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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연출가

과거에도 두레패나 궁중패 또는 걸립패 따위에서 꽹과리를 가장 잘 치는 사람으로 그 패의 앞잡이가 되어 지도하는 사람을 상쇠라고 하여, 오늘날 의미의 연출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본격적인 연출가의 출현은 아무래도 ‘신연극’이 시작된 이래로 보아야겠다. 협률사와 원각사에서 각종 연희가 공연되었을 때부터 현대적 의미의 연출가가 출현하기 시작했다고 하겠다. 특히 <은세계> 공연이 신파극이었나 창극이었나 하는 형식 논란에서 연출가의 존재가 분명해진다. 즉 진짜 연출가가 이인직이었나 아니면 창부(倡夫)였던 강용환이었나에 따라서 그 공연 형식이 다를 것이며, 이인직이었다면 보다 본격적인 연출을 하였을 것이다. 연출가의 등장은 스타 시스템에 의존했던 신파극에서 보다 확실해진다. 최초의 신파극단 ‘혁신단’ 의 단장이었던 임성구야말로 최초의 연출가였다고 하겠다. 그는 학력이 없었기에 과감한 한국적 번안과 스타일로 오히려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외에도 초기 신파극의 대표 연출가로 윤백남이나 이기세를 손꼽을 수 있는데, 일본 유학파였던 이들은 일본의 문사극(文士劇) 등을 수입하고, 연극의 공리주의적 성격을 강조하였으니 연극을 통하여 백성들을 계몽하고 가르치고자 하였다. 1920년대에 들면서 일련의 학생극 운동이 일어난다. ‘극예술협회’, ‘동우회’, ‘토월회’, '송경학우회' 등 많은 학생극 단체가 생겨나고, 김우진, 임세희, 박승희, 고한승 등이 연출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크게는 연극을 통해서 근대성을 계몽하고, 작게는 사실주의적 근대극 성립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우리 연극이 신파극에서 벗어나서 사실주의극으로 가는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하겠다. 이 학생극 운동에서 남은 연극 단체가 ‘토월회’로, 박승희가 1925년 광무대를 전속극장으로 계약하고 전문극단으로 출범하였다. 박승희는 자연스러운 일상어 사용과 사실적인 무대장치와 의상 및 구찌다데(口建. 정해진 대본 없이 배우의 임기응변에 따라 즉흥적으로 대사를 말하던 방식)가 아닌 상연대본을 사용하는 등 사실주의극 정착에 노력하였으며, 여배우들에게는 월급을 주기도 하였다. 박승희 혼자만의 악전고투로는 전문극단으로의 성과를 거두기에 미흡했으나, ‘토월회’는 1920년대 연극을 이끌었던 대표단체이며 박승희야말로 확실한 연출가로 기억되어야 할 선구적인 분이었다. 1930년대의 연출가로는 우선 홍해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극예술연구회’를 발족하고, 근대극 수용에 앞장 섰다. 일본에서 축지소극장(築地小劇場) 무대에까지 섰던 홍해성은 한국에 사실주의극을 정착시켰던 연출가라고 하겠다. 일본 근대극의 대가 오사나이 가오루(小山全薰)의 영향으로 북구 계통의 작품을 많이 올렸으며, 그를 통해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을 배우고 소개하였다. 1935년 동양극장으로 옮겨간 후에도, 그는 대중연극 속에서도 가능한 한 사실주의극의 기법들을 활용하려고 하였다. 극작가이기도 한 유치진은 ‘극예술연구회’ 제 2기의 연출가이다. 홍해성이 전파한 사실주의적 방법론을 고수하면서 창작극 발굴에 힘 쓴 공로가 크다. 이외에도 박진, 안종화, 서항석 등이 연출가로 활약하였는데, 박진은 당시 출범한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 연출에도 힘을 썼다. 일제 말기 ‘국민연극’에는 연출가들이 총동원된 듯 싶은데, 유치진, 나웅, 박진, 신고송, 안영일, 이서향 등의 이름이 보인다. 해방기에는 좌익 연출가로 나웅, 함세덕, 신고송, 이서향, 송영 등이 활약하였고, 우익 연출가로는 유치진, 이광래, 이진순, 이해랑 등이 활약하였다. 결국 좌익 연출가들은 월북하였고, 우익 연출가로는 유치진이 그 좌장이 되었다. 이진순은 1946년 말 북경에서 귀국하여 ‘극예술원’을 이해랑, 김동원 등과 창립하고, 이 극단의 해산으로 다시 ‘신협’의 전신인 ‘극예술협회’를 창단하는 등 그 활약이 돋보였다. 이후 6·25동란과 그 혼란기에 이해랑과 함께 연출가로 입지를 굳힌다. 이외에도 서항석, 이광래, 박진, 이원경 등이 꾸준히 활동하였고, 대중극단의 연출가로는 김춘광이나 박노홍 등이 활동하였다. 현대 연출가의 출현은 1960년대 동인제 극단 이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기 저마다의 신념으로 출현한 동인제 극단처럼, 연출가들도 다양한 연출기법을 신봉하고 실험했다. 김의경, 김정옥, 표재순, 허규, 이기하, 권오일, 유덕형, 방태수 등을 비롯하여 여성 연출가 강유정도 등장하였다. 특히 허규는 현대극에 전통연희의 부활을, 김정옥은 프랑스 유학파다운 부조리극을, 방태수는 감각적인 실험연극을, 유덕형은 브로드웨이의 아방가르드 연극을 선보여서, 새로운 연출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1970년대는 이러한 방향성들을 더욱 심화시킨 시기로, 연출가가 연극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뿌리찾기 운동으로 한국 연극의 정체성 정립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고, 연극계는 ‘극장주의 연극(Theatrical Theatre)’을 지향하였다. 새로운 연출가에 안민수, 오태석, 정진수, 최치림, 김효경, 윤호진, 손진책, 임영웅 등이 기존 60대 연출가에 가세하여, 이러한 연출에 박차를 가하였다. 1980년대는 정치적 저항담론이었던 마당극이 성행하였고, 임진택, 박인배, 김명곤 등의 민족극 계열의 연출가가 등장했다. 이들은 전통 탈놀이 연행방식을 기본으로 삼아서, 연출의 개념을 넓혔다. 1990년대에 들면서 마당극도 쇠퇴하기 시작했고, 포스트모던 사회답게 다양한 감각의 연출이 등장한다. 오늘날 김석만, 김광림, 최용훈, 이윤택, 김철리, 이병훈, 이상우, 김아라, 박근형 등 다양한 연출가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미원(연극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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