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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뱅이굿

작품/자료명
배뱅이굿
지정여부
이은관(배뱅이굿)
구분
무속의례
흐름
배뱅이굿은 서도지역을 대표하는 연극적인 굿놀이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전승되었다. 배우 한 사람이 등장하여 여러 사람의 역을 맡아 창을 불러 새신초혼(賽神招魂)하는 배뱅이굿을 이르러 서도판소리라고도 하였으며, 남도 판소리는 이런 서도판소리가 모태가 되어 발전했다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배뱅이굿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나오는 동윤설화(洞允說話)와 같은 근원설화가 밑바탕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굿판에서 행해지는 무극인 ‘동이기밀’이 배뱅이굿으로 발전했다는 설,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대본을 써서 당시 용강의 소리꾼 김관준에게 창을 하도록 한 것이 배뱅이굿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분명한 것은 평남 용강의 소리꾼 김관준이 배뱅이굿을 불렀다는 것이며, 따라서 조선시대 영, 정조 이래 구전되던 것을 김관준(金官俊)이 개작하여 아들 김종조(金宗朝)가 계승한 것이 시작이라는 것 정도로 상정할 수 있다. 그 후 김종조의 동료인 최순경(崔順慶), 이인수(李仁洙) 등이 부르면서부터 널리 전파되었으며, 김종조의 소리는 장수길, 김용훈, 김경복, 김성민 등에게 전승되었다. 현재 배뱅이굿의 기능보유자인 이은관은 이인수의 제자로 그는 배뱅이굿을 남한 지역에 널리 알린 사람이다. 한편 황해도 재령 출신의 양소운은 봉산탈춤의 사당, 미얄, 무당 분야 기능보유자이며, 배뱅이굿을 전승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문창규의 소리를 이어받았다고 하는데, 문창규가 누구에게 소리를 이어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요즘 불리는 배뱅이굿은 1894년 갑오경장 훨씬 이후의 것이라고 추측된다.
배뱅이굿의 내용
창본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현재 불리는 배뱅이굿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숙종 때에 경상도 태백산 아래 9대째 내려오는 무당 최씨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해 나라에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과거를 보게 하였으므로 그도 이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경상감사 벼슬을 받았나 부임 얼마 후에 무당임이 탄로나 쫓겨나게 되자 황해도로 가서 최정승으로 행세하며 그곳에 사는 김씨와 이씨 두 정승과 결의 형제를 맺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모두 혈육이 없어서 어느 날 세 사람은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하여 각각 딸 하나씩을 낳았는데 최정승은 딸의 이름을 백의 백갑절이라는 듯으로 배뱅(百百)이라고 지었다. 이 셋은 어느덧 자라서 처녀가 되었는데 하루는 최정승의 집에 들린 금강산 어느 절에서 나온 탁발승에게 배뱅이가 반하여 그를 벽장에 숨겨 두고 함께 지냈다. 얼마 뒤 중은 ‘가서 머리를 길러 오겠다’고 기약하고 떠난 다음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탁발승을 기다리다 지친 배뱅이는 끝내 상사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배뱅이의 부모는 딸의 넋이나마 불러보고 싶어 이를 이루어주는 사람에게 재산의 절반 나눠주겠다고 하였다. 팔도의 이름난 무당들이 모였지만 아무도 넋을 불러오지 못하였는데, 평양에 사는 한 건달이 그 동네 탁주집에 나타나 배뱅이의 내력을 다 알아낸 뒤 능청스러운 울음과 넋두리로 배뱅이 부모를 혹하게 하였다. 이에 그가 배뱅이의 혼수감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재물을 얻어가지고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배뱅이굿의 양식적 특징
배뱅이굿은 무당굿놀이의 방식을 차용한 광대굿놀이이며, 실제 종교적인 굿이 아니라 그것을 모방하고 응용하여 거짓으로 꾸민 굿이다. 배뱅이굿은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발전한 관계로 이 지방의 가락인 수심가토리가 그 중심적인 가락을 이루고 있다. 수심가토리는 대개 위에서부터 질러내는데, 위의 음은 흘러내리고 가운데 음은 심하게 떨며 아래 음은 곧게 뻗는 특이한 선율진행을 보여준다. 이 소리를 느릿하게 부르면 구슬픈 느낌을 주게 된다. 서도소리 가운데서도 평안도에서는 수심가가 유명하고 황해도에서는 난봉가와 산염불이 유명하다. 배뱅이굿의 가락은 수심가가 주된 가락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구성되지는 않으며, 서도소리 전체를 재료로 하고 경기, 강원, 함경도의 민요와 잡가 등을 사이사이에 넣기도 한다. 또 양소운이 부른 배뱅이굿에는 전라도의 육자배기토리가 약간 섞여있기도 하다. 배뱅이굿은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는 형태로 한 사람의 창자가 오른 손에 부채를 들고 장고와 징의 반주에 맞추어 아니리와 창을 한다. 반주자와 관객들은 남도 판소리의 경우와 같이 추임새를 넣어 창자의 소리를 돕거나 흥을 낸다.
이은관(1917~)
배뱅이굿 기능보유자는 이은관 옹으로 소리꾼 김관준의 배뱅이굿을 이은 이인수 명창에게서 서도민요와 배뱅이굿을 배웠고 최경식에게서 시조창을 익혔다. 이은관은 17~18세 무렵부터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당시에는 직접 선생을 찾아 학습한 것은 아니고 레코드판으로 최경식과 김종조의 배뱅이굿 레코드판을 들으며 소리를 배웠다. 그 후 스승을 모시고 소리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황해도 황주 권번에 소리선생으로 있던 이인수선생을 찾아가 그에게서 배뱅이굿을 비롯 ‘공명가’, ‘초한가’, ‘배따라기’ 등과 같은 서도소리를 빠짐없이 배웠다. 이은관은 이인수 뿐 아이라 최경식 문하에서도 소리공부를 계속하여 경기민요와 시조를 사사하였고, 1940~1945년경에는 당대 유명했던 신불출씨가 이끌던 극단 "신불출 일행" 에 입단하여 음악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신불출 일행에서 한 공연으로 유명해진 이은관은 ‘배뱅이굿’이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하였으며, 꾸준히 제자들을 가르치며 활동하던 중 198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의 배뱅이굿 기예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양소운(1924~)
북한 최고예술인 김진명에게서 서도소리를 익혔고, 장양선으로부터 춤을, 유정철에게서 남도창과 가야금을 배웠다. 봉산탈춤 기예능보유자이나 배뱅이굿에도 소문난 예술인이다.
관련도서
<한국민속대사전1>, 한국민속대사전 편찬위원회편, 민족문화사, 1991<한국전승연희의 원리와 방법>, 서연호, 집문당, 1997<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 17(144호~161호)>, 성경린·이보형, 문화재관리국, 배뱅이굿
어우야담(於于野談)
조선 광해군 때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 1559년∼1623년)이 지은 한국 최초의 야담집(野談集)으로 흔히 민간에 유포된 음담패설이 아닌 풍자적인 설화와 기지 있는 야담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조선 중기 설화문학의 좋은 자료이다. 왕실 귀인에서 상인, 천민, 기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의 삶과 시문에 얽힌 사연 꿈, 귀신, 풍속, 성에 관한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기록한 설화문학이다. 원본은 한문본(漢文本)이지만 번역되어 널리 퍼졌다. 한문본은 5권 1책으로 되어있는데, 권 1은 인륜편, 권 2는 종교편, 권 3은 학예편, 권 4는 사회편, 권 5는 만물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육자배기토리
전라도와 충청도 서부지방 민요와 경기도 남부, 충청도 서부, 전라도, 경상도 서부지방 무가의 선율에서 나타나는 음악어법을 총칭한다. 일명 육자배기조, 남도민요조라 하며, 판소리와 산조에서는 계면조라 한다. 민요 가운데 육자배기토리로 된 것은 육자배기, 자진 육자배기, 흥타령, 개구리타령, 강강술래, 농부가, 진도아리랑, 둥당개타령 등이 있다. 선율은 미, 솔, 라, 시, 도, 레로 구성되며 미에서 떠는 목을, 시에서 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꺾는 목을 쓴다. 미나 라도 곡을 마치며 흔히 라가 많이 사용된다. 민속 기악곡에서는 육자배기 토리의 허튼가락으로 연주하는 것을 시나위라 하며, 이 외에 무가와 살풀이 춤의 반주, 풍물의 호적가락, 퉁소나 단소 가락에 두루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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