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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해와 새해가 마주하는 길목, 덕수에서 역사를 거닐다

문화포털 기자단 2017-03-03
묵은해와 새해가 마주하는 길목, 덕수에서 역사를 거닐다


서울 중심부 도심 아래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가 남아 있는 덕수궁. 덕수궁 안에는 저마다 사연 있는 전각(궁궐)들과 서양식 건축물이 오순도순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통식 전각과 현대식 건축물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서울 도심 5대 궁궐에서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입니다.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13층 정동전망대에서 한눈에 들어온 덕수궁 모습 ⓒ 문화포털 기자단 이상국

서울시청 서소문청사 13층 정동전망대에서 한눈에 들어온 덕수궁 모습 ⓒ 문화포털 기자단 이상국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됐는데요. 제 14대 선조 임금과 26대 고종 임금이 왕위에 올랐을 시기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정릉동 행궁을 임시 거처로 삼으면서 궁궐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죠. 이후에는 정릉동 행궁에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창덕궁 중건이 완공된 1609년에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정릉동 행궁은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이후 270여 년 동안 궁궐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경운궁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고종 임금이 즉위하면서였습니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규모로 현재 궁역(宮域: 궁전구역)의 3배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고종의 의지는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납니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덕수궁의 전각을 조금씩 허물어 내던 일제는 1919년 1월 고종 승하와 함께 본격적으로 궁궐 해체에 들어갔습니다. 고종의 승하는 1919년 3.1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죠. 특히 일제가 덕수궁 공원화를 추진하던 1933년에는 훼손 정도가 더 심했다고 전해집니다.


대한문 ⓒ 문화포털 기자단 이상국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 문화포털 기자단 이상국


필자는 파란만장했던 덕수궁의 근대 역사 자취를 느껴보기 위해, 동쪽의 정문인 대한문을 지나 덕수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덕수궁의 상징적 공간, '중화전'과 '석어당’


(왼쪽부터) 중화전 뒤로 석어당 모습 / 중화전에서 바라본 중화문 ⓒ 문화포털 기자단 이상국

(왼쪽부터) 중화전 뒤로 석어당 모습 / 중화전에서 바라본 중화문 ⓒ 문화포털 기자단 이상국


덕수궁에 들어서고 가장 먼저 마주한 곳은 정전인 중화전입니다. 중화전은 일반적인 궁궐의 법전 용도답게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사신 접대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었습니다. 원래 중층으로 지었으나 1904년 큰불이 나면서 단층으로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본래 덕수궁의 시작이 된 건물은 '석어당'으로 선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던 개인 사택이었다 ⓒ 문화포털 기자단 이상국

본래 덕수궁의 시작이 된 건물인 석어당 ⓒ 문화포털 기자단 이상국


중화전 뒤편에는 옛 임금님이 거처했던 집이란 뜻에서 생겨난 석어당이 있습니다. 중화전과 석어당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다른 점이 눈에 띄는데요. 가장 큰 특징으로 단청(목조 건축물에 그려놓는 무늬와 그림)을 들 수 있습니다. 흔히 단청은 불전이나 전통 전각 등의 특별한 건축물에 칠하는 것으로 개인 사택에는 칠할 수 없습니다. 궁궐 안에서 백골집(단청을 하지 않은 목조 건축물) 형태의 석어당을 만나는 것도 덕수궁에서만 느낄 수 있는 모습입니다.


같은 듯 다른 서양식 건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석조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좌측)과 석조전(우측) ⓒ 문화포털 기자단 이상국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좌측)과 석조전(우측) ⓒ 문화포털 기자단 이상국


이어 중화전 좌측 모퉁이를 돌면 서양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석조전이 나타나납니다. '돌로 지은 집'이란 의미를 지닌 석조전은 고종 황제가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에 시작하여 1910년에 완공된 대한제국 시기의 건물입니다.


덕수궁이 다른 궁궐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을 궐 안에 들인 이유는 개화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었기 때문인데요. 덕수궁 주변 정동에는 지금도 개화기에 외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학교, 외국 공관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석조전은 1919년 고종 황제의 승하 후 덕수궁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일본 미술품 전시장으로 사용되는 아픈 역사도 겪어야 했습니다. 이후 석조전이 복원된 건 2014년인데요.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의를 회복하기 위해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개관했습니다.


석조전 옆에 자리 잡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도 언뜻 보면 서양식 건축으로 비슷한 모양새를 띄고 있지만, 상징성에서 석조전과 큰 차이를 지닙니다. 석조전은 고종황제가 직접 지시한 건축물로 국제 외교를 위해 만들어졌다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1938년 일제가 미술관 용도로 건립한 것입니다.  


1950년 6.25 전쟁을 거치며 덕수궁은 또다시 크게 훼손될 뻔한 위기를 겪었다. 아직도 궁궐 곳곳에는 당시의 총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문화포털 기자단 이상국

6.25 전쟁을 거치며 아직도 궁궐 곳곳에는 당시의 총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덕수궁 ⓒ 문화포털 기자단 이상국


또한 덕수궁에는 고종이 정무를 맡아 보던 편전이자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된 준명당, 광해군과 인조의 즉위식이 열린 즉조당이 존재합니다. 특히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 사건이 일어나고 창덕궁이 불타자, 인조는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즉조당이라는 명칭도 이때부터 사용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동양 문화와 서양 건축 양식을 절충하여 연회장으로 설계한 정관헌, 외국 사신을 접견하기 위해 정사각형으로 지어진 덕홍전, 고종이 승하한 함녕전까지 모두 덕수궁에서 만나 볼 수 있는 건물입니다.


서울에 살며 덕수궁 대한문 앞의 거리를 셀 수 없이 지나쳤지만, 직접 궐 내 구석구석을 자세히 둘러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덕수궁 궁궐 내부를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곳곳에 남아 있는 오랜 역사의 흔적을 느꼈습니다. 과거, 일제 강점기라는 아픔도 있었고, 전쟁이라는 위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제대로 보존하여 미래 세대에게 잘 알려줘야 하는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의 몫이 아닐까요. 방학을 맞은 가족들과 함께 한겨울 궁궐을 거닐며 호젓한 분위기를 느껴보세요. 묵은해와 새해가 지나치는 길목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걷는다 생각하면, 익숙한 궁궐도 의미가 색다르게 다가올 테니까요.


* 덕수궁 정보

- 관람시간 :  9:00 ~ 21:00 (매주 월요일 휴관)

- 관람요금 : 개인(만25세~64세) 1,000원 / 단체(10인 이상) 800원 (할인 및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참조)

- 덕수궁 관람 해설 : 화 ~ 일(공휴일 포함) 11:00 ~ 16:30 운영

- 문의 : 02-771-9951(사무실), 02-751-0734(안내실), 02-751-0753(석조전 안내실)

- 홈페이지 : http://www.deoksugun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