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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극의 양식화와 양적 팽창의 시기: 1980년대 초중반

1980년대 초중반은 정치사적으로는 제5공화국 시기에 해당한다. 일반 민주주의의 원칙을 파괴한 권력 남용과 폭력적 통치가 이루어졌던 유신체제는, 이에 항거하는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과 정치적 불만을 고조시켜 부산마산항쟁이라는 민란 형태의 범시민적 항쟁으로까지 발전하도록 만들었고, 이로써 고조된 권력 핵심부 내의 갈등으로 급기야 붕괴한다. 그러나 새로운 민주적 질서를 세울 움직임이 채 본격화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권력 붕괴로 인한 권력의 공백을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통해 차지하게 된다. 유신체제와 같은 폭력적 통치를 유지하고자 한 신군부는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적 움직임과 부딪치게 되었고, 그것은 광주에서의 시민항쟁과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다. 이렇게 도덕적 취약성을 지니고 시작한 제5공화국 정권은 유신시대보다 더 강경한 통치로 정권을 안정시키고자 하였고, 1983년까지는 유신시대와 다를 바 없는 강압적인 통치로 일관하였다. 이 시기는 1980년 민주화의 봄을 경험한 학생운동의 빠른 성장과 어느 정도의 정권 안정을 바탕으로 한 1984년 유화국면이 거치면서, 6월시민항쟁이 불붙는 1987년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의 마당극은, 1970년대의 양식 실험이 정리되고 양적으로 팽창하며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시기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가 마당극의 시대일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 만큼 이 시기의 마당극의 양적 성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시작은 1980년 봄, 대학의 1학기가 시작된 후부터 5월 광주항쟁까지의 이른바 ‘민주화의 봄’이라고 불렸던 시기의 활동이었다. 이 시기는 마당극에서도 1970년대의 총결산이자 1980년대의 시작이었다. 마당극운동을 하는 선배들을 많이 배출한 서울대의 경우 1970년대의 작품인 <진동아굿>, <김상진 장례식>,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등이 이 시기에 재공연되었고, 신작인 <노동의 횃불>(유해정 연출), <녹두꽃>(임진택 연출) 등이 공연되었다. 각 대학의 탈춤반은 이 시기에 일제히 창작탈춤적 마당극을 공연하였다. 연극반으로서 마당극을 하는 집단은 서울대와 이화여대 정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탈춤반은 1970년대 말까지 전국 대학으로 확산되었고 ‘연합탈반’이라고 불렸던 전국적인 연대모임까지 형성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상당수의 탈춤반이 전통탈춤의 전수에 머물러 있었고 마당극 창작의 경험을 갖지 못하거나 의식적으로 기피하고 있었다. 1980년 봄 이들은 거의 전교생이 모여서 매일 대중집회를 가지는 자리에서 당시 정치상황을 담은 창작탈춤적 마당극을 공연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이들은 전통탈춤 공연 때와는 다른 생생한 신명과 감동을 얻게 되었다. 즉 이 시기에 이르러 마당극은 전 대학생들을 관중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전국의 탈춤반들은 바로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1980년대 내내 대학 마당극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1980년대 대학 마당극이 창작탈춤적 마당극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70년대 마당극운동의 주역들은 1980년대 봄에, 그간 축적해온 마당극의 성과를 공연과 이론적인 글로 공식화시키고자 하였다. 창작극을 고수해온 젊은 극단 ‘연우무대’와 ‘한두레’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마당극운동의 역량을 총집결하여 만든 <장산곶매>(황석영 원작, 이상우 연출, 채희완 안무, 김영동 음악)를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였고, 고소설을 바탕으로 사회상황의 풍자를 담아, 이호재, 주호성, 이인철 등 기성연극계의 배우들을 출연시켜 공연한 <토선생전>(안종관 작, 임진택 연출)을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였다. 이 두 공연은, 마치 물 밑의 소용돌이가 물 위로 솟아오른 것과도 같은 큰 대중적 반향을 일으켰고, 기성연극계에는 마당극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한편 임진택은 마당극의 개념과 마당극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지향, 연극적 특성, 1970년대의 주요 작품 소개 등을 담은 긴 글 ‘새로운 연극을 위하여’(<창작과 비평> 1980년 봄호)를 발표하여, 마당극운동의 실체와 의의를 공표하고 ‘마당극’이라는 용어를 연극용어로 공식화시켰다. 또한 예기치 않게 터져버린 광주항쟁 기간에 광주의 마당극 집단들은 가두홍보를 담당하면서 새로운 대중공간의 체험을 하게 되고, 이것이 이후 광주 마당극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1980년 봄을 거치면서 열린 1980년대 초중반 내내 대학문화의 대표주자는 마당극이었으며, 그 대부분은 탈춤반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탈춤식 마당극이었다. 이들의 양적 성장은 대단한 것이어서, 이들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국풍81’과 같은 대규모 관제축제가 기획될 정도였다. 그러나 대학 마당극의 양적 성장에 비해 그 작품의 질은 높지 않았다. 이는 근본적으로 대학 탈춤반의 연극 창작력 부재가 그 원인일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형성해 놓은 마당극 양식의 몇몇 원리들이 엉성하게 활용됨으로써 그나마의 창작은 가능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창작탈춤식 마당극은 일종의 대리집회였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총학생회 없이 학도호국단만이 있었던 그 시기 대학 캠퍼스 내에서는 대학생들이 모여서 정치사회현실에 대해 의견을 모으고 공유할 수 있는 집회는 원천봉쇄되었다. 따라서 한 해에 한두 번 이루어지는 탈춤반의 마당극 공연은 대학생들이 한꺼번에 많이 모여 공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고, 공연의 마지막이 시위로 연결되는 일도 잦았다. 따라서 학생들은 대학생들의 사회과학 지식을 동원한 정세분석의 내용을 담고자 하였고, 따라서 작품은 마치 사회과학적 지식의 도해처럼 되었다. 군부, 자본가, 외세, 민중 등의 개념을 의인화한 듯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당시 현실에 대한 인식을 탈춤적 어투와 재담적 수사를 섞어, 춤적인 동작과 함께 늘어놓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구체적 현실을 연극적 형상화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억압된 체제 속의 대학생들이 지닌 관념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 형상화의 질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사회과학적 인식을 공유하는 대학생들끼리 공감을 모으고 확산하며 고양시키는 자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고, 이들 대학생들은 집단적이고 자발적인 마당극 관극집단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공연에서 마당극의 기본 원리는 충실히 관철되고 있었다. 극 안에는 살아있는 인물이 거의 없었지만, 자신들의 공통인식으로 이러한 개념적 인물을 만들어낸 대학생 관중 집단의 높은 자발성으로, 공연의 주인공은 관중 자신이 되었고, 공연은 항상 활력과 감동이 넘쳐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1984년 이른바 유화국면이 시작되고 대학에서 대중집회가 가능하게 됨으로써 크게 변화한다. 더 이상 마당극이 대리집회적인 기능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따라서 마당극 관중들의 자발성의 정도도 1980년대 초반 극도로 억눌렸던 시기보다는 (그 자발성이 발현될 여러 통로를 가짐으로써) 줄어들게 되었다. 따라서 정세분석적인 관념적이고 도식적인 대학 마당극은 활력을 잃게 되었고,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게 되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이렇게 단순한 형태 이상의 마당극 창작력을 가지지 못했고 내용을 채울 만한 생생한 생활 체험조차 가지지 못함으로써, 대학 마당극의 부진은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한편 1970년대 마당극운동의 주역들은, 이 시기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 ‘70년대의 문화운동’, ‘공동체분화와 탈춤구조’, ‘문화패 문화운동의 성립과 그 향방’, ‘대학극 연출 단상’ 등을 계속 발표함으로써 마당극의 역사와 원리를 정리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장산곶매>로 관계 맺어진 극단 ‘연우무대’의 틀로 기성연극계 안에서 마당극 혹은 마당극적 요소를 지닌 작품의 공연을 시도하였다. 이 시기는 1977년 ‘연우무대’ 창단으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마당극적인 작품이 많이 올려진 시기이기는 했으나, 실제로 1970년대의 마당극이나 당시 대학 마당극과 비교해 보면 마당극적인 특질이 그다지 많이 드러나지 않는 절충적인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황석영 원작, 임진택 연출의 <장사의 꿈>, 박승희와 채만식 등의 소품 희곡을 모아 유해정이 연출한 <판놀이 아리랑고개> 등이 그래도 마당극적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 전체로 보아서 마당극이라 할 수 없는 <어둠의 자식들>(이동철 원작, 이상우 연출),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오종우 작, 김민기·김석만 연출) 등의 작품에서도 마당극적인 요소들은 여기저기 스며들어 있으며, 마당극 지향성이 강한 멤버들이 탈퇴한 1985년 이후의 ‘연우무대’의 작품이나 1990년대 이후 ‘연우무대’ 출신 연극인인 이상우(극단 ‘차이무’), 김민기(극단 ‘학전’) 등의 작품에서 보이는 연기와 연출의 독특한 질감에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다. 이들의 작품은 대학 마당극과 같은 도식적 관념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독특한 관념적 정태성을 띠고 있다. 머리로 가지고 있는 진보성과 민중지향성이 실제 민중현실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리얼리티와 만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이 관념성은, 특히 제5공화국 시기의 강압적 대본 검열을 통과하며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까지 겹쳐 더더욱 가중되었다. 이러한 관념성과 정태적 분위기는 유화국면이 시작된 시기인 1984년부터 나아지기 시작하여 나름의 역동적 분위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공해풀이 마당굿 <나의 살던 고향은…>(임진택 연출)이 1970년대와 같은 작품의 활력을 되찾고 있으며, 그 활력은 1984년의 <다찌풀이>(주부극단 ‘둥우리’, 유해정·김경란 연출), <여성문화큰잔치 연희마당>(여성평우회, 김경란 연출)로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 들어 ‘연우무대’는 마당극 양식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고 기성연극계 내의 활동에 집중하는 경향 변화를 겪게 됨으로써, 마당극 공연은 임진택, 채희완, 김명곤 등 각 연출가를 중심으로 독특한 색깔을 지니면서 각기 다른 집단에서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채희완을 중심으로 한 놀이패 ‘한두레’의 <강쟁이 다리쟁이>와 <뛰뛰빵빵>은 독특한 춤적인 마당극을, 임진택을 중심으로 한 ‘연희광대패’의 <밥>은 <나의 살던 고향은…>에서 이어지는 재담적이며 연극적인 마당극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배우 김명곤 역시 극단 ‘아리랑’을 창단하여(창단공연 <아리랑>) 마당극과 여타 양식을 혼합한 독특한 작품세계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들 작품은 주로 극장 공간에서 지식인과 중간층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지식인적인 관념성을 충분히 벗고 생생한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데에는 채 미치지 못하고 있으나, 1980년대 초반의 부진을 벗고 1970년대의 실험들을 작가 나름대로 정리하여 자신의 색깔을 만든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이 중 <밥>은 1985·1986년 간 전국 각 대학 초청공연의 형식으로 100회 이상의 장기공연에 성공한 최초의 작품이 되었으며, 마당극은 집단성과 자발성이 있는 관중을 대상으로 한 공연을 통하여 마당극다워진다는 것을 실증한 좋은 예가 되었다. 1980년대 초반의 수작은 서울보다는 오히려 지방의 마당극에서 나왔다. 1980년 봄 <돼지풀이>로 1970년대 <함평 고구마>의 역량을 살려나가고 있던 광주의 마당극운동은, 광주항쟁을 겪은 직후인 1981년에 <호랑이놀이>(극회 ‘광대’, 김정희 연출)부터 광주항쟁의 경험과 새로운 인식을 담기 시작한다. <호랑이놀이>는 광주항쟁 발발의 근원에 있는 미국이라는 외세에 주목하여 해방 이후의 정치적 흐름을 정리한 작품이다. 그 기본 발상은 마치 당시 대학의 정세분석형 마당극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또 이런 대학 마당극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지만, 광주항쟁으로 얻어진 인식과 생생한 체험적 정서를 작품의 구심력으로 삼고 있다는 점, 과감한 연출력과 안무 능력 등이 작품을 상투적인 관념적 작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성공으로 이끌었다. 또한 1980년에 창단된 제주 놀이패 ‘수눌음’(1983년 당국에 의해 해체당하고, 1987년 놀이패 ‘한라산’으로 재결성됨)은 1980년에 <땅풀이>, <항파두리놀이>를 비롯해, 1981년 <돌풀이>, 1982년 <잠녀풀이>, 1983년 <태손땅>으로 이어지는 부지런한 작품 활동을 전개한다. 특히 일제시대 세화리 해녀 투쟁을 그린 <잠녀풀이>는 균형 있는 구성과 집단적인 민중 인물형의 형상화에 성공함으로써 이 시기의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힐 만하다. 1980년대 초 서울의 마당극이 대학 안에서나 밖에서나 이렇다 할 만한 질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광주와 제주의 마당극이 이처럼 좋은 작품 성과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서울의 창작자들과는 달리 독특한 역사적 체험과, 이를 드러낼 만한 전라도 농민, 제주도 민중의 생활감각을 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보인다. 이후에도 광주와 제주의 마당극은 독특한 자기 색깔과 할 말을 유지하고 발전한다. 한편 1970년대 말에 시작한 노동자 등 기층민중 대상의 연극교육은 이 시기에 이르러 질적으로 발전한다. 제5공화국의 시작과 함께 1970년대 민주노조의 역량이 모조리 파괴되어 이들이 안정적인 탈춤반 등의 형태로 교육활동을 계속하지는 못했으나, 대신 이들은 공단 지역의 교회 청년회 등에서의 활동으로 연극교육의 역량을 축적해갔다. 특히 탈춤의 원형 전수나 완성된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교육과는 달리, 자신들의 체험을 짧은 토막 연극, 역할 바꾸기 놀이 등을 통해 표현하게 하는 방법이 이 시기부터 도입되기 시작하며, 탈춤과 연극뿐 아니라 풍물과 노래, 그림 등 좀더 일상적인 양식으로 그 관심이 넓어지게 된다. 특히 가톨릭농민회 조직을 바탕으로 마을 풍물패를 구성할 수 있었던 농촌의 경험으로 풍물은 연극 등 다른 예술교육에 앞서 정서 결집과 조직력 고양 등에서 중요한 예술임을 깨닫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본격화된 노동자·농민에 대한 연극교육의 기본발상이 이 시기에 만들어지며, 공동창작방법론과 같은 논리적 근거들이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마당놀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마당극이 정착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민예극장’의 마당극 역량을 지닌 손진책의 연출로 이루어진 마당놀이는 1981년부터 MBC(문화방송)의 기획으로 시작하여 해마다 계속됨으로써, 대형 상업적 마당극으로 자리를 잡았고, 김성녀, 김종엽, 윤문식 등 마당놀이 스타를 만들어내었다. 이 마당놀이는 <춘향전>, <방자전>, <놀부전>, <이춘풍전> 등 잘 알려진 우리 고전을 바탕으로 하여, 넓은 대중층에 고른 재미를 주었다. 한편 허규는 1981년 국립극장장으로 취임하면서 국립극장 야외에 놀이마당을 만들고, 1983년 <호랑이놀음>이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짧은 마당극을 묶어 공연하며, 1985년에는 서울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85 호랑이놀음>(허규 작·연출)을 공연함으로써 관제적 성격마저 드러낸다. 이러한 마당놀이라는 이름의 대중적인 마당극은 1970년대의 실험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이 시기는 마당극의 양식이 안정되고 작품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규모도 커지며 기초적인 기록과 이론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일정한 대중적 확산이 이루어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이영미(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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