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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백중놀이

작품/자료명
연산백중놀이
지정여부
김용근(의식, 장구), 김정수(의식, 꽹과리)
구분
민속놀이
흐름
연산백중놀이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일대에서 음력 7월 15일 백중날에 고된 농사일을 해오던 머슴들이 휴가를 얻고 흥겹게 놀던 민속놀이로 조선 성종 때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의 업적을 기려 백중날 그의 생가가 있던 왕대리와 인근 마을에서 묘에 참배한 뒤 한바탕 놀았던 것이 이후 광산 김씨들이 연산면 일대로 옮겨오면서 연산장터에 모여 놀이를 벌였다고 전해진다. 한때 연산백중놀이는 전국의 한량들까지 모여들 만큼 성행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그 비용을 광산 김씨 친가에서 전담했기 때문에 집안의 간장, 된장이 바닥나고 인근에서 모은 멍석 80여 장이 부족했다고 한다. 애초에 머슴들을 위안하기 위해 시작했던 백중놀이는 풍요를 기원하는 농신제를 비롯하여 농사일을 하면서 다치지 않기를 기원하고 효자, 효부, 농사를 잘 지은 노비를 표창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랫동안 연산 지역에서 전승되던 이 놀이는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전승되어 오다가 1942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어 그 맥이 끊어지는 듯 하였다. 이후 1942년 연행 당시 전수자로서 유일하게 생존한 김복수씨, 현재 연산백중놀이 기능보유자인 김용근씨와 고양리, 표정리, 관동리, 백석리 등의 주민들에 의해 전승이 중단된 지 47년 만인 1989년에 발굴, 재현되었고 1991년에 충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내용
예전부터 매년 음력 7월 15일, 즉 백중일 또는 망혼일에는 머슴이나 일꾼들을 하루 쉬게 해주고 주인집에서는 머슴들에게 새옷 한 벌과 돈을 주었는데 이 돈을 백종돈이라 하였다. 절에서는 스님들이 새로 나온 곡식과 과일 등을 차려놓고 재를 올려 부처에게 공양하였으며, 농촌에서는 이 날을 전후하여 “백종장” 이라는 장이 서고 마을이나 장에서는 씨름판 등 각종 민속놀이도 펼쳐졌다. 이렇게 하루를 즐기는 날을 머슴날이라 하였다. 연산백중놀이는 바로 이때 하던 놀이이며, 두마면 왕대리를 중심으로 연산면 일대에서 전승되어왔다. 백중놀이는 왕대리를 비롯한 27개 마을에서 인원이 동원되었는데 각 마을마다 두레의 우두머리격인 좌상이 있었고 도좌상의 지휘하에 모든 의식이 진행된다. 도좌상기는 쌍룡기, 지역좌상기는 청룡기, 황룡기로 표시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백중일이 되면 총좌상인 왕대 1리를 비롯하여 왕대 2리(은동), 두계 1리(팥거리), 두계 2리(구로실), 입암(선바위) 4개 마을에서 지역 좌상 1명 씩이 인솔하여 마을기, 영기, 용기, 농기, 오방기, 장나팔, 태평소 등의 순서로 하여 총좌상의 마을인 왕대리에 집결한다. 마을기는 각 마을 대표하는 것이며, 백중놀이에는 27개의 마을 기를 포함하여 모두 45개의 깃발이 사용된다. 1942년에 마지막 백중놀이가 열릴 때 사용했던 용기는 광산 김씨 종친회에서 보관중이며, 8·15 광복 후까지도 연산면 관동리와 임리에 용기가 보관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실된 상태이다. 기수와 풍장꾼들은 전립을 쓰고 농악을 치며, 농군들은 호미, 삽, 낫 등의 농기구를 가지고 마을마다 짚 3단씩을 지게에 짊어지고 청황 등을 들며 여자들은 농신제에 쓰여질 떡과 제물을 들고 각 지역 좌상들을 따라 간다. 총좌상기에는 쌍용이 그려져 있고 지역 좌상기에는 한 마리의 용이 그려져 있는데 지역 좌상기는 총좌상기인 쌍룡기 앞에 마을별로 정렬한다. 지역 용기는 구령에 따라 순서대로 쌍룡기에 두 번씩 절을 하고, 쌍룡기는 지역 용기목에 백색의 긴 수건을 달아준다. 이것은 백중놀이에 합류해도 좋다는 화합의 뜻이 담겨져 있다. 상견례 의식이 끝나면 신장대 모양으로 만든 농신대에 오곡 주머닐 4개를 묶고 짚단을 한데 모아 세우고 새끼줄로 묶은 다음 상 중앙에 농신대를 꽂는다. 이때 부녀자들은 제상을 차리고 쌍룡기를 비롯한 각종 기를 병풍처럼 둘러 세운 뒤 지역 좌상들이 제관이 되어 축문을 낭독하여 농신제를 지낸다. 농신제 의식이 끝나면 농신대에 불을 질러 태우는데 이것은 액운을 소멸시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농사를 지을 때 각종 농기구에 부상을 없애달라는 액막이 노래를 부르며 농기구를 불에 넣는다. 이 때 액운풀이 농악을 같이 치고 액막이 굿을 한다. 액막이 굿이 끝나면 불효자에 대한 벌을 주는데 불효자를 쌍룡기에 묶어 징벌한다. 이어서 그 해 농사를 가장 잘 지은 머슴을 마을별로 한 사람씩 선발하여 총좌상은 상품으로 백미 7말씩을 주고 선발된 머슴들을 소등에 태운다. 이 때 소가 없으면 농군들이 기마전식으로 어깨에 태워 선소리군의 소리에 따라 농요를 부르는데 농군들과 아낙네들은 장단에 맞추어 호미, 삽, 낫, 지게춤 등을 추며 머슴놀이가 진행된다. 머슴놀이가 한창 진행되면 구경하던 양반들이 흥에 못 이겨 놀이에 뛰어들어 양반춤이 시작되는데 이때 머슴놀이는 중단하고 풍장꾼들은 양반춤에 장단을 쳐준다. 양반춤이 끝나면 풍물놀이가 시작되는데 용기놀이, 쩍지기굿, 칠채굿, 청·황 등놀이, 두레굿, 오방진굿 등을 치면서 200여 명의 농군들은 함성과 함께 화합을 다짐하면서 백중놀이가 모두 끝나게 된다. 연산백중놀이의 전체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길놀이 참가하는 일행이 4개 군으로 나누어져 쌍룡기는 본부석 맞은편에 3개 군은 각각 전, 좌, 우에서 농악과 함께 입장한다. ② 기싸움 용기를 들고 입장하던 3개 군이 상대방 용기가 서로 인사를 하라고 함성을 지르다가 기싸움이 벌어진다. 기를 먼저 넘어뜨리는 편이 승리하게 되며, 진 편에서는 앉아서 억울함을 통곡하는데 이를 목격한 도좌상이 나팔소리로 싸움을 진압시킨다. ③ 기세배 기싸움이 끝나면 도좌상이 이끄는 쌍룡기의 마을이 나팔을 불면서 입장하고 용기 마을들은 기수를 숙여 기세배를 올린다. ④ 농신제 풍물과 주민들이 기를 사이에 두고 멍석말이를 말고 풀면 기가 뒷편으로 물러나고 그 가운 데 제단을 설치하여 농신제를 지낸다. ⑤ 상벌마당 농신제가 끝나면 효자효부를 표창하고 불효자(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황말성이라고 함)를 징벌한 후 상머슴을 상을 준 후 머슴놀이 마당이 벌어진다. ⑥ 뒷풀이 머슴놀이가 끝나면 수상쇠의 인솔로 농악이 앞장서고 기를 가운데로 하여 에워싼 가운데 뒷풀이가 열린다.
전승자 정보
연산백중놀이는 1989년에 발굴, 재현되었는데, 이 때 큰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현 기능보유자 김용근씨(75세)이다. 김용근씨는 1988년, 공직생활을 마치고 고향의 전통에 관심이 있어 마을을 찾아다니다 연산백중놀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왕대리에서 광산 김씨 재실에 보관되어 있던 용기와 농대를 찾아냈고, 두마면 왕대리의 김흥수(고증당시 69세), 김복수(당시 73세)와 연산면 청동리의 김학수(당시 78세), 연산면 한전리의 김광수(당시 68세) 씨의 고증을 받았다. 이후 지금까지 연산백중놀이를 외부에 알리고 전승하는데 힘쓰고 있다.
관련도서
<한국민속대사전>, 한국민속사전편찬위원회, 민족문화사, 1991 <충남의 향토축제>, 전국문화원연합회 충남지회, 1998
농신제
농신제는 유두(流頭)날에 지내는 고사로 물꼬고사, 용신제라고도 하는데, 지방마다 차리는 음식이나 지내는 형식이 약간씩 다르다. 산간 지방에서는 찰떡을 하여 논의 물꼬 밑과 논둑 밑에 떡을 한 덩이씩 놓는다. 무주 지방에서는 유두날 부꾸미를 송편처럼 소를 넣은 떡을 하여 새벽에 논에 가서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농기뺏기
기싸움이라고도 하며, 지방에 따라서는 농기맞이 행사 때에 연행되기 때문에 농기싸움이라고도 한다. 각 마을의 풍물패가 서로 상대 마을의 풍물패에게 농기세배를 재촉하다가 드디어 단합된 힘으로 싸우게 되는데, 어느 쪽이든 상대편의 농기를 빼앗는 쪽이 이기는 놀이이다. 들에서 농기뺏기를 할 때에는 논일을 하다가 일이 다 끝나고 해질 무렵에 이쪽 패에서 북을 세 번 치면 저쪽 패에서도 북을 세 번 치며 농기를 흔든다. 이쪽에서도 농기를 흔들면 농기뺏기가 시작되는데 소리를 지르며 상대편 농기를 쓰러뜨리고 농기에 꽂힌 꿩털이 달린 상부를 꺾으면 이기는 것으로 한다. 지방에 따라 이긴 편 마을의 논물을 대어주는데 우선권을 주기도 하며 이긴 편 풍물패에게 술을 내기도 한다.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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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논산방송국_민속놀이_연산백중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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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이야기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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