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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음악사의 대들보

우리나라의 창작음악은 1905년부터 시작되며, 창가-동요-가곡-기악곡 등으로 이어진다. 창작음악의 1세대에 해당하는 김인식, 이상준, 백우용, 정사인 등은 주로 창가를 작곡하였지만, 창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져 더 이상 불리우지 않고 있다. 그에 비해 동요와 가곡은 오늘날에도 널리 애창이 되고 있는데, 이 분야를 개척한 작곡가들이 바로 김동진(1913~), 김성태(1910~), 김순애(1920~), 정회갑(1923~), 현제명(1902~1960), 이흥렬(1909~1980), 박태준(1900~1986), 김세형(1904~1999) 등이다. 일제강점기 때만 하더라도 초·중등학교 음악교육의 중심 교재는 일본 창가였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우리의 노래를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되자 동요가 초등학교 음악교육의 중심교재가 되었고 가곡이 중·고등학교 음악교육이 중심교재가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의 음악적 정서는 새롭게 정립이 되었는데 그 곡을 작곡한 사람들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작곡가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우리의 민족혼이 깃들여져 있고 우리의 정서에 맞는 주옥같은 명곡을 만들어 범국민적으로 애창을 하게 하였다. 이 분들이 만든 곡이 없었으면, 우리는 지금도 외국곡을 부르고 있을 것이고, 그와 함께 음악적 정서도 서양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들은 또 광복 후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작곡 교육의 기틀을 만들었고,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한국근현대음악의 국제화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들의 업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동진은 한국근현대음악의 영원한 노스탤지어인 가곡 <가고파>의 작곡자인 동시에 한국 서정가곡의 정형을 만들어 낸 인물이다. 1930년대부터 서정가곡을 작곡하여 한국가곡의 교과서적인 틀을 만들었고, 1940년대 초에는 만주의 신경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 겸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우리의 전통 민요인 <양산도>를 주제로 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발표하였다. 광복 후 평양음악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평양교향악단의 전신인 중앙교향악단과 합창단을 창단하여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 후 월남하여 서라벌예대 교수로 있으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특히 1958년 정부수립 10주년 기념을 위한 교성곡 <승리의 길>에 우리나라 최초로 가야금과 서양악기를 함께 사용하여 국악과 양악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보여 주목을 끌었다. 1963년부터는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을 하였으며, 그 시절 <목련화>를 작곡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1978년부터는 국악 판소리의 창법을 서양음악에 접목시킨 ‘신창악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심청전>과 <춘향전>을 작곡하였다. 대표적인 가곡으로는 <내마음>, <봄이 오면>, <수선화>, <진달래꽃> 등이 있다. 김성태는 애창곡 수준의 한국 가곡을 예술가곡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 작곡가인 동시에 현제명과 함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만들고 발전시킨 음악교육자이다. 그리고 교향악과 합창, 음악이론의 발전에도 일조를 하였다. 작곡가로서는, 서양음악의 어법과 논리를 극복하여 한국의 독자적인 음악어법을 창출하였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가곡 <산유화>를 비롯해, <이별의 노래>, <동심초>, <한송이 흰 백합화>, <꿈길> 등 수많은 예술가곡을 작곡하였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창설에 산파 역할을 하였고 또 발전시켰다. 그리고 동 대학 교수로 수많은 작곡 인재들을 양성하였는데, 1950~1960년대 배출된 우리나라 주요 작곡가의 대부분이 그의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곡가와 교수 이외에도 방송윤리위원회 위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사, 예음문화재단 회장, 예술원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큰 업적은 광복 후 낙후된 한국음악문화예술의 수준을 오늘날과 같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한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김순애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작곡가로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따뜻한 서정이 깃들어 있는 <네잎클로버>, <4월의 노래>, <그대 있음에> 등 주옥같은 명곡을 작곡하여 한국가곡을 보다 풍요롭게 만드는데 일조를 하였다. 1953년부터 약 30년간 이화여자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여성전문음악교육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수많은 여성 작곡가를 양성하였으며, 낙후된 여성 작곡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가곡뿐만 아니라 <피아노 독주곡>, <바이올린 독주곡>, <교향곡> 등 여러 편의 기악곡과 오페라 <직녀>, 교성곡 <당신은 새벽에 나의 목소리를> 등을 남겼고, 작곡집으로는 <김순애 가곡집>, <김순애 동요곡집>, <그대 있음에>, <12월의 노래> 등이 있다. 정회갑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탐구하는 작곡가로 한국 창작음악계에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고 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1960년대 초, 전통악기와 서양음악의 접목을 시도한 <가얏고와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고, 가곡 <입맞춤>을 통하여 전통음악에서 잘 쓰지 않는 음정을 주축으로 한 합성음과 자유스런 리듬 등을 통하여 한국적 해학을 구사하는 등 현대가곡을 개척한 동시에 한국가곡의 혁신적인 면을 제시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창작음악 단체인 창악회와 미래학회를 창단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서 백병동, 강석희, 김용진, 이성천, 백대웅 등 우리나라를 대표적인 작곡가들을 대거 육성하였다. 늘 새로움을 구사하고 있지만, 농악과 민요 등 민속음악과 정악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거기서 발견된 전통미를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등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로움’을 추구하였다. 현제명은 우리나라 근현대음악사에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음악가이다. 광복 이전에는 한국 최초의 테너가수이자 한국동요와 가곡을 개척한 작곡가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서 음악 인재를 양성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광복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오페라로 평가를 받고 있는 <춘향전>을 작곡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의 창단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악에서 시작하여 창작, 기악연주, 오페라운동, 교향악운동, 음악교육, 심지어는 음악행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근현대 음악발전에 있어서 영향을 끼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가장 곡이 많이 수록된 작곡가로, 한국인의 가창문화와 근현대식 음악적 정서와 음악관 형성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가곡 <나물캐는 처녀>, <희망의 나라로>, <대한의 노래>, <니나>, <산들바람>, <고향생각> 등과 오페라 <춘향전>, <왕자호동> 등이 있다. 이흥렬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애창이 되고 있는 곡의 하나인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의 작곡자이다. 원래 피아니스트였지만, 동요와 가곡 작곡가로서의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섬집아기>를 비롯한 60여 편의 동요와 <바위고개>를 비롯한 50여 편의 가곡을 작곡하였는데, 그의 동요는 건강한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한 순수성과 예술성 그리고 서정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한국동요의 고전적 정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곡은, 서양음악을 그대로 답습했던 초기의 한국가곡의 수준을 우리 정서에 바탕을 둔 예술가곡의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애상감·비감 등의 정서로부터 탈피하여 오히려 그것을 명랑하고 아름다운 정서로 승화시켰다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교육음악협회 위원장, 한국작곡가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음악문화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박태준은 우리나라 동요와 가곡을 개척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인 동시에 합창예술의 새로운 장을 연 지휘자이다. 동요로는 범민족적 애창곡인 <오빠생각>과 가곡으로는 <동무생각>, <아 가을인가> 등을 남겼다. 광복 이전에는 주로 작곡가와 음악교육자로 활동을 하면서 한국양악문화의 개척자로서 일익을 담당하였고, 광복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합창단인 오라토리오 합창단을 창단 및 지휘하는 등 합창문화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동합창단은 베토벤의 <장엄미사>, 바흐의 <b단조 미사>, 모차르트의 <레퀴엠>, <대관식 미사> 등 대곡을 초연하는 등 아마추어합창단 수준에 머물러 있던 시대에서 프로합창단 시대로의 문을 열게 하였다. 이어 1955년에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종교음악과를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1963년에는 동 대학교에 음악대학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초대 학장으로서 그 기틀을 만들었다. 그 외 한국음악협회 이사장과 한국교회음악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근현대음악문화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김세형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작곡가와 음악교육의 선구자로서, 한국 창작음악의 발전과 한국음악교육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작곡가로서는, 1936년 우리나라 최초의 연가곡집인 <먼길>을 발표하고, 한국적 음악어법을 개발하여 작곡을 하고, 최초로 교향곡을 작곡하는 등 본격적인 전문작곡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전신인 예술대학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면서 작곡교육의 이론적 틀과 아카데미즘을 확립하였고 대학교육의 제도적 틀을 확립하는 등 전문음악교육의 새로운 기틀을 만들었다. 흥사단가인 <단우회>를 작곡하였으며, 대표곡으로는 <뱃노래>, <옥저> 등이 있다. 정년 후에는 한국작곡가협회 회장과 한국음악협회 이사장으로 활동을 하면서 존경받는 원로로서 음악계의 권익을 보호하고 음악가들의 활동을 돕는 등 한국음악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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