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고양송포호미걸이(高陽松浦호미걸이)

작품/자료명
고양송포호미걸이(高陽松浦호미걸이)
전승지역
경기도 고양시
지정여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2호
구분
민속놀이
개요
호미걸이는 마지막 김을 매고 난 뒤 금년 농사는 끝났으니 내년에 대비하여 호미를 씻어 걸어둔다는 데서 유래한다. 호미걸이는 전라도에 '호미씻이'라는 명칭으로 고양의 송포 호미걸이와 비슷한 놀이가 존재하며, 호미걸이는 그 외 ‘낟알이’, ‘공굴’, ‘머슴놀이’라고도 불린다. 논농사는 두 차례 김매기를 하면 크게 손볼 일이 없고 우기도 지난 후라 그 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가늠하게 된다. 그래서 이때쯤 두레패에서 앞으로의 자연 재해를 막아 풍년이 들게 기원하고 그 동안의 지친 심신도 쉬게 하자는 의미에서 하는 놀이이다. 이 호미걸이는 전국의 농촌에 두루 존재했으며, 두레꾼들만의 놀이가 아니라 마을사람 모두가 한데 어울려 음식을 먹고 즐기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호미걸이는 음력 7월 5일부터 7월 7일 백중 사이에 열렸으며, 피땀 흘려 가꾼 농사가 기후가 순조로와 결실을 잘 이루어 풍년이 들게 해 달라는 기원의 의미와 여름 내내 농사를 짓느라 피곤해진 몸을 쉬며 노는 잔치의 의미이기도 했다. 고양 송포호미걸이는 1931년(신미년)을 마지막으로 전승이 중단되었다가 경기도 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재현하여 1985년 제4회 때 종합우수상, 1998년 제2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때 공로상, 1999년 제12회 경기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수상 등을 수상하였다. 1998년 4월 13일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흐름
송포 호미걸이는 한강 하류의 넓은 벌판 중심부이며 송포 가와지쌀로도 유명한 고양의 곡창 지대인 송포 대화에서 형성되었다. 이곳은 매년 여름에 주기적인 한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농사를 망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 당시만 해도 농사가 생활의 근간이었기에 이와 같은 재해를 막기 위해 자연히 신(神)에게 이를 의지하게 되었다. 또한 농사란 것이 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이런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앞으로 자연의 재해를 막고 심신의 피로를 풀기 위해 형성되었다.
내용
호미걸이는 산상제, 대동고사, 대동놀이, 유가제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①산상제 : 마을 중심의 야산인 도당산에서 마을의 수호신인 도당신에게 마을대표가 풍년을 기원하며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이 도당산의 큰 소나무인 도당나무 앞에 제사상을 차려 놓고 그 마을에서 제일 어른이 의관을 정제하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호미걸이가 시작된다. ②대동고사 : 대동고사는 마을 여자들이 함께 집안과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년을 기원하여 지내는 제사이다. 산상제 후에 놀이마당으로 내려오면 부녀자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낸다. 이때 입심 좋고 나이 많은 할머니가 덕담을 하고, 마을 여자들이 모두 함께 합장을 하고 반절을 하며 풍년과 무사하기를 빈다. ③대동놀이 : 대동놀이는 ‘기절받기’→’깃대재주 부리기’→’기쓸기’→’종기놀리기’→’조사놀리기’→무등타기’ 순으로 진행된다. 두레패는 형성된 시기를 중시하기에 어떤 경우라도 서로 만나게 되면, 선배 두레패의 기(旗)에 절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후 두레패가 풍물을 울리면서 두레패 중 가장 오래된 구(舊)두레의 기를 향해 온절을 하면, 구두레의 기는 반절로 답례하는 ‘기절받기를 (45도 각도로 한바퀴 돌아 반절함)’가 이루어진다. 그 후엔 자천타천으로 추천된 사람 중 가장 힘센 사람을 기수로 선발하는 행사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선발된 기수는 ‘깃대 재주 부리기’라 하여 기수에게 상품으로 주어진 필목 등의 상품을 몸에 감으면서 춤을 추고 깃대를 손바닥, 어깨 등에 올려놓고 춤을 추기도 하고, ‘기쓸기(절을 하는 두레는 땅 가까이 기를 눕혀서 세 바퀴를 쓸어서 절을 함)’ 등도 한다. 그리고 ‘종기 놀리기’, ‘조사놀리기(두레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을 깃대에 올라가 춤과 재주를 부림)’ 등을 행한다. 그 다음 ‘무등타기’를 하고 멍석으로 짜서 만든 소가 등장하면서 호미걸이 소리가 불리어지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춤마당을 이루면서 대동놀이는 절정에 이른다. ④유가제 : 두레패는 풍물을 울리면서 집마다 돌아다니는 유가제를 마지막으로 한다. 여기서 유가는 조선시대 과거급제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돌고 좌주선배친척 등을 찾아보는 것을 말하며 유가제란 여기서 따온 명칭이다. 이때는 두레패가 패를 이루어 가가호호 방문하여 그 집의 무사태평을 빌면 집주인이 나와 음식을 대접하고 그 마을의 집을 다 도는 것으로 호미걸이는 끝이 난다. 고양 호미걸이는 긴소리사두어양산도방아타령자진방아타령놀놀이자진놀이상사듸야훨훨이몸돌려 가락으로 이루어져 있고, 쾌활하고 명랑하고 동적인 가락을 이루고 있다. 또한 타지역이 장구, 북, 꾕과리, 징으로 구성되는데 반해 바라와 비슷한 '제금'이 하나 더 들어가 있다. 이 호미걸이는 40∼100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며, 송포 호미걸이 보존회의 경우 정식 회원 30~40명 정도가 직업으로나 취미 생활로 활동하고 있다.
전승자 정보
고양시는 한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어 논농사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한 연유로 고양시의 민속놀이는 두레를 중심으로한 농악놀이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농촌에 존재하던 호미걸이는 산업화 등에 밀려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7년 문화재 전문위원 심우성씨가 무형문화재 제19호 예능보유자 이창배 선생과 함께 고양시의 일노래인 호미걸이두레소리 전체를 녹음 채록하여 서서히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1984년 11월에는 '송포 호미걸이 보존회'가 구성되어 1985년 제4회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 종합 우수상을 차지하며 그 이름을 전국적으로 드높이게 되어 2002년 월드컵 행사에도 공연을 할 정도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현재 주교동에 위치한 호미걸이 보존회에서 정식회원 30,40명과 함께 한 평생 경기 민요와 송포 호미걸이의 맥을 잇기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동관 김현규씨와 계승자 최장규씨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고양송포호미걸이에서 악장으로 유명한 박영봉(朴永鳳) 선생은 농악에서 두레호적으로 등장한다. 고양의 호미걸이는 그 소리가락춤 등에서 경기도는 물론 전국으로 널리 알려진 민속놀이인데 이 두레농악에서 가장 중심되는 악기가 바로 호적이다. 처음 호미걸이가 시작되는 앞부분부터 제지내기, 대동놀이, 유가제에 이르기까지의 절정부분 그리고 다 함께 물러나오는 과정까지 호적은 농악의 필수요소가 된다. 1922년 당시 경기도 고양군 중면 마무리 115번지(현재의 일산구 일산2동 강촌마을)에서 태어난 고양지역의 토박이로 현재도 고양시 일산구 일산동에 거주하고 있다. 본래 같은 마을의 이성용 선생에게 15세부터 두레호적을 3년간 배워 20세부터 마을두레의 호적수로 참가하였다. 또 25세부터 이충선 선생에게 5년간 피리, 삼현육각을 배웠는데 긴염불, 반염불, 굿거리, 당악, 취타, 허튼타령, 길군악, 삼현도드리가 이것이며 굿판에서 연주되는 창부타령, 노래가락을 사사받기도 하였다.
이미지
<자료제공 (사)경기문화재단>
연계정보
· 관련도서 <경기민속지 Ⅲ 세시풍속놀이예술편>, 경기도박물관, 2000 <한국민속예술-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33년사>, 1992 <한국농경세시의 연구>, 김택규, 영남대학교출판부, 1985 · 관련사이트
관련사이트
경기문화유산_향토지적재산
관련사이트
디지털한국학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멀티미디어(전체6건)
이미지 6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