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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의 등장과 발전 시기

비록 일제 강점기였지만 1920∼1940년대는 한국 연극이 뿌리를 내린 중요한 시기이다. 바로 오늘의 연극계도 이 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연극적 갈래와 경향에 따른 인적 전통이 다 이 시기로부터 비롯됐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무튼 이 시대를 연 것은 ‘신극’이었다. 사실주의 방법론에 치중한 신극은 종래의 신파극 혹은 신연극에 대한 반성에서 수용됐다. 일본 신극 운동이 자극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광수는 1917년 ‘학지광’에 희곡 <규한>을 발표하였는데, 조혼(早婚)의 비극을 사실대로 묘사해 후대에 신극 정신을 잘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곧 나라 밖에서 불어올 거대한 태풍에 비하면 ‘바람 앞의 촛불’ 격이었다. 태풍의 진원지는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일본 도쿄였다. 1920년 이곳에서는 유학생 20여명이 참가한 극예술협회가 발족했다. 이들은 국내의 신파극을 낡은 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며 새로운 근대극을 모색하자고 외쳤다. 와세다대 유학생 김우진이 이 단체의 리더였다. 김우진은 이듬해 여름방학을 이용해 고국 순회공연을 이끌었다. 이들은 40일 동안 25개 지역을 돌며 조명희 작, 김우진 연출의 <김영일의 사> 등을 선보였다. <김영일의 사>는 제목 그대로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 김영일의 죽음을 다룬 작품으로 당대 현실에 대한 강한 문제제기를 담고 있었다. 그게 민족운동과 연계된 당시 신극의 대체적인 이데올로기였다. 또 하나 도쿄 유학생 단체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토월회다. 1922년 김기진 등이 모여 만든 이 단체도 이듬해 고국 방문 공연을 펼치면서 신극 전파에 나섰다. 그러나 몇 해 가지 못해 대중극 단체로 변모함으로써 당초의 소임을 다하는데는 실패했다. 1920년대 신극에서 1930년대의 근대극으로 넘어가는 이행기를 대표하는 연극 운동가는 김우진(1897∼1926)이다. 연극과 문학평론을 겸했던 그는 스웨덴의 스트린드베리와 같은 극작가가 되는 것을 소망했다. 창작 희곡은 물론 버나드 쇼의 희곡을 번역하는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대표작은 1926년 ‘조선지광’ 에 발표한 마지막 희곡 <산돼지>이다. 김우진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 원봉의 성격을 부각시키고자 사실주의에서부터 표현주의에 이르는 실험적 수법을 동원했다. 김우진의 선구적인 업적을 이어받아 본격적인 근대극을 실험한 이는 홍해성(1894∼1957)이다. 그는 김우진과 함께 극예술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근대극 운동에 인생을 걸었다. 그는 서구 리얼리즘을 이상적인 근대극으로 상정하고 연출 활동에 매진했다. 유치진의 <토막>, 이운방의 <검사와 사형수>, 최독견의 <승방비곡>,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등을 연출했다. 그의 주 활동무대는 당대를 대표하던 동양극장이었다. 신극운동은 새로운 극작가의 탄생을 이끌었다. 시대가 배출한 탁월한 극작가 가운데 유치진(1905∼1974)과 함세덕(1915∼1950) 이 우선 거론된다. 유치진은 <토막> <소> 등을 통해 식민지인의 고난찬 삶을 형상화해 사실주의극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서른다섯살에 요절한 함세덕 또한 <무의도기행> 등 독창적인 수작을 낸 촉망받는 이야기꾼이었으나 해방이후 좌익 월북작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최근에야 빛을 보았다. 1930년대 신극을 주도한 곳은 ‘극예술연구회’였다. 일본 유학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1931년 발족해 1938년 일제에 의해 해체될 때까지 신극 운동의 중심지였다. 유치진이 이곳 출신이다. 한편 이들과 길항 관계에서 1920∼30년대 사회주의적 경향극 등이 등장하는 등 해방 무렵까지 다양한 형태 연극이 시도되었다. 정재왈(연극평론가·LG아트센터 운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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