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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차전놀이

작품/자료명
안동차전놀이
지정여부
이재춘(차전)
구분
민속놀이
흐름
안동지역에서는 동채싸움이라고도 불리며, 수레바퀴 형태와 같고 동채와 더불어 한 무리가 전체를 움직이는 형상의 놀이이기 때문에 공통의 뜻을 지닌 차전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안동차전놀이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몇 가지 기원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 기원전설과 연관된 기록 자료들이 전해오고 있다. 설화 가운데 차전놀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삼국통일을 위해 신라를 침략하고 그 여세로 안동까지 진격하였을 때 성주(城主) 김선평(金宣平), 형관(刑官)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 등 세 사람이 고려 왕건을 도와 견훤군을 물리쳤다. 이 세 사람은 견훤이 지렁이의 화신임을 알고 많은 소금을 낙동강 물에 푼 뒤 군민 전체가 단결하여 인해전술로 견훤군을 강물로 밀어붙여 참패하게 하였다. 안동에서의 전투 승리로 왕건은 고려를 창건하였고 위의 세 사람은 개국공신으로 태사에 봉해졌다. 그 후 안동 사람들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차전놀이를 전승하여 왔다.다른 전설에는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패한 왕건이 고창(古昌 : 당시 안동의 지명)으로 후퇴하자 견훤이 추격하여 또 한번 왕건의 군대에 타격을 가하였다. 왕건이 고창 성내로 패주하여 성주에게 도움을 청하여 성주 김선평이 권행, 장길과 함께 왕건의 군대에 가담하였다. 서로 대치한 상태에서 겨울을 난 뒤의 어느 날 견훤측 진영에서 주막을 하고 있던 안중노파의 도움으로 견훤의 군사들이 술에 취하게 한 뒤 기습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고 견훤은 도주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왕건이 고려를 창건하고 삼장군을 건국공신으로서 태사에 봉하였다. 승리 후 삼태사는 군민들의 전공을 치하하고 승전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때 전투에 공이 컸던 등짐 장수들이 흥에 겨워 우두머리를 올려 태우고 “월사 덜사”하고 승전가를 부르며 서로가 밀면서 뛰어 놀았다. 이것을 본 군민들이 등짐 장수들의 쪽지게를 본 따 놀이기구를 만들고 양편으로 나누어 덕망 있는 사람을 태운 뒤 놀이를 하면서 전승을 기념한 것이 차전놀이의 효시라고 하였다. 차전놀이의 유래에 대한 또 다른 전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후백제의 왕 견훤은 본래 지렁이였는데, 사람이 되어 안동에 왔기 때문에 안동 사람들이 이 지렁이를 몰아내기 위해 소금 배를 풀어 낙동강 물을 짜게 만들고 안동 읍민이 모두 나와 팔짱을 끼고 어깨로 지렁이를 밀어 강물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지렁이는 짠물에 들어가 곧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안동 사람들은 지렁이를 떠밀 때처럼 떼지어 차전놀이를 하였으며, 놀이를 할 때는 손을 쓰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어깨로 서로 밀어낸다고 한다. 이들 이야기의 공통점은 견훤의 침입과 안동 사람들의 응전 및 격퇴 그리고 차전놀이의 기원이라는 동일한 내용 전개라는 점이다. 차전놀이의 기원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위의 이야기들이 전승되고 있어서 민간기원론으로 자리잡고 있다. 민간기원론은 사실여부와는 상관없이 전승집단에게 진실로 수용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것에 입각하여 차전놀이와 연관된 그들의 사고와 행위의 방향을 결정한다. 또 전설상의 병산전투의 경과와 관련된 지명이 곳곳에 나타나기 때문에 전설에 대한 믿음을 더해주고 있다. 실제로 안동차전놀이가 어떤 기원을 가지고 있냐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정월대보름이라는 새해맞이 축제 공간에서 안동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대동놀이로서 오랜 세월 전승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안동차전놀이는 조선 중기에 이 놀이의 정신을 가상히 여기고 이것의 영속을 위하여 도의적 규칙을 만들고 동서부로 나누어 싸우게 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안동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던 차전놀이는 1922년 일제의 억압으로 중단되었다가 1966년에 참가한 제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당시 안동중학교의 고 박순호 교장의 노력으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고 이후 안동고등학교에서 전승이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9년 1월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으며, 1986년 사단법인 안동차전놀이 보급회에서 안동차전놀이보존회로 단체명을 변경하였다. 문화재 지정 당시의 기능보유자는 김명한이었으며, 현재는 1991년에 보유자 인정을 받은 이재춘씨가 전승에 힘쓰고 있다.
내용
차전놀이는 줄당기기와는 정반대 현상의 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줄당기기가 상대편을 힘으로 끌어와야 이기는 것이라고 하면 차전놀이는 상대편을 힘으로 밀어내거나 동채를 찢거나 땅에 떨어뜨려야 이기는 놀이이다. 차전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동부와 서부로 편을 나누었는데, 그 기준은 읍내를 가로지르는 안막천이었다. 경계를 기준으로 그 동쪽에 속하는 읍민을 비롯하여 임동, 길안, 임하, 남선 사람들이 동부, 그 서쪽에 속하는 읍민을 비롯하 풍산, 풍천, 북후, 서후의 사람들이 서부편이 되었다. 이러한 편가르기 원칙은 출신지별로 자기편을 정하는 관행을 갖게 되었는데 즉, 어떤 사람이 동부지역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원래 서부에서 태어났거나 살던 사람이라면 서부편으로 참가하게 된다. 이에 따라 부자(父子)나 부부관계에서도 편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차전놀이는 정월대보름에 행해졌으며, 대개 대보름 당일에 행해졌으나 사정에 따라서는 뒷날로 미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 차전놀이가 해마다 행해진 것은 아니었고, 줄당기기가 행해지는 해에는 차전놀이를 하지 않고 차전놀이를 하는 해에는 줄당기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놀이의 준비과정이 줄당기기가 훨씬 복잡하고 경비도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줄당기기에 비해 차전놀이가 보다 자주 행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차전놀이를 행하는 장소는 낙동강변에서 이어지는 백사장과 논밭이었으며, 지금의 기차역에서 태화동 서악사에 이르는 넓고 긴 공간이었다. 안동차전놀이가 행해지는 절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싸움
싸움 당일이 되면 놀이장소에 사람들에 아침부터 모여든다. 각 편에서는 면부에서 오는 우군을 모았다가 정오가 넘으면 앞놀이를 할 때 사용하던 작은 동채에 사람을 올려 태운 채로 속속 모여들어 같은 편끼리 머리꾼 싸움을 하는 등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오후가 되어 양편의 동채가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 수천의 군중은 함성을 지르며 환호성을 보낸다. 차전놀이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도 앞놀이를 중단하고 함성을 지르며 자기 편 동채를 향하여 달려가서 진용을 갖춘다. 싸움이 시작되면 먼저 머리꾼들의 밀백이가 격렬하게 전개된다. 양편은 밀고 밀리는 접전을 오랜 시간동안 계속하며, 밀백이가 워낙 격렬하여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이다. 동채 위에 올라 탄 대장은 워낙에 사람이 많고 소란스러워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므로 약속된 수신호를 이용하여 지휘한다. 양편은 서로 상대방에게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고 보다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앞 뒤, 좌우로 움직이며 주위의 사람들은 열렬하게 자기편을 응원한다. 머리꾼의 싸움이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우세로 흘러가면 승기를 잡은 쪽에서 상대방의 동채로 진격하여 동채를 잡아채서 땅에 떨어뜨린 뒤 갈가리 해체함으로써 승부가 결정된다. 그러나 싸움이 백중세로 이어질 때는 양 편의 대장들은 머리꾼 싸움의 동향을 봐 가며 기회를 노린다. 접전 끝에 아군이 우세하여 적의 동채를 점령하면 동채가 땅에 닿기 전에 동채의 방석과 결박 줄을 제거하고 동채를 산산이 뜯어버린다. 이긴 편은 함성과 함께 신고 있던 짚신을 하늘에 던져 올리며 승리를 자축하고 뜯어낸 동채의 부품을 여러 패가 나뉘어 울러 메고 “월사! 덜사!”하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밤늦도록 읍내를 돌아다닌다. 차전놀이는 안동 외에도 경기도 가평지역과 강원도 춘천지역에서 행해졌다는 <동국세시기>의 기록이 있으며, 차전놀이와 같이 정월 대보름에 집단의 힘으로 승부를 가리는 놀이는 줄다리기, 고싸움, 쇠머리대기 등이 있다. 가장 넓게 분포하는 놀이는 중부 이남에서 전승되는 줄다리기이며, 고싸움은 전라남도 일부에서, 쇠머리대기는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전승되고 있다.
우군(友軍) 맞이
우군을 영접하는 것은 처음 만나서 기쁨을 나누며 필승을 다짐하는 것이다. 정월이 되면 청소년들의 째기동채싸움이 시작되고 읍내에 서서히 동채싸움에 대한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한다. 정월 14일에서 15일 오전까지 각 편에서는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시내를 누빈다. “동(서)부야~ 워! 이이 히히!” 하고 환성을 지르며 행진하다가 두 편으로 나누어 서로 밀며 머리꾼 훈련을 하다가 또 다시 행진하기를 반복한다. 우군이 각 면부에서 도착한다는 연락이 오면 그 쪽에 가까이 있는 패가 마중을 간다. 마중하는 쪽과 우군은 약 10M의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서서 일제히 “동(서)부야! 워!” 하고 두 세 차례 환성을 지르며 또 “이이 히히”하고 그 자리에서 동동거리며 손을 높이 올려 춤을 추다가 쌍방이 돌진하여 서로 부둥켜 안고 ‘월사 덜사’하면서 반가움을 표시한다. 그 후 다시 두 편으로 나누어 마치 머리꾼 싸움을 하는 것처럼 서로 힘차게 밀백이를 연습한다. 약 2~3분간 연습을 하고 전체가 행진하는 방향을 향하여 서서 “동(서)부야!” “이이 히히!”하고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고 뛰어간다. 이때 반 정도는 속력을 빨리 하여 약 30m를 뛰어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속도를 늦추어 뛰어서 20m쯤 행진하니 약 10m의 거리가 생기면 모두 정지하여 마주보고 서서 위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이것은 협동과 단결력을 키우면서 머리꾼 싸움의 요령을 배우게 하는 효과가 있다.
놀이의 규칙
· 대장은 손으로 신호하여 지휘하고 상대방의 대장이나 동채를 붙들지 못한다. 머리꾼은 팔장을 풀지 못하며 상대방을 잡아 당기거나 박치기, 발길로 차기 등 상대방을 해치는 행위는 할 수 없다. · 머리꾼이 강력하여 적군을 밀어 헤치고 적의 동채에 도달하였을 때 앞채꾼은 적의 동채를 당기고 또 밑으로 누르며 동채를 찢을 수도 있으나 상대방에게 절대로 손을 대지 않는다. · 열세에 몰린 사람은 적을 해치거나 동채를 잡은 적의 팔을 당기거나 할 수 없고 오직 팔짱을 낀 채 적을 밀어내며 자기 동채를 빼앗기지 않도록 사력을 다한다. 이 사이에 뒤채꾼은 신속히 동채를 빼내어 후퇴하는데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다. · 절대로 대장을 공격하지 않는다. 만약 대장이 격전 중에 실수로 떨어지면 공격을 멈추고 다시 동채에 오를 기회를 주고 경기를 계속하나 최후 결정적 순간은 그렇지 않다. · 공격은 언제나 대각선상에서 정면으로 정정당당히 하여야 하며 측면 또는 후편에서 비열한 공격은 할 수 없다. · 머리꾼이 넘어지면 곧 쌍방이 후퇴하여 넘어진 사람을 구한 다음 경기를 계속한다. (이 때는 대장 또는 심판의 신호로 후퇴한다.) · 양 동채머리가 교차하여도 높이 올리지 않는다. 이는 정식회전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현상이며, 약식 째끼동채에서만 간혹 한다. 이것은 승부를 낼 수 없으며 쇼(show)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회전 중 규제에 위반되는 행귀가 있을 때에는 주심은 경기를 중단시키고 곧 주의를 준 다음 계속 진행시킨다. · 동채 삼각형 내부에는 동채꾼이 절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 동채가 땅에 닿거나 동채를 빼앗겼을 때는 결정패이다 · 경기 중 항상 수세로 밀리어 궁지에 빠진 편이 판정패이다. · 규칙 위반 및 기타 비도덕적 행위로 주의를 받고 경기를 중단한 편을 벌칙패로 규정한다.
대장의 지휘 신호 및 구호
- 대장의 신호 동채는 대장의 ‘손바닥’이 향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 전진 : 오른팔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고 뒤에서 앞으로 흔든다. 동시에 한쪽 발을 굴릴 때도 있다. 팔을 뒤로는 높이 올리지 않고 앞은 90도까지 올린다. 올리는 속도는 빠르고 내리는 속도는 보통이다. · 후퇴 : 오른팔 손바닥을 뒤로 향하고 앞에서 뒤로 직선으로 흔든다. 앞으로 올리지 않고 뒤로 많이 올린다. · 좌회전 : 오른쪽 손바닥을 뒤로 향하고 옆에서 몸 뒤로 곡선으로 흔든다. 전진 후퇴할 때보다는 팔과 몸 사이의 각도를 60~70도로 넓게 한다. · 우회전 : 고삐를 오른손으로 바꾸어 잡고 왼팔 ‘손바닥’을 뒤로 향하고 옆에서 몸 뒤로 흔든다. · 정지 : 오른편 ‘손바닥’을 밑으로 향하고 팔굽 아래 위로 수직으로 흔든다. 100여년 전에는 대장이 작은 기를 흔들어 신호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대장의 신호는 뒤채꾼과 뒤놀이꾼이 보고 즉시 구호로 전군에 알리며 행동을 시작하나 동채꾼 전체가 밀착하여 일체가 되었을 때에는 각 신호를 피부로 느끼고 행동할 때가 많다. 좌우회전은 동채의 뒤를 기준으로 한다. - 대장 구호 · 전진 : 밀어라 · 후퇴 : 빼─라 · 회전 : 돌아라 - 차전놀이에 사용되는 함성 · 동(서부)야, 워 : 아군끼리는 단합을 과시하는 소리이며, 적에 대해서는 시위의 뜻이다. · 이이 히히 … : 전진시(전투시가 아님) · 월사! 덜사! : 승전시의 환호성
놀이꾼의 편성
차전놀이의 인적구성은 대장, 머리꾼, 놀이꾼, 깃발 그리고 동채 좌우와 뒤를 따르는 각 편의 주민들로 구성된다. 대장은 총지휘자로 출전 경험이 많고 대담하며 통솔력 있는 사람을 추대한다. 머리꾼은 차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최정예부대이다. 머리꾼들은 맨 앞은 1명, 그 뒤에 2명, 그 뒤에 3명 등의 순으로 마치 피라미드와 같이 동채 앞에 배치된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팔짱을 끼고 어깨로 미는 ‘밀백이’로 적을 분산 격퇴시켜야 하며 그 외의 행동은 할 수 없다. 동채꾼은 직접 동채를 메고 대장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로 앞채꾼과 뒤채꾼으로 구성된다. 앞채꾼은 힘센 사람들로 편성하는데 이들은 절대로 동채를 이탈하지 않고 동채와 생사를 같이 한다. 앞채꾼들은 적의 동채에 접근하였을 때 동채를 잡고 뜯으며 위에 올라타고 밑으로 누를 수 있다. 뒤채꾼은 비교적 둔한 사람이라도 키가 크고 힘있는 사람으로 구성한다. 이들은 앞채꾼의 움직임에 다라 움직이며 동채를 이탈해서는 안된다. 깃발은 동부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쓴 동부, 왕건군, 청룡, 주작, 여기 등이며 서부는 파란 바탕에 흰 글씨로 쓴 서부, 견훤군, 백호, 현무, 영기 등이다. 각 편의 동채를 따르는 주민들은 자기편의 동채를 보호하는 한편 열렬하게 응원하면서 신명을 돋구기 때문에 놀이꾼이라고도 한다. 앞 놀이꾼은 때로는 머리꾼 행세도 하고 뒤놀이꾼은 뒤채를 보호하며 교체도 한다.
동채제작
정월 12일 되면 동채를 만들기 시작한다. 목공은 차전놀이가 끝날 때까지 외출을 금하여 기밀 누설과 부정을 막았다. 동채를 만들 때 목공은 항상 의관을 쓰고 작업하며 삼, 칡, 모발을 합하여 세 선으로 줄을 꼬는 한편 한쪽에서는 올림대 나무를 알맞게 불에 굽는다 방석을 만들 때나 동채를 만들 때는 힘센 장정 3~4명이 물을 뿜어가며 힘차게 당기고 떡메로 다져가며 견고하게 만든다. 동채는 길이 20∼30척의 참나무를 X자 모양으로 묶어 만들고 끈으로 단단히 동여맨 다음, 가운데에 판자를 얹고 위에 방석을 깔아 동여맨다. 동채 머리에는 고삐를 매어 대장이 잡고 지휘할 수 있게 하고 판자 뒤에는 나무를 X자 모양으로 하여 4귀를 체목에 묶어 동채가 부서지거나 뒤틀리지 않게 한다.
체목 선정과 벌목
동채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나무를 구하는 것이다. 체목(집 짓는 데 중요한 기둥과 도리 같은 재목을 이르는 말로 가지와 뿌리를 베어낸 등걸을 뜻함)으로 쓸 곧고 굵기가 고른 참나무를 구하려 노력한다. 적당한 나무를 발견하고 해당 나무의 사용이 결정되면 나무에 금줄을 쳐서 부정과 잡귀를 막는다. 정월 초순에 소임자와 목공이 목욕재계하고 산신과 나무에 고사를 지낸 다음 벌채하여 돌아온다. 벌채하여 동채를 제작, 보관하는 장소까지 오는 동안 모든 마을 사람들은 일체의 불손한 언행을 삼가고 근신한다. 보관장소는 내외를 정결하게 하고 집 주위에 금줄을 쳐서 부정을 막고 외인의 출입을 금하는데 특히 부녀자의 접근을 금한다. 차전놀이를 하기 전날 밤에는 엄숙하게 고사를 올리고 건승을 기원한다.
발의
추수가 끝나면 각 편의 원로들이 모여 동채싸움(차전놀이)의 거행여부를 의논한다. 거행하기로 결정되면 상대편에 통보하는데 통고를 받으면 거절하지 못한다. 행사 준비에 들어가면 대장과 도감을 뽑는 일을 제일 처음 하는데, 이때 선출하는 사람들은 차전놀이 경험이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추대된다.
전승자 정보
안동차전놀이의 전승은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각종 행사와 정기 발표회 등에서 꾸준히 시연되면서 꾸준히 계속되고 있으며, 각종 다큐멘터리와 언론매체 등을 통해 소개되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다. 1대 기능보유자 김명한에 이어 제2대 기능보유자 이재춘이 현재 전승에 노력하고 있다. ·김명한(金明漢, 1902~1989) 1902년 안동 출생으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39년부터 재생병원을 개원하여 직접 경영하였으며, 1945년부터는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천혜원을 설립하였다. 김명한은 1920년대 차전놀이의 도감을 맡아 일한 것을 계기로 안동차전놀이의 발굴과 복원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9년 안동차전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 24호로 지정되면서 기능보유자 인정을 받았다. 1970년에 사단법인 안동차전놀이 보급회를 만들어 보존 전승에 앞장섰으며, 그 후 1974년에 안동시 북문동 태사묘 내에 차전각을 건립하는 한편 국내는 물론 멀리 미국에서도 차전놀이가 재현되도록 하는 등 전승 보급에 힘썼다. ·이재춘(李載春, 1941~ ) 안동 출생으로 1966년부터 안동군청과 시청에서 근무하면서 문화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때 그 선배인 김명한 옹을 알게 되었고, 1966년 차전놀이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할 때부터 김명한의 간곡한 부탁으로 제반 사무업무를 보게 되면서 차전놀이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안동차전놀이가 문화재로 지정된 뒤 1980년에 이수자가 되었으며 1989년에 기능보유자 후보가 되었다가 그 해 김명한 옹이 별세한 뒤부터 안동차전놀이 보존회장을 맡아왔다. 1991년에 안동차전놀이 기능보유자 인정받은 뒤 차전놀이 활성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언론계에서 25년간 근무하면서 차전놀이 전승과 보급에 힘썼고, 많은 사람들이 차전놀이를 배울 수 있도록 각종 자료를 발간하여 전국 관계기관 및 학교, 도서관, 사회단체 등에 무상 보급하여 차전놀이 보급에 전념하고 있다.
연계정보
· 재구성 <안동차전놀이-동채싸움>, 안동차전놀이보존회, 1993 <안동차전놀이 ;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15>,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관련도서
<안동차전놀이-동채싸움>, 안동차전놀이보존회, 1993 <안동차전놀이 ;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15>, 국립문화재연구소, 1998 <한국민속대관(세시풍속 전승놀이)>, 1981,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놀이방법) <중요무형문화재해설(놀이와 의식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유래 및 놀이방법), 1985 <한국의 민속놀이>, 심우성, 대광문화사(놀이방법), 1990
용어해설
밀백이 : 동채 앞에 피라미드 형태로 늘어선 머리꾼들이 팔짱을 끼고 어깨로만 상대편을 밀어 하는 공격을 말한다.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사이트
디지털한국학
관련사이트
이컬쳐_한국의 민속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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