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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음악사의 대들보

지난 100년간의 우리 음악은 근대화와 서구화의 물결이라는 원심적인 힘과, 정체성 찾기라는 구심적인 힘과의 사이에서 때로는 대립과 갈등을 빚으며 때로는 상호 자극을 하면서 때로는 융화가 되면서 진행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서, 우리 민족의 형성과 함께 해 온 전통음악 분야는 근대화와 함께 모진 수난과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우선 서구화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민족문화유산을 지켜야만 했고, 일제에 의한 민족문화말살 정책에 대응을 해야 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민족음악 역사를 바로 세우고 또 희석되다시피 한 정체성 찾기에 골몰해야 했으며, 민족문화 수립이라는 범민족적 과제를 수행해야만 했다. 근현대국악사는 수난과 시련의 역사 그 자체인데,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우리의 민족음악이라는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성경린(1911~), 이혜구(1909~), 황병기(1936~), 김성진(1916~1995), 장사훈(1916~1991), 이성천(1936~2003), 이주환(1909~1972), 김기수(1917~1985), 홍원기(1922~1997), 이재숙(1941~) 같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이 분들은 한결같이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지키는 문화파수꾼으로서의 역할과, 민족문화말살 정책에 대응한 문화독립군으로서의 역할 그리고 서구화된 현대인들의 삶 속에 민족 고유의 음악적 정서를 심어준 문화전도사로서의 역할과, 해외에 우리의 우수한 음악문화를 소개하는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 분들의 공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린은 16세 때 이왕직아악부에 입소하여 아악과 인연을 맺으면서 우리나라 아악의 보존이라는 사명감을 띠게 되었다.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 악사장과 원장 그리고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직 등을 역임하면서 일생을 아악의 발전과 국악인재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국립국악원을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기관으로 격상시켰으며 국악사양성소와 국립국악고등학교를 한국 최고의 국악교육기관으로 발전시켰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종묘제례악 보유자로서도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한국전통음악을 보급하고 또 외국에 알리는데도 일조를 하였다. 이혜구는 일제강점기 때에는 방송국에 근무하면서 한국전통음악을 체계화하여 일반에게 소개하는데 공헌을 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국악학자로서 한국전통음악을 학문적 차원에서 틀을 만들고 초석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국악학자로서 한국의 음악을 학문적이고 이론적으로 외국에 알리고 또 세계적 수준으로 격상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를 창설하여 대학급의 차원에서 국악인재를 육성하였고, 국악학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하면서 후학들로 하여금 우리나라 국악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풍토와 장을 만들어주었다. 황병기는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였지만 일생을 가야금 연주자와 작곡가 그리고 국악교육자로 살아온 특이한 경력의 소요자이다. 전통음악의 습득 방법도 특이한데, 대부분의 국악인이 정악과 민속악 중 하나만을 택하는데 비해, 정악과 민속악을 두 분야를 두루 습득하였고, 조선조 후기로부터 물려받은 민족문화유산을 고려와 신라로 확대시켰으며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황병기류의 새로운 연주법과 작곡법을 개척하였다. 그리고 또한 독보적인 음악세계를 바탕으로 국악의 현대화·세계화·대중화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1990년에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단장으로 평양을 방문, 최초로 민간 차원에서의 남북교류음악회를 성사시켰다. 김성진은 한국인의 소리 얼을 지녀온 대금정악의 명인이자 금세기 <청성곡>의 최고의 명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왕직아악부에서 대금을 배운 후 아악수(雅樂手)로서 활동을 하였고,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 악사장과 부원장을 역임하면서 아악의 계승과 발전 및 대금정악의 정립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 1호인 종묘제례악의 대금주자 및 중요무형문화재 제 20호 대금정악의 보유자로 지정을 받았으며, 대금 교육에도 정진을 하여,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거의 모든 대금 주자에게 정악대금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장사훈은 일찍부터 국악의 학문적 연구와 이론 정립에 뜻을 두어 이른바 ‘국악학’을 개척하였다. 1954년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덕성여자대학교)에 국악과를 설립하는데 공헌을 하였으며, 1960년부터 서울대학교 국악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악의 이론적 기틀을 정립하였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일생 1백 80여 편의 논문과 원고지 1만 4천장에 달하는 <국악대사전>을 비롯해 40여 권의 저서를 발표하였으며, 국보급 희귀서적과 악기 등이 포함된 방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바탕으로 ‘운초 장사훈 박사 기념관’을 만들어 국악학을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성천은 광복 후 대학의 국악과에서 국악을 공부한 후 활동을 전개한 본격적인 국악 작곡 1세대에 해당한다. 국악을 전통의 차원이 아니라 전통에 바탕을 둔 현대적 개념으로 해석하여 ‘국악창작’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 독주곡에서 대규모 편성의 관현악곡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곡을 작곡하였는데, 그가 만든 곡은 창작국악곡의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실제 교육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교재를 개발하는 등 국악교육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국립국악원 원장으로 재임하면서는 국립국악원을 ‘시대와 호흡하고 국민에게 봉사하는 기관’으로 탈바꿈시켜 일반인들에게 많을 사랑을 받게 하였다. 이주환은 이왕직아악부에서 가곡, 가사, 시조 등 정가(正歌)를 습득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아악의 계승과 복고(復古)를 위해 노력하였다. 광복 후에는 국립국악원 초대원장, 국악사 양성소 소장, 한국장악원 이사장, 가곡보존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전통음악의 보존과 발전 및 민족음악의 수립을 위해 공헌을 하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가곡과 중요문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으며, 특히 정가의 전수와 보급을 위해 혁혁한 발자취를 남겼다. 김기수는 이왕직아악부에서 대금을 습득하였으며, 졸업과 함께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雅樂手)로서 활동을 하면서 조선조 아악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와 동시에 1939년 12월 이왕직아악부에서 신곡 현상공모에 자신의 신작인 <황화만년지곡>이 당선되어 창작국악곡 제1호의 작곡자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광복 후에는 창작국악운동인 ‘신국악운동’을 전개하였고, 국립국악원의 장악과장, 악사장, 국악사 양성소 부소장, 원장, 국악고등학교 교장 직을 역임하면서 아악의 계승과 보급 그리고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 1호 종묘제례악과 중요 무형문화재 제 39호 처용무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홍원기는 이왕직아악부에서 정가(正歌)를 습득하였고, 민간인인 최상욱을 통해 시조제(時調制)를 전수받았다. 그 때문에 일찍부터 궁중음악과 민간음악을 통달한 가객(歌客)으로 명성을 날렸다. 광복 후에는 시조 명창으로 유명했으며, 20여 편의 국악창작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 30호 가곡의 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으며, 전통가곡진흥원을 설립하여 전통 가곡의 전승과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정가와 가야금 정악의 연주 수준이나 연주 모습 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왕가(王家)의 마지막 가객’ 또는 ‘마지막 명금(名琴)’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이재숙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제1기생으로 가야금을 전공하였다. 1964년 정악과 민속악, 창작국악곡을 모두 포용하는 연주곡목을 가지고 우리나라 최초로 가야금 독주회를 개최하였고, 이어 수많은 독주회를 열었으며, 가야금산조의 모든 유파를 능히 연주하는 등 가야금 독주회와 가야금 연주자의 새로운 상을 정립하였다. 일생을 서울대학교 가야금 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야금 연주와 연구 그리고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가야금을 통하여 우리의 우수한 음악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도 일조를 하였다. 여러 종류의 가야금산조를 오선보로 채보하여 최초의 가야금산조 악보집을 발간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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