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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창작오페라의 성장기

오랜 공백을 깨고 1962년 4월에 이남수 지휘, 오현명 연출로 장일남의 창작오페라 <왕자호동>이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새롭게 창단된 국립오페라단의 창단공연으로 마련된 것이다. 민간오페라단의 힘으로 힘들게 명맥을 이어오던 오페라운동은 1962년 국립극장 산하에 국립오페라단이 창단됨으로써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 국립극장은 새롭게 건립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공연장으로 사용하던 명동의 시공관을 국립극장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국립오페라단은 전속단원제가 아니었고 정단원을 두되 공연이 있을 때만 배역을 맞아 활동하는 식으로 운영되어 미흡한 점이 있었지만, 일단 국가 예산으로 오페라를 만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오페라계에 새로운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국립오페라단의 창단은 음악인들을 하나로 결집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오페라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립오페라단의 창단과 더불어 그동안 활동했던 민간오페라단이 자연히 해체됨으로써, 오로지 국립오페라단만이 활동하게 되어 다양한 오페라공연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한편 1968년에는 국립오페라단의 독주를 깨고 민간오페라단인 김자경오페라단이 창설되었다.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소프라노 김자경의 오페라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된 김자경오페라단은 그 해 5월 창단공연으로 베르디의 <춘희>를 공연했다. 이 작품은 20년 전 우리 음악인들에 의해 제작된 최초의 오페라작품으로서 김자경은 그 당시 프리마 돈나를 맡아 열연했었는데, 단장으로서 다시 주인공을 맡아 의미있는 공연을 마련한 것이다. 김자경의 서거 이후 잠시 공백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창단 이후 현재까지 숱한 난관을 뚫고 그 명맥을 잇고 있는 김자경오페라단은 특히 새로운 창작오페라를 위촉하여 초연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창작오페라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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