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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군놀이

작품/자료명
한장군놀이
지정여부
김도근(제관)
구분
무속의례
흐름
한장군놀이는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에서 전승되고 있는 자인단오굿의 또 다른 명칭으로 강릉단오제나 은산별신굿과 흡사한 대동놀이의 하나이다. 한장군놀이는 매년 단오날에 한장군을 모시는 사당에 제사를 지낸 후 여자복장을 한 한장군과 누이동생을 꾸며 앞세우거 그 뒤에 사또 행차를 따르게 한 가장행렬을 한다. 이때 한장군과 여동생이 추는 춤을 여원무(女圓舞)라고 한다. 한장군놀이는 오랜 역사를 지니면서 마을 사람들의 뿌리깉은 신앙이 놀이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며, 높다란 화관을 쓰고 푸는 여원무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것이다. 한장군놀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기록과 전설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9세기를 전후 신라시대에 왜구의 무리가 자인의 도천산(到天山)에 성을 쌓고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히자, 한장군이 꾀를 내어 그들을 섬멸시켰다. 한장군은 여자로 가장하여 자신의 누이동생과 함께 꽃관을 쓰고 버들못뚝에서 춤을 추어 적들을 유인하여 섬멸하였는데 이 때 춘 춤이 바로 현재의 여원무이다. 이 후 한장군은 자인의 태수가 되었고 죽은 뒤에는 그를 기려 자인 사람들이 여러 곳에 사당을 세우고 단오날에 추모제사와 함께 3~4일간 여원무와 배우잡희, 무당굿, 씨름, 그네 등의 행사를 즐겼다. <경산군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이러한 내용을 찾을 수 있으며,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위의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한편 얼마 전까지 자인 인근지방에서 자인단오제, 영산문화장굿 등 한장군놀이와 유사한 형태의 놀이가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놀이들을 모두 마을 대동굿의 하나로 상고시대의 축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장군놀이는 1969년 김택규 교수가 <여원무조사보고>라는 내용으로 당시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1970년 5월 단오 때에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의 현지조사결과로 복원되었다. 그 뒤 1973년에 중요 무형문화재 44호로 지정되면서 자인단오제를 '한장군 문화제'로 바꾸어 현재까지 전승해오고 있다.
내용
한장군놀이는 크게 1. 한장군 추모제 2. 여원무 3. 호장굿(가장행렬) 등으로 구성된다. 먼저 한장군 추모제는 한장군 묘와 6곳의 사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행사이다.
한장군 추모제
한장군 묘 한장군을 추모하는 제사행사는 모두 6곳에서 열린다.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자인공원에는 마을 사람들이 개장지숲이라 부르는 곳이 있고 이 일대에 속칭 “말무덤”이라고 하는 고분들이 산재해 있다. 자인 사람들이 한장군의 묘라고 믿는 고분 역시 그 중의 하나이다. 과거 자인농고 운동장 정지작업을 할 때 한 개의 고분이 헐리고 토기와 인골이 나왔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한 장군의 유골이라 하면서 개장지 숲으로 이장하였다. 한장군 묘에서의 추모제는 제사는 유교의식으로 거행되며 이는 한 장군이 실존 인물임을 나타내는 근거가 된다. 민호장이 가장행렬 때 도원수가 되어 현감으로 가장하고, 제사 때도 역시 초헌관이 된다. 진충묘의 위패는 ‘증판서 한장군 신위’이며 제사는 정충언 현감이 지은 축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어 동자가 영신사(迎神詞)를 낭송하며 다음에는 유교식 홀기에 따라 초헌, 아헌, 종헌관의 순서로 제사를 모신다. 근래의 제사는 축문을 생략하고 영신사를 읽은 후 홀기대로 제사를 모신다. 한장군 사당 자인현이 주관하여 건립된 한장군의 사당은 자인공원 내의 진충묘, 북서리의 한당, 원당리의 한당, 마곡리의 한묘 등이 있다. 그 중 제일 오래된 것이 진충묘이다. 북서리의 한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존하고 있는데, 진충묘만 한장군의 신위로 모시고 나머지는 한장군 누이를 모신 것이 특이하다. 마을 단위로 세워진 것은 용성면 송림리, 대종리의 성황당이 있었으나 모두 소실되었다. 1) 진충묘 (제1한묘) 자인 공원내(桂林)에 있는 것으로 한장군이 죽은 후에 주민들이 도천산의 서쪽 기슭에 세웠다고 전하는 신당자리이며, 정충언 현감이 중수하였다. 한장군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이를 철거하고 자기들의 신사를 세웠는데, 해방 후 북서리에 있던 한당을 이건하여 현재의 진충묘가 되었다. 매년 단오제때 이 곳에서 제사를 모신다. 2) 한당 (제2한묘) 북서 1리 자인 면사무소 뒤에 있었고, 한장군 누이를 모셨으나 일본인들이 없애 버렸다. 3) 한묘 진량면 마곡리에 현재하며, 한장군 누이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원래 이곳은 구사현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 효종때 자인현에 합해졌다. 현이 폐지되기 전에는 단오절 자시에 이 사당에서 한장군 누이를 제향한 후, 자인 단오제에 참가했다고 한다. 근래에는 진량면 마곡리 등 몇 개 마을이 주관하여, 자인 단오제와는 별도의 제례를 치르고 있다. 4) 한당 자인면 원당리에 현존하고 있다. 1663년 자인 현청이 신관리에서 원당리로 옮겨지고 나서 자인 단오제때 한장군 신위를 모시기 위해 한당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청이 1700년 원당리에서 자인면 북사리로 이건 되고부터 한장군 누이 사당으로 전락된 것 같다. 한장군 누이에 대한 제사를 마치면, 사당 우측의 한장군 누이 말의 마부를 위해 제수를 올린 후 약식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끝을 낸다. 5) 송림리의 사당 용성면 송림리 버드나무 숲에 한장군 누이를 모신 사당이 있었으나, 일제 때 철거해 버려 지금은 흔적도 없다. 한장군은 오누이였다. 옛날에는 바구나무 숲에 한 장군 사당이 있었으나 왜경들이 기독교도들을 시켜서 훼철하였다. 지금은 돌무더기만 남아 있다. 원래 사당 앞에 집동 만한 포구나무가 서 있었고 언제나 금줄을 치고 있었으나 그것 역시 베어 버렸다. 현재는 정월 15일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며, 동제라고 부른다. 깨끗한 사람을 가려서 동제의 제관을 시키며, 비용은 동민이 분담한다. 3년마다 한 번씩 무당을 불러 큰굿을 했는데 1920년부터 전승이 중단되었다. 6) 대종리의 한당 용성면 대종리에 있는 한장군 누이를 모시는 사당으로 일제 말엽에 왜경의 압력으로 철거하였다가 1947년에 대종리 사람들이 발의하여 복구하려 하였으나, 타 동에서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종리 사람들만이 출렴하여 사당을 짓고, 매년 단오 일에 음복하고 종일 춤추고 노래하며 놀았다. 현재는 제사를 올릴 때 봉사가 대내림을 하여 대가 가는 집에서 제주를 낸다.
여원무
도천산성에 기거하며 자인현 주민들을 괴롭히던 왜구들을 산아래의 버들못(柳堤)으로 유인하기 위해 한 장군이 그의 누이와 함께 꾸며낸 춤을 여원무라 한다. 읍지에 의병을 일으킨 하나의 수단으로 평가한 것을 보면 많은 인원이 동원된 독특한 놀이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 장군이 왜구를 유인할 때는 야생화로 3m높이의 거대한 화관을 만들어 꼭대기를 연꽃으로 장식하고, 화관가에 오색 종이를 드리웠는데, 자인 단오제에서는 시작 때부터 조화를 사용했다고 전한다. 한장군은 여장을 하고 그의 누이와 같이 각자의 화관을 들고 춤을 추었고, 주위에는 배우로 가장한 주민들이 잡희(雜戱)를 꾸몄는데, 이 화관무와 배우들의 잡희가 현존되고 있는 여원무와 자인 팔광대의 전신이다. 한장군놀이 전, 여원무에 사용하는 여원화에는 접근하지 않았고, 이 놀이가 끝나는 파장에 가서야 남녀노소를 묻지 않고 꽃송이를 따가기에 혈안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것은 꽃송이를 몸에 품고 가서 집에 두면 풍년, 제액, 치병 등의 효험이 있다는 믿음때문이며, 이로 인해 마지막에는 도리깨로 타작하여 여원화가 완전히 형식마저 없어진다. 화관의 제작과 의미 화관을 만들 때의 꽃은 5종이고, 꽃의 수는 500개, 꽃관의 지름이 60cm, 높이가 3m, 꽃가지는 8개. 관가에 드리운 치마가 오색이며, 길이는 1m정도이다. 오색의 종이나 5종류의 꽃을 쓴 것은 오행 개념이 도입된 듯하고, 상단에 연화로 장식한 것은 불교와 유관할 것이다. 화관의 밑 부분이 통형인 것은 사람의 상체가 잘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고, 오색 치마를 드리운 것은 사람의 하체를 숨기기 위함이다. 실제로 화관을 쓰면 사람의 형체는 없고, 주민들이 말하듯이 거창한 꽃귀신같이 하나의 꽃관으로만 보이며, 이것을 쓰고 춤출 때의 모양은 정말로 희귀한 모습이다. 화관은 정성스럽게 만들고 단오날 여원무를 출 때까지는 성스럽게 보관했다. 행사가 끝나고 이 꽃을 집에 두면 벽사에 효험이 있다고 믿어 서로 가지려고 아수라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 꽃 만드는 사람은 1960년대 복원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전수 받는 사람들로 자인지역에서 꽃 만드는 사람들은 전수 받은 사람들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단오꽃 만들러 가자'라고 말하면 농사일이 아무리 바빠도 이것을 먼저 해야한다고 한다. 화관을 만들면 무게가 30킬로그램 정도 되며, 과거에 문종이를 물들여서 할 때는 50킬로그램이나 나갔다고 한다. 여원화는 한장군놀이의 중요한 상징물이다. 도천산에 침입한 왜구를 유혹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화관의 꽃이 어린이 볼치기에 효험이 있고, 집안의 무사태평을 가져온다는 믿음 때문에 화관의 꽃을 따서 삶아 먹는다고 한다. 한 장군놀이 때에 화관무를 추면 그 꽃을 동네 아낙네들이 서로 꽃을 따려고 하는 장면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지역민의 축제에 사용되는 화관이 聖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지역민의 identity를 유지, 함양하는 수단으로 해석되어도 별무리가 없을 것 같다.
호장굿(가장행렬)
가장행렬은 사또 행차와 같은 격식과 차비를 갖추고 진충묘 등의 행사장으로 행렬하는 것을 말한다. 반상의 계층사회에서 현감이 평민에게 현감의 복장을 빌려 주어 사또가 행차하는 것과 같은 행렬을 하게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한장군을 수호신으로 추앙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수많은 인원과 말(馬)이 동원된 행렬 중에는 삼현육각의 풍악을 연주했고, 호적, 나팔, 등이 곁들여져 마치 군악을 연상하게 했다. 또, 징, 장고, 북, 꽹과리 등의 풍물도 있어서 흥을 돋웠고, 대열 중에 3m가 넘는 여원화가 춤으로 덩실거렸으며, 여러 역으로 분장하여 말을 타고 따르는 무리들과 바람에 나부끼는 수많은 기들로 가히 장관을 이루었다. 이것은 사또 행차의 규범과 궁중악, 민속악, 무용 등이 곁들인 것이다. 1) 과거의 가장행렬 순서 단오굿 때에는 현사(縣司)가 있던 자리(현 우체국)에 집결하여 가장행렬로 진장터(한장군이 진을 쳤던 곳이라 하여 향사(享祀)때에는 여기서 말달리기, 활쏘기, 씨름 등을 하였다)까지 온다. 여기서 옛날에는 여원무를 연행하고, 한당으로 가서 제사를 올리고, 도로 돌아가서 고을원에게 여원무를 보이고 해산한다. 원은 참여하지 않고 모든 아전청(衙前廳)의 이속(吏俗)은 통인 하나만 남기고 모두 단오굿에 참여한다. 가장행렬의 순서 * 장산사령기(獐山司命旗) * 청룡기(靑龍旗) * 백호기(白虎旗) * 영기(令旗) * 나대유풍기(羅代遺風旗) * 농기(農旗) : 옛날에는 현상에 있는 기치 전부가 나왔으며 기수는 자인 4동에서 나왔다. 기의 꼭지에 꿩털을 꽂았으며 기의 모양은 강릉단오굿이나 창녕군 영산면의 문호장(文戶長)굿의 성황대를 연상시킨다. * 여원화관 : 2人 執手, 화관 높이 10척(3미터), 체메(치마), 오색색지(彩衣) * 무부 : 풍물을 치면서 따른다. * 희굉이 : 얼굴에 검은 황칠을 하고, 머리에 패랭이를 뒤집어썼다. 칼을 잡는다. * 여장동남(女裝童男) : 2명의 13-14세의 남아를 여장시키고, 붉은 행전을 치고, 붉은 치마에 푸른 저고리를 입고, 손에는 한 자 가량의 끈을 쥐고 춤을 춘다. * 감사뚝 : 1명으로 소털 벙거지를 쓴다. 귀신 머리 같은 감사뚝을 기처럼 들고 따른다. 대군 중에서 법을 맡은 표시가 되며, 이것을 걸어야 인명을 좌우할 수 있고 희굉이와 더불어 죄인의 목을 베었다. * 군노(軍奴) : 2명으로 붉게 물들인 소 벙거지를 뒤로 드리워 쓰고, 금색으로 쓴 쾡멥자를 앞에다 붙였다. * 사령(使令) : 2명으로 붉은 천립을 입으며 말을 타고, 날날이(胡笛=새납)와 나팔을 분다. * 포장(砲將) : 출발할 때 방포(放砲), 도중 6회 방포한다. 백색 옷 위에 검은 옷(두루막 형)를 걸치고 말을 탔다. * 무녀 : 4명이 무녀복을 입고 말을 탔다. * 포군(砲軍) :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화살을 꽂으며 집검을 하고 말을 탔다. * 기생전배(妓生前陪) : 4명으로 책 천립을 쓰고, 청홍옥의 갓 끈을 드리우고, 흑쾌자에 남색 띠를 메고 말을 탔다. * 중군(中軍) : 1명으로 동다리를 입고, 책 천립을 쓰고, 수기를 들고, 칼을 차고 말을 탔다. * 삼재비 : 세면풍악(피리 젓대) 연주. * 전배통인(前陪通引) : 20명 * 일산(日傘) 및 파초선 * 도원수(都元首) : 원에게서 빌린 관복을 입고 남여(藍與)를 탄다. 호장이 도원수가 된다. * 인부통인(印陪通引) : 호장의 인궤(印櫃)를 쥐고 말을 탔다. * 수부독축관(隨陪讀祝官) : 1명으로 쾌자를 입고 수실띠를 맨다.(행렬은 주악에 맞추어 행진한다) 2) 현재의 가장행렬 순서 근래에는 가장행렬에 쓰이는 말이 인력거로 대체되었고 기의 수와 참여 인원이 많이 줄었으며 복장도 바뀌고 행로도 달라졌다. 도원수는 군수가 되고, 그 외에는 지방의 기관장들과 자인의 남녀 고교 학생들이 참여한다. 자인여고에 식장이 마련되어 간단한 기념식과 여원무, 농악 등을 공연한 뒤 행렬이 시작되는데, 동부 1, 2리, 자인국교, 면사무소를 지나 진충묘에 도착하여 해사하고, 제관들이 집례한 후 여흥에 들어간다. 가장행렬 순서(1991년) * 장산사령기(獐山司命旗) * 한장군기(韓將軍旗) * 청백황주흑제기(靑白黃朱黑帝旗) * 나래유풍기(羅代遺風旗) * 검마도천산 치마유제상기(劍磨到天山 馳馬柳堤上旗) * 령기(令旗) * 오방기(五方旗) * 청룡기(靑龍旗) * 감사뚝(監査뚝) * 호적(胡笛) * 여원의 파초선(女圓衣 芭蕪扇) * 일산(日傘) * 사인교(四人轎) * 제관(祭官) 아헌관(亞獻官) 홍헌관(終獻官) 집례(執禮) 대축(大祝) * 장군(將軍) 관기(官妓) 팔광(八廣大) 여원무(女圓舞) 무녀굿(巫女굿) 악대(樂隊) 농악(農樂) 관중(觀衆)
전승자 정보
현재 한장군놀이는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김도근(金道根, 제관)에 의해 전승·보존되고 있다.
연계정보
· 재구성 <한장군놀이>, 국립문화재 연구소, 1999 <한국의 전통예술>, 심우성 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7
관련도서
<한장군놀이>, 국립문화재 연구소, 1999 <한국의 전통예술>, 심우성 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7 <한국민속대사전1>, 한국민속대사전 편찬위원회, 민족문화사, 1991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사이트
한장군놀이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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