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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타기

작품/자료명
줄타기
전승지역
경기도 안성시
지정여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9호
구분
민속놀이
개요
줄타기는 '얼음'이라 부르기도 하고, 줄광대가 줄 위를 마치 얼음 지치듯 미끄러지며 나간다고 하여 '줄얼음타기'라고도 한다. ‘승도(繩渡)’, ‘주색(走索)’, ‘주상재(走上才)’라고도 부르며, 중국에서는 ‘승기(繩技), ‘도승(跳繩)’, ‘도백색(跳百索)’, ‘도승’, ‘고무항’, ‘희승(戱繩)’, ‘항희(恒戱)’ 등으로 불려 왔다. 공중에 맨 줄 위를 줄꾼이나 줄광대가 걸어다니면서 여러가지 우스개 소리와 재주를 보여 주는 놀이이다. 전통놀이 중에서 줄(繩)을 다루는 놀이는 ‘줄다리기(끌기)’, ‘그네뛰기’, ‘줄타기’가 있다. 그 중 줄타기는 줄다리기나 그네뛰기와 달리 전문적인 기교가 요구되므로 전문 놀이꾼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따라서 전국적 분포를 보이기보다 ‘나례도감(儺禮都監)’이 설치되어 있던 경기, 서울지방에 전승되고 있다. 줄타기는 중국 동한(東漢)시대부터 행해졌던 놀이로 중앙 아시아에서 전래되었다고 하나 분명치 않다. 신라시대의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연희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근거는 고려시대의 각종 자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고려사 고종(제23대, 1214~1259) 32년 4월 8일 팔관회때 놀았던 각종 재인들에 대한 자료와 조선 성종(1470~1494) 19년 3월에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은 “호화스런 놀이 차림과 몸도 가볍게 노는 도약, 승도(繩渡, 줄타기), 사자놀이 등이 갖가지 최고의 기예를 연희하였다”라고 기록하였고, 같은 시대 학자 성현은 “날아가는 제비와 같이 가볍게 줄 위에서 돌아간다”고 하여 조선시대의 줄타기는 국빈연희로도 공연되었으며, 그 수준 또한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줄타기는 관이나 민의 큰 잔치나 대동제, 단오 등의 행사 때 공연되었다. 당시에는 줄타기, 판소리, 죽방울, 땅재주, 판춤 등이 함께 공연되었으며, 마지막은 항상 줄타기가 장식하였다. 조선시대 줄타기는 순수하게 줄만 타는 ‘광대줄타기’와 남사당패의 놀이 중 하나인 ‘어름줄타기’ 두 계통이 있다.
흐름
우리 나라 줄타기는 단순한 몸 기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재담과 노래를 곁들인다는 점이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의 줄타기와 다르다. 때문에 줄판이 더욱 멋스럽고 흥겨울 뿐 아니라 줄타는 사람과 관객들이 함께 참여하는 놀이판을 이룬다는 점이 특징이다. 줄타기의 편성은 줄광대, 어릿광대, 삼현육각(三鉉六角) 잽이이다. ‘줄광대’는 주로 줄 위에서 놀고, ‘어릿광대’는 땅에 서서 재담을 하며, ‘잽이(악사)’들은 줄 밑 저편에 북장고목피리곁피리젓대해금 순으로 앉는다. 줄광대는 갖가지 재담을 섞어 가며 대가댁 부인이 화장하는 시늉, 성미 급한 여인이 화장하는 시늉, 군로사령 제비 후리러 가는 노래, 방아타령, 난봉가 등 여러 가지 잡가를 부르며 놀다가 줄타기 곡예로 들어간다. 우리나라 줄타기의 특징은 ①40여 종이 넘는 줄타기 기술의 다양성, ②고난이도 동작의 자연성과 화려함(허공재비와 같은 공중회전, 살판과 같은 뛰어넘기 등), ③화려한 기술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식과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풍부하고 익살스런 재담, ④동작, 재담, 음악이 어우러져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조화성 등이 있다.
내용
줄타기 순서는 상황에 따라 생략되기도 하지만, 기본 기술을 펼치며 동시에 악사와 재담을 나누기도 한다. 앞으로 걷기→뒤로 걸어가기→앞으로 종종걸음→뒤로 종종걸음→서서 돌아서기→앉아서 좌우로 돌기→닭의 홰 타기(줄 중앙에서 정면을 향하여 양 다리를 일자형으로 딛고 앉음)→닭이 홰 타고 좌우로 훑기(앉은 상태에서 좌우로 이동함)→외홍재비(왼발로 짚고 오른다리를 늘어뜨려 앉았다 일어섬)→외홍재비 풍치기(외홍재비 앉은 상태에서 오른다리를 줄과 평행하게 앞으로 뻗었다 내렸다 섬)→양다리 외홍재비(발 바꾸며 외홍재비 함)→쌍홍재비(양다리 사이로 줄을 끼고 앉았다 일어섬)→겹쌍홍재비(양다리 사이에 줄을 끼고 앉았다 무릎 꿇고 줄 위에 앉음)→옆쌍홍재비(줄옆으로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았다 일어섬)→옆쌍홍재비 풍치기(줄 옆으로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았다 무릎 꿇고 줄위에 앉음)→쌍홍재비 거중틀기(줄 옆으로 두 다리를 늘어뜨려 앉았다가 솟구쳐 180도 회전하여 방향바꿔 앉음)→외무릎 꿇기→외무릎 풍치기→외무릎 가새트름→외무릎 황새 두렁넘기→외무릎 훑기→두 무릎 꿇기→두 무릎 풍치기→두 무릎 가새트름→두 무릎 황새 두렁넘기→두 무릎 종종훑기→책상다리(줄 위에서 책상다리로 앉음)→책상 풍치기(책상다리 동작을 연속 4~5회 함)→책생 가새트름(책상다리로 솟구쳐 방향 바꿈)→책상다리 황새 두렁넘기(무릎 꿇고 줄걷기)→앞 쌍홍재비 뒷 쌍홍재비(선 상태에서 솟구쳐 공중에서 뒤로 한 바퀴 돌아 양다리 사이에 줄을 끼고 앉음)→칠보뭔장→앞칠보 뒷칠보(양다리 사이에 줄을 끼운 상태에서 앉았다가 일어선 후 다시 줄 옆으로 두 다리를 늘어뜨려 앉음, 뒷칠보는 같은 동작을 뒤로 가면서 함)→칠보다래치기(왼쪽으로 두 다리를 늘어뜨렸다가 솟구친 후 오른쪽으로 바꿔 앉기)→칠보거중틀기→허공재비(양다리 사이에 줄을 끼고 앉았다가 솟구쳐 방향바꿔 양다리 사이에 줄 끼고 앉기)→앵금뛰기(앵금발로 줄 건너기)→종줍굽 붙이기(줄 중앙에서 두 무릎 종줍을 줄에 붙이고 가로로 앉고 두 손은 앞으로 뻗음)→칠보 보십빼기→깃발 붙이기(오른손, 왼발 짚고 부채 옮기기)→배돛대 서기(부채를 입에 물고, 줄위에서 물구나무 서기)→살판(줄을 양다리 사이에 끼고 작수목을 보고 앉은 후 솟구쳐 반대편 작수목을 바라 본 상태로 줄을 양다리 사이에 끼고 앉는 최고난이도 동작, 이것을 잘 하면 살고 못 하면 죽는다 하여 살판이라 함)→얼음지치기(줄 작수목에서 땅과 연결된 줄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옴) 줄과 줄의 설치형태는 자연재료를 이용하여 설치한다. 줄: 재료는 삼(麻)이며, 줄의 굵기는 8분 정도이다. 줄은 삼을 절이어 몇 번이고 곱게 질기게 다듬어 새끼줄로 꼰 다음, 삼합으로 합쳐 꼬아 만든다. 작수목 : 길이 7m 정도의 네 개의 단단한 통나무를 각각 두 개씩 X 자모양으로 세운다. 작수목의 X자 모양 부분은 줄(麻繩)으로 동여 맨다. 말뚝 : 길이 2m 정도의 통나무 네 개, 작수목을 지주(支柱)로 하여 양쪽 각기 두 개의 말뚝에 줄을 단단히 맨다. 말뚝은 땅 깊히 사선으로 박는다. 재담사설 한 대목을 통해 ‘줄타기’연행의 흐름을 알 수 있다. 故 김영철 本(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 第29號-줄타기[繩渡], 文化財管理局, 1975 발췌) “여러분 원근을 불고하시고 할아버지, 할머니, 신사, 숙녀, 학생 여러분께서 이 장소까지 이렇게 많이 왕림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땅에서 춤도 추고 노래를 불러서 여러분들을 흥겨웁게 했지만, 김영철이 저는, 줄 우에서 여러 가지 재주를 피워 오늘 여기 오신 손님을 위로할 양으로 줄 우에 여기까지는 올라 왔습니다만은 이 쪽에서 저쪽 작수목까지 건너가야 할 터인데 , 가슴이 어째 얼떨떨하다. 그러하나 배우씨 염불 타령 떠쿵 부쳐 놓고 이쪽에서 저쪽 작수목까지 건너가는데 장이 어렵겠다. 쩌쿵!!(악공에게 장고를 치라는 줄꾼대사)” (줄군은 오른손에 부채를 펴 높이 들고 왼팔은 줄을 붙잡을 자세로 겁나는 표정에 눈을 크게 뜨고 허리를 굽히고 한 다리만 내딛고 벌벌 떠는 시늉을 함. 몇 번을 벼르다 두 다리를 앞으로 내디디다가 깜짝 놀래 도로 한다리를 뒤로 디디며 섰던 작수를 얼른 잡으며 겁을 낸다.) …중략… “어쨌든지간에 줄 잘 탄다! 그런데 저기서 여기까지는 여러분의 덕택으로 무사히 건너 왔으나 한번 건너오고 그만 두는 것도 아니고 또 건너 가야 할텐데 이거 큰일 났네, 또 한번 건너 가보겠다! 꿍!”(장단 계속된다) (줄꾼은 두번째 벌벌 떨며 간신히 줄 중간쯤에 갔을 때, 줄이 또 옆으로 막 흔들리는 데도 계속 걸어가다가 오른발이 헛디딛다가 빨리 도로 줄을 딛는다) …중략… (이때 줄꾼은 작수목에 서서 관객을 향해) "지금 줄탄 것만 보셔도 입장료 값은 벌써 뺏을 겁니다. 이번에는 어떤 재주를 하는고 하니, ‘엽쌍홍잽이’ 인데, 그것은 두다리가 옆으로 앉졌다 줄 탄력에 몸이 떠올라와 줄을 딛었다가 또 옆으로 앉는 것인데, 잘 옆으로 앉아야지 잘 못 앉어 헛 옆으로 앉아 저~ 아래로 내려가면 밑에 앉은 손님은 넙적한 떡이 될 것 같습니다. 줄 타는 저는 언제나 주의를 합니다만, 손님은 줄 밑에 앉으셨다고 마음은 놓지 마십시요." …중략… “이번에는 무얼하는고 하니 옛날 양반 노론 소론이라는 양반이 있었는데, 노론이라는 양반 걸음을 한번 걸어 보는데, 부채를 앞으로 뻗쳐 펴 든 채 걸음을 걸어 보는데, 노론양반은 이렇게 걸어 오겠다. 으험!”(눈을 부릅뜨고 기세가 당당하니 왼손은 허리에 얹고 갈지자로 걷는다) “그런데 이렇게도 걸었지만은 이번에 아낙네 걸음을 한번 걸어 보는데, 아낙네들이 여름에 모시치마에다 풀을 너무 많이 먹여서 앉았다 일어나면 치마 뒤가 벌렁 올라 붙겠다. 얌전한 부인은 치마 뒤가 올라왔던 안 올라왔던 치마 뒤를 두 손으로 몇 번 쓰다듬어 내리고 치마자락을 한쪽으로 싹~여며 한 손으로 치마자락을 잡고 얌전스럽게 걷는데, 이렇게 걷겠다” “또 이번에는 수다스럽고 부지런하고 밤에는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모르지만 낮잠만 디렀다 자는 부인이 있지요. 왜 다 잘 아실겁니다. 그런 부인은 걸음을 걷는데 호마궁뎅이만한 궁뎅이를 조금도 용서없이 내두르며 냅다 걸어 가는데 김영철이 줄꼭대기서 궁뎅이 내두르는 것과 똑같이 내 흔들며 달아나는데 야단스럽게 건너 간다. 이 부인이 길 걸을 때 궁뎅이를 내둘렀으니까 아무 사고도 없지만 만약에요 우에서 궁뎅이를 그렇게 몹시 내둘렀으면 누구 하나 죽든 살든 무슨 일이 났을 겁니다.” (줄꾼 작수목에 서서) “지금 제가 한 말은 여러분과 같이 웃자고 한 김영철이의 재담이고, 제가 고전 줄타기로 여러분들을 잠시나마 위로했습니다만, 우리 일행이 여기서 여러날 여러분을 모시게 됐으니 널리 널리 선전하셔서 많이 왕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바빠서 못 오시겠으면 저~기 저 앞에 표 파는데 오셔서 돈만 내놓고 그냥 가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이번에 귀지에 와서 여러분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며칠 후엔 다른 데로 갑니다. 뵙지 못하는 그 사이라도 고령에 계신 분께서는 만수무강하시고 젊은 분들은 사업에 성공하시어 김영철이가 또 이 고장에 찾아올런지는 모르겠으나, 일 후에 한 번 더 올 때는 이번에 사랑해 주시든 마음 변치 마십시요. 장단 몰아 놓고 끝으로 더 한가지 위로하며 내려 가겠습니다.” (줄꾼이 끝으로 하는 재주는 5~6가지를 연속해서 한 후, 높이 떴다 사뿐히 줄을 딛고, 줄 뒷목으로 어름 지치듯이 한번에 미끄러져 내려온다.).
전승자 정보
지금까지 밝혀진 줄타기 연혁은 200여년 전 영정조시대의 김상봉(金上峯)을 필두로 최상천(崔上天), 그리고 2代인 김관보(金官甫)와 이봉운, 그 후 배출된 뛰어난 재인이었던 이동안(李東安), 김영철(金永哲), 김봉업(金奉業), 임상문(林尙文), 이정업(李正業), 오돌끈(吳돌끈) 등이 있었고, 여성 줄꾼으로 임명옥, 임명심, 정유색, 전봉선, 한농선 등이 줄타기 명인으로 활약하였다. 현재 줄타기의 명맥을 잇고 있는 사람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된 김대균과 경기도지정 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조송자이다. 김대균은 9살 때 처음으로 줄 위에 올라 30여 년이 넘도록 줄을 탔다. 줄타기 기예를 전수해주었던 스승은 故 김영철(金永哲)이다. 조송자(趙松子)는 남사당에서 창(唱)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조송자가 어렸을 때, 어느 날 집에 스님이 찾아와 “이 집에 있는 딸은 걸음을 걷게 되면 집에서 내보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의논하여 딸에게 줄타기를 시켰다고 한다. 8세 때 손만대(경기도 안성)에게 2~3개월 배우다가 아버지(조길환)에게 배웠다.
연계정보
· 관련도서 <韓國民俗考>, 日新社, 宋錫夏, 1959 <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 第29號 - 줄타기(繩渡)>, 文化財管理局, 1975 <민속놀이>, 김광언, 대원사, 1989 <남사당패연구>, 신우성, 동화출판공사, 1974 <한국가면극>, 이두현, 문화재관리국, 1969 <경기문화를 빚는 사람들>, 경기도, 2001 · 관련사이트
용어해설
팔관회(八關會) : 태조의 십훈요(十訓要) 제6항에 의하면 팔관회의 대상은 천령(天靈:하느님)과 용신(龍神:山川神靈)이었다. 고려의 역대 왕은 모두 이 팔관회을 열었으며, 이 고려민의 하느님 관념은 고려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예식에는 소회일(小會日)과 대회일(大會日)이 있는데, 대회 전날인 소회에는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가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고 궁중 등에서는 하례를 받고 군신의 헌수(獻壽), 지방관의 축하 선물 봉정 및 가무백희(歌舞百戱)가 행해졌다고 한다. 이 의식은 고려 500년을 통하여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으나 고려 말기까지 국가의 최고 의식으로 계속되었다. 연등회(燃燈會) : 고려 때부터 지내던 불교법회. 소회일(小會日:음력 1월 14일)과 대회일(大會日:정월 대보름)이 있어, 왕궁서울시골 할 것 없이 채붕(綵棚)을 설치하여 불을 찬란하게 밝히고, 주과(酒果)와 음악가무백희(歌舞百戱)로 대축연(大祝宴)을 베풀어 제불(諸佛)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즐겁게 함으로써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던 제전이다. 고려 태조 때부터 매년 정월 보름날에 행하다가 1010년(현종 1)부터는 음력 2월 15일로 변경되었다. 1352년(공민왕 1)부터는 4월 초파일에 궁중에서 연등회를 열어 궐내에서 100명의 승려에게 공양하였는데, 이 풍습은 조선시대에 전승되어 건국 초부터 연등회를 열었다. 이 불사(佛事)는 815광복 후 다시 성행하게 되어 매년 석가탄신일에는 전국 각처의 사찰들이 중심이 되어 연등회와 연등행렬 등의 행사를 벌인다. 나례(儺禮) : 대나(大儺).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邪神)을 쫓아낸다는 뜻으로 베푼 의식이다. 고려조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해져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민간에서는 섣달 그믐날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악귀는 굉음에 놀라서 달아난다 하므로 그믐날 밤에 마당에 불을 피우고 폭죽을 터뜨렸다. 조선시대에는 나례가 악귀를 쫓아내는 일 외에도 칙사의 영접, 왕의 행차, 감사의 영접 등에 광대의 노래와 춤을 곁들여 오락으로 전용되었다. 나례 가운데 처용무는 악공과 기녀가 맡고, 곡예희학지사(戱謔之事) 등은 재인(才人)이 담당했는데 여악(女樂)까지 동원되었다. 이것을 잡희백희나희라 하였다. 산악백희(散樂百戱) : 산악백희의 주요한 놀이는 대개 씨름을 이르는 각저희(角抵戱)가 대종을 이루고 있고, 그 밖에 역기(力技)장대타기[尋용]공놀리기[弄丸:跳丸劍]줄타기[走索]칼물기[呑刀]불토하기[吐火]등이다. 중국에서 이르는 산악(散樂)이란 정칙적(正則的)이 아닌 산잡(散雜)한 악(樂)이라는 뜻으로,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 골계희(滑稽戱)모의재(模擬才)환술(幻術)기기곡예(奇伎曲藝) 등을 음악반주로써 연출하는 일종의 원시적 경극잡희(輕劇雜戱)를 범칭하는 이름이며, 달리 백희(百戱)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이들을 한데 묶어서 산악백희라고 하였다. 나례도감(儺禮都監) : 나례는 고려 정종 이후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악귀를 쫓기 위해 행해 왔다. 나례도감은 조선 초기부터 둔 것으로 나례가 끝나면 폐지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상설기관으로 나례청(儺禮廳)을 두고 업무를 맡도록 하였으나, 인종 때 나례의 폐단을 지적하고 나례청을 혁파하였다. 그 뒤에 때때로 나례를 행하고자 할 때는 관상감(觀象監)에서 맡아 하였다. 나례 출연자로는 나례청에 소속된 배우광대수척(水尺)중[僧]재인현수재인(絃首才人)백정(白丁) 등이 있는데 이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받았다. 나례의 공연 장소는 야외인 경우는 무대장치를 하였고, 궁중에서는 인정전(仁政殿)사정전(思政殿)명정전(明政殿) 등에서 행하였다. 그리고 윤거(輪車)라는 수레를 몇 개씩 이동해서 나례를 하였다. 오늘날의 나례는 화려하지 않은 민속예술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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