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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음악사의 대들보-지휘자

한 나라의 음악문화예술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 중의 하나가 교향악단의 수준이다. 광복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변변한 교향악단 하나가 없었다. 광복과 함께 오케스트라 운동의 필요성을 통감한 음악인들은 교향악단을 만들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1945년 9월 고려교향악협회를 탄생시켰고, 이 단체의 발족으로 고려교향악단이 창립되었다. 우리나라의 교향악단 역사는 고려교향악단의 창단으로부터 시작되며, 지휘자로서 이 교향악단을 이끌고 발전시킨 사람이 김생려(1912~1995)와 임원식(1919~2002)이다. 이후 우리나라의 교향악단은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으로 재편이 되었으며, 오랫동안 이 두 교향악단 체제로 운영이 되었는데,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는 김생려가, KBS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는 임원식이 맡았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교향악단은 김생려와 임원식에 의해 토대가 만들어졌고, 발전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김생려, 임원식 이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지휘는 연주가나 작곡가 또는 성악가가 겸했으며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휘의 전문 시대 역시 이 두 사람에 의해 개척이 되었고 이들이 만들어 놓은 토대를 발판으로 발전이 되었다. 이 두 지휘자의 업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생려는 광복이 되자 현제명과 함께 고려교향악단을 창단하여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오케스트라 운동을 전개하면서 황폐한 음악계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얼마 후 고려교향악단이 해산되자 다시 서울교향악단을 창단하였고, 한국 전쟁 중에는 해군정훈음악대를 창단하는 등 해방정국과 전쟁이라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 연주계를 결속시키고 활동의 장을 마련하는 등 한국음악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이어 1957년에는 ‘민족의 교향악단’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서울시립오케스트라를 창단, 초대 상임지휘자로 취임을 하여, 교향악단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남아 순회연주를 통해, 전쟁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한국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고 국위를 선양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64년 초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아리랑민속예술단을 만들어 해외 여러 나라에서 공연을 하면서 한국의 음악예술을 알리는 심혈을 기울였다. 여러 가지 업적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한국 교향악단의 아버지’ 또는 ‘한국 지휘계의 대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교향악단과 지휘계의 발전에 있어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임원식은 외국에서 최초로 지휘를 전공한 전문 지휘자인 동시에 음악영재교육의 선구자로서 한국음악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광복 후 문자 그대로 혜성과 같이 한국음악계에 등장하여 고려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화려하게 데뷔를 하였고, 이어 육군교향악단과 (구)KBS교향악단, 국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서 활동을 하면서 한국의 교향악단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 또 최초의 전문지휘자로서 수많은 대곡을 초연하고 교향악단의 레퍼토리를 풍부하게 하는 등 이 땅에 교향악이 뿌리를 내리고 초석을 다지고 발전을 하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국제적인 활동에도 앞장을 서, 1953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유네스코음악회의에 참석한 것을 필두로 여러 나라에서 순회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1991년에는 한국지휘자로서 최초로 러시아를 순회하면서 객원 지휘를 하기도 하였다. 음악교육자로서는, 서울예술고등학교 창립에 산파 역할을 하는 등 조기교육과 영재교육의 개척자로서 그 기틀을 마련하였고, 많은 음악 영재를 발굴하여 세계적인 음악가로 육성시켰으며, 또 세계청소년음악연맹에 가입하여 국내에서도 청소년 음악운동을 활성화시켰다. 평생을 현역 지휘자로 활동을 하였으며 2002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지휘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여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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