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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례 (1935.4.21~)

예술가명
김대례 (1935.4.21~)
구분
놀이와 의식
문화재관련정보
1980.11.17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보유자 인정
생애(약력)
1978.~1993. 중앙발표회, 지방발표회 참가 1985.6.1 유럽 5개국(서독 등) 순회공연 1990.9. 미국 LA공연 참가
리뷰
재인-전통 예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70 망자와 생자의 해원의 한평생 산 자와 죽은 자로 구분지어지는 이승과 저승간의 거리. 왜 생자는 망자를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하며 사자는 금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저승 문 밖에서 서성이는가. 물에 빠져 죽은 장소에서 익사 사고가 잦고 교통사고가 난 곳에서 사고가 자주 나, 노제를 지내고 무녀를 불러 굿도 한다.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없이 비명횡사도 생을 마감할 경우 혼백은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 못해 저승길로 속히 못 가고 배회한다고 무가에서는 믿는다. 이것이 떠도는 혼귀로 불리는 지박령이다. 살이 있다는 착각 속에 냉큼 구천엘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장소를 헤매다가 위기에 처한 생자를 더욱 혼란에 빠뜨려 결국 해코지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 많고 억울한 넋신들을 달래고 씻겨 보내 주었다. 단골네(무녀) 불러 벌이는 이 어정(굿)판을 서울에선 지노귀굿, 경상도 지방에선 오구굿, 함경도는 망묵이굿, 전라도에서는 씻김굿이라 했다. 진도 대부 김대례(金大禮62, 1931년 7월 2일생)는 진도의 칠성받이(박, 함, 노, 채, 최, 이, 김씨 외 한씨도 파생) 세습 무가 중 수장 격인 밀양 박씨 박종기(朴鍾基) 명인의 외손녀다. 한평생 굿밖에 모르며 살고 있는 김씨는 태어나 보니(진도군 임해면 삼막리) 어머니(박소심, 박종기씨 셋째 딸)가 대무였고, 나이 들어 시집 가니 시할아버지(한씨)시할머니(성씨 모름), 시아버지(한성윤)시어머니(김씨)도 세습 대무였다. 5남 3녀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난 김씨는 4~5세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 어정판을 쫓아다녀야 했다. 동생들과 헛간이나 뒤꼍에서 놀며, 보고 듣고 배운게 무가무악무무다. 여름가을걷이 때마다 동냥질(단골 세습무가 1년 내내 정성들여 주고 받는 쌀, 보리, 삼춤 등 사례품)과 구박 천대가 싫어 무당질을 하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었지만 어찌 생업이 사람의 뜻대로인가. 대물림으로 타고난 성음에 붙임새 좋고 넌실(춤)발까지 넉넉하니, 11세에 들어간 보통학교도 다니다(2년) 말고 아예 어정판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육감적인 얼굴의 ‘소녀 대무 김대례’가 가는 곳마다 법석이었다. 동으로 뻗은 가지 목토보살이 열렸네. 남으로 뻗은 가지 화보살이 열렸네. 서에로 뻗은 가지 수호보살이 열리고 북으로 뻗은 가지 금호보살이 열렸네……. 무슨 뜻인지도 모르며 어머니와 외당고모(박선예)가 읊조리는 사설을 외워댔고, 그 춤과 바라지악 가락을 눈여겨 두었다. 시집(17세)을 가서는 시부모를 따르며 무업에 종사하니 외곬 인생치고도 옹골차다. 스물다섯살 때는 ‘이 짓’을 작파하려 생선 장사도 해 보고 보따리 포목 장수로도 나섰지만 원인 모를 병에 시달려 그만두고 결국 환갑을 넘기고 말았다. 김씨는 어려서부터 자연에 대한 무서움이나 공포심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첫닭 우는 새벽에 산사태로 내려앉은 공동묘지를 지나가도 동네 앞길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 호랑이에 물리거나 귀신에 홀려 죽는다해도 죽으면 그만이지 마음의 동요를 일으킬 게 무어냐는 기골찬 자세다. “남의 조상 해원하고 원귀들의 맺힌 한을 풀어 주다 보면 ‘내 속’은 썩어 문드러져야 됩니다. 전라도는 물론 경상, 강원, 경기, 충청, 서울 등 안 다녀 본 곳이 없어요. 그저 지각 있는 사람은 살아생전 깨우쳐 산 사람 속 뒤집지 말아야지…….” 무가에선 사람은 죽어서 얼마간 부정하며, 이 부정함을 씻어야 한다고 믿는다. 몸의 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 의식까지 포함, 씻김의 절차를 통해 해탈되고 새로운 신격으로 들어간다는 강한 상징성을 함축한다. 진도씻김굿은 시체를 씻는 절차와 매장 뒤에 넋신을 씻는 두 가지로 나눠 행한다. 이 중에서도 사람을 엉겁결에 보내 놓은 뒤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되는 일이 없을 때 이를 풀기 위해 벌이는 씻김굿은, 망자를 위무함은 물론이고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많은 교훈과 깨우침을 남겨준다. 돗자리에 망자의 옷을 둘둘 말아 몸통을 만들어 세우고 주발에는 쌀이나 혼백(넋전)을 담아 머리를 세운다. 그 위에 솥뚜껑이나 모자를 얹으면 사람 형체가 되며, 이 때 향물쑥물맹물을 번갈아 축여 빗자루로 씻는다. 무명필로 매듭을 만들어 차례로 풀어가는 고풀이(인생 역경) 의식 다음에 저승길을 상징하는 무명천을 길게 늘어뜨리고 길닦음을 한다. 이 때 김대례씨가 풀어 내는 사설은 넋신의 고(매듭)는 말할 것 없고 일가 친척과 동네방네 산 사람의 속까지 개운하게 녹여 준다. 하직이로구나. 하직이로구나. 인간 세상이 영영 하직이로구나. 살던 집도 하직이고 정든 처자도 하직이로다. 형제 일신, 일가 친척, 친구 번뇌도 하직이요. 동네방네 모두가 하직이로다……. 망자의 작은 상여를 들고 있는 김씨가 울고, 죽은 이의 옷가지를 든 이기자(50, 전수자)씨도 흐느끼며, 신칼로 저승을 인도하는 정숙자씨도 울먹인다. 이 어정판에 박병천(박종기씨 손자, 김대례씨와 내외 종간)씨의 징이 합쳐진 삼현육각(피리2, 젓대, 가야금, 징, 장구)이 가세하면 길가던 과객은 물론 외양간 황소까지 울어댄다고 진도에서는 말한다. 이렇게 한바탕 굿을 하고 나면 김대례 지무는 맺힌 고를 풀어주고 속시원하고 남은 가족들과 구경꾼들도 산 사람이 할 도리를 해준 것 같아 시원해진다. 마음이 움직여서 이는 번뇌는 마음이 편안하면 평정될 수 있는 법. 이후부터는 집안대소사가 모두 술술 풀려 나간다는 것이다. 대무 김씨는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제72호 진도씻김굿)로 지정된 뒤 일본, 유럽까지 일주했다. 어머니의 4남 4년 형제 모두가 삼남인을 사로잡은 무가악무의 대가들이었는데 ‘팔례’ 이모만 남고 모두 갔다. 자신도 3남 3녀를 두었으나 천시와 한대가 서러워 ‘이 길’을 못 가게 만류한 걸 이제서야 후회하고 있다. 무가끼리 이루어진 동간혼의 뒷얘기, 어정판에서 눈 뒤집고 먹던 식은 밥, 객지 어느 굿판에서 낯선 남자가 평생 먹여 살릴 테니 자가용 타고 도망가자며 실언하던 일, 가난한 집 굿한 뒤 내 돈 보태고 온 가슴 아픈 사연 등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김대례씨. “지성으로 숱한 사람들을 씻겨 주었습니다. 이제는 나 자신을 씻길 때가 되었나 봐요.” 김대례씨는 1990년 12월 15일 중풍으로 쓰러져 한 달 이상을 혼수상태에 있다가 기적적으로 깨어나 다시 굿판에서 진도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다. <세계일보>, 이규원, 1992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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