싫증이 난 관객들의 기호에 호응해 새로운 연극을 내놓게 된다. 원각사의 새로운 레퍼토리 신연극 <은세계>(이인직 작)는 이 같은 배경에서 나온 작품이다. <은세계>는 실화 최병도의 이야기를 무대화한 것으로, 원주 감사의 폭정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양민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공연은 1908년 11월 15일부터 12월 초까지 계속됐는데, 그때 감사의 후손이 상연 중지 운동을 하였으며 양민 역을 맡은 김창환이 무대에서 죽어 나올 때 관객이 그 목에 엽전을 걸어 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은세계>의 정확한 공연 형태에 대해서는 당시 창극에 관한 방증 자료와 공연에 참여했던 광대의 증언을 통해 판소리의 분창이 이뤄진 창극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원각사는 개관 한 달도 못되어 수입금액이 반감하는 등 자금난에 부딪친다. 민간 운영자들 손을 전전하며 관객의 기대에 못 미치는 구태의연한 공연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원각사는 결국 2년간 운영되다 국권의 상실과 더불어 극장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은세계
이인직은 소설 <은세계>를 1908년 동문사에서 간행했는데, ‘신연극(新演劇)’이란 말을 책 표지에 썼다. 작가는 처음부터 연극 대본을 염두하고 <은세계>를 집필한 듯 하다. 작품은 농민 최병도의 이야기인 전반부와 최병도의 자식들이 주인공인 후반부로 나뉘어진다. 소설의 전반부는 당시 실화를 토대로 탄생했던 판소리 ‘최병도 타령’을 개작한 것이고, 후반부에 옥남, 옥순 남매의 이야기는 작가의 창작이다. 탐관오리에게 죽음을 당하는 최병도와 도미유학에 성공한 옥남, 옥순 남매를 통해 봉건 지배층의 정치적 부패에 대한 민중의 항거, 체제를 혁신하기 위한 개화 사상의 고취 등을 다루고 있다.
이인직 (1862~1916)
신소설가이자 언론인. 호는 국초. 경기도 이천 출생. 1900년 2월 구한국 정부의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간 이인직은 1903년 일본정치학교 졸업 후 일본 육군성 한국어 통역에 임명돼 노일 전쟁 당시 1군사령부에서 종군한 바 있다. 1906년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만세보> 주필로 옮기고, 1907년에는 이완용의 도움으로 <대한신문>을 창간하여 사장으로 옮긴 후 이완용의 비서를 지낸다. 우리나라 본격적 신소설 작가인 그는 1906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를 <만세보>에 연재, 그 후 많은 작품을 썼으며, 1908년 11월 자신의 소설 <은세계>를 원각사 무대에 올려 최초의 신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 대표작품 <혈의누> <모란봉> <귀의성> <치악산> <은세계>
김창환 (1854~1927)
나주 출신으로 이날치, 박기홍과 이종간이며, 근세 명창 임방울의 외삼촌이다. 어려서부터 함평에서 서편제의 명창인 정창업의 제자로 수학하여 명창이 되었으며, 고종에게 의관 벼슬을 제수받았다. 협률사에서 활약했고, 1908년 원각사의 주석이 되어 여러 가객을 거느리고 창극 개발에 힘을 쏟았다. <은세계> 공연에서 주연을 맡았을 뿐 아니라 제작 전반을 이끌었다. 소리도 잘했지만, 풍채가 좋고 발림을 잘하여 관중을 매혹시켰다. 주인공을 맡아 인기를 끈 것은 이런 까닭이다. <흥보가>를 잘했고, 새로 부른 더늠으로는 ‘제비 노정기’가 있다. 이 ‘제비 노정기’는 현재 부르는 모든 <흥보가>에 들어 있다. <흥보가> 가운데 ‘집터 닦는 대목’과 <춘향가> 가운데 ‘과거장’도 유명하다. 이들 더늠과 ‘농부가’, ‘성주풀이’ 등이 음반으로 남아 있다. 그 소리는 오수암, 김봉학, 조몽실로 이어졌고, 현재는 정광수가 <흥보가>, <춘향가>를 계승하고 있다.
강용환 (1865~1938)
무안출신으로 가야금산조의 명인인 태홍의 아버지이고, 판소리 명창인 남중의 작은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서편제 명창인 이날치에게 수학하여 명창이 되었다. 협률사 시절부터 크게 활동했다. 풍채가 좋고 학식도 있으며 소리를 잘하여 김창환과 함께 <은세계>를 만들었다. 특히 연출 능력이 뛰어났다. 원각사의 창극 <춘향가>, <심청가>도 연출했고, <춘향가> 공연 때에는 더늠 ‘어사와 초동’을 창작했다. 뒤에 김창환협률사, 광주협률사에서 활약했고, 말년에는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특히 <적벽가>를 잘했다. 제자로 전일도, 박종원, 신용주 같은 명창이 배출됐다.
리뷰
<은세계>에 대한 찬반의 열띤 관객의 반응은 당시 연극이 황당무계한 과거의 작품으로부터 현실로 눈을 돌리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것은 개화기 연극으로서는 획기적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개화기 배우들이 판소리를 분창해서 창극이라는 새 장르의 연극형식을 만들어 낸 것 이상으로 현실과의 만남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이는 곧 민속놀이적 전통연희에 젖어 있었던 배우들의 새로운 현실 인식인 것이고, 연극사적으로는 근대로 접어드는 조짐이기도 했다. - <한국근대연극사>, 유민영, 단국대학교 출판부, 유민영, 1996
관련도서
<우리연극 100년>, 서연호·이상우, 현암사, 2000 <한국근대연극사>, 유민영,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6 <한국연극운동사>, 유민영, 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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