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개요

자세히보기

근현대음악사의 대들보

19세기 말부터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한국의 근현대음악사가 시작이 되었다. 한국의 근대음악은 창가, 동요, 가곡 등 노래가 중심이었고, 근대음악의 선구자 중 상당수가 성악가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인 성악가를 비롯해 유난히 성악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이는 가무를 좋아하는 민족적 특징과 노래 중심으로 서양음악이 유입된 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또 그 이면에는 수많은 선구자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격동의 시기를 보내면서 윤심덕, 한기주, 현제명, 안기영 등 1세대 성악가들은 주로 서양음악의 유입과 이른바 창가조와 애창곡을 가창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를 발전시켜 한국의 성악을 예술적 수준으로 끌어 올렸고, 아카데미즘을 확립시켰고, 성악 교육의 체계적인 기틀을 마련한 사람들이 바로 안형일(1927~), 이경숙(1931~), 이인영(1929~), 황병덕(1920~), 황영금(1931~), 이상춘(1910~1991), 김자경(1917~1999), 정훈모(1909~1978) 등 2세대 성악가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외국 유학을 통하여 성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였고, 귀국 후 성악가로서 무대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대학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서양의 수준 높은 예술가곡의 수용도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한국 성악 교육의 기틀도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오페라 운동도 이들에 의해 주도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가곡의 발전과 창작음악의 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들의 개인적 업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형일은 한국 오페라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생을 한국 오페라 발전을 위해 노력을 하였다. 한국의 오페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는데, 한국오페라운동의 태동기인 1958년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주연을 필두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30여 년간 한국의 대표적인 오페라 주역 가수로 활동을 하였다. 즉, 한국초연의 오페라뿐만 아니라 창작오페라에 이르기까지 거의 주역으로 출연하면서 한국오페라의 테너의 상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서 수많은 성악가를 배출시켰고, 국립오페라단 단장직을 역임하면서 국민에게 사랑받는 오페라를 만드는 등 한국 오페라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경숙은 소프라노와 대학의 성악과 교수로서 활동을 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58년 귀국독창회를 시작으로 5회의 독창회를 개최하였고, <투란도트>를 비롯해 12편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100여 회의 협연 및 가곡발표회를 가졌다. 학구적인 성악가로서 <대지의 노래>, <예술가곡 서설>, <말러와 그의 가곡>, <예술가곡의 이해> 등 4편의 저서를 발간하였으며, 성악 교육의 이론적 틀을 만들기도 하였다. 1957년부터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50년간 수많은 성악 인재를 배출시켰으며, 특히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의 선생님으로도 유명하다. 이인영은, 베이스로서 젊은 시절에는 일본의 오페라단에서 활동을 하면서 국위를 선양하였고 귀국 후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성악 아카데미즘의 정립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59년 귀국독창회를 시작으로 10차례의 독창회와 약 40회에 달하는 오페라 출연, 20여 회의 교향악단과 협연 등을 통하여 한국 저음가수의 상을 정립하였다. 소리의 질과 아카데믹한 발성 그리고 뛰어난 예술성 등으로 인하여 당대 최고의 저음가수라는 명성을 얻었고, 수십 편의 오페라 연출을 통하여 오페라 연출가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말년에는 오페라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형 오페라 창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고, 또 한국오페라의 진흥을 위한 학문적 토대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황병덕은 성악과 교수, 오페라 가수, 오페라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성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바리톤 가수이자 오페라계 부동의 바리톤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1948년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무대인 <라 트라비아타>를 시작으로 한국의 오페라 중 관여하지 않은 오페라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 한편, 오페라뿐만 아니라 한국가곡을 비롯하여 성가곡, 외국가곡에 이르기까지 가곡 분야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을 하였고, 성악과 교수로서도 많은 인재를 육성하였다. 폭넓은 레퍼토리와 활동 무대가 넓은 것이 특징이며, 외국에서 가장 많이 독창회를 개최한 성악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황영금은 성악가, 음악대학 교수, 한국 슈베르트연구회 회장, 한국바그너협회 이사 등으로 활동을 하면서 한국 성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60년 4·19축하공연 등 국내외 주요 음악회에 200여 회 출연을 하였고, <아이다> 등 오페라 주연으로 30회 출연을 하였고 수차례의 독창회를 개최하였다. 1959년부터 40여 년간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대학 성악교육의 틀을 만드는 등 교육자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벨칸토 창법 연구>가 있으며, 수많은 한국가곡 음반을 출반하는 등 한국가곡의 보급과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이상춘은, 1950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오페라로 평가받고 있는 현제명 작곡의 <춘향전>에 이도령 역으로 출연함으로써 오페라 가수로 화려하게 데뷔를 하였다. 이후 테너 가수로서 활동을 하면서 벨칸토 창법을 토대로 우리 민요를 소화할 수 있는 독특한 창법을 창안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가곡의 새로운 창법을 만드는 등 오페라와 함께 가곡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생명력이 짧은 테너임에도 불구하고 60세가 넘어서까지도 왕성한 무대 활동을 하여 많은 성악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서 우리나라 성악계의 주역들을 상당수 배출해냈다. 김자경은, 한국오페라의 상징으로 불릴 만큼 우리나라 오페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948년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무대인 <라 트라비아타>에서 프리마돈나로 출연하여 ‘한국인의 영원한 프리마돈나’라는 이미지를 남겼고, 1950년에는 미국 카네기홀에서 한국인 최초로 독창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김자경오페라단을 창단하여 민간오페라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으며,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성악 인재를 양성하였다. 성악가로서도 해외에서만 100여 차례의 독창회를 개최하여 국위를 선양하였고, 국내에서도 수많은 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특히 70세가 넘어서도 끊임없이 독창회를 개최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지만, 그 중에서도 한국오페라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훈모는, 한국 성악의 예술성과 아카데미즘을 확립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1930년부터 소프라노로서 활동을 하였는데, 종래의 애창곡 수준의 레퍼토리에서 탈피하여 예술성이 높은 외국의 예술가곡을 본격적으로 소개를 하여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광복 이전에는 성악가로서 연주활동에 전념을 하였으며, 슈베르트, 슈만, 볼프, 슈트라우스 등 수많은 독일 가곡을 국내 초연하였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성악 교육의 기틀을 만들었으며, 그 후에 활동한 대부분의 여성 성악가들이 정훈모 선생의 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성악 인재들을 배출했다. 민경찬(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