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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첫 번째 서양화가 고희동 화백의 자택

문화포털 기자단 2015-12-11
우리나라 첫 번째 서양화가 고희동 화백의 자택

우리나라 첫 번째 서양화가 고희동 화백의 자택

- 북촌(서울 원서동) 고희동 가옥 -

 

 

비 온 뒤 방문한 고희동 가옥은 촉촉하게 젖어 그 고고함이 더했습니다. 백 년의 시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고희동 가옥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고희동 선생님의 정신이 담긴 고희동 가옥을 소개하겠습니다.

 

 

 고희동 가옥 현관문

 원서동 고희동 가옥의 현관문 문화포털 기자단 이난희

 

 

고희동 가옥을 지은 춘곡 고희동 선생은 1886311일에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899년 한성 법어학교에 입학했고 1909, 예식 관으로 재직 중 일본 동경미술학교 양화 과로 관비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1915년에 일본에서 귀국하여 1918년 직접 이 고희동 가옥을 설계했습니다. 고희동 선생이 이 가옥에서 41년간 생활하면서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당대 문화인들과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고희동 가옥은 한국에 있어서도 근대 예술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당에 세워진 춘곡 고희동 선생의 동상 문화포털 기자단 이난희

 

 


 

눈길을 사로잡는 마당의 거목과 목련 나무 문화포털 기자단 이난희

 

 

가옥의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깔끔하게 정리된 정원과 가운데 있던 거목과 목련나무, 탁 트인 마당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했습니다. 마당 앞에 놓인 큰 가옥은 마치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정겨운 느낌을 주었습니다. 옆에 난 샛길을 통해 들어선 가옥 내부에는 노년의 자원봉사자분들이 고희동 가옥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에 쉬운 관람이 가능했습니다.

 

 

화실
  

 선생이 작업했던 화실재현 고희동 가옥 안내문

 

 

고희동 가옥은 수십 년의 역사를 지닌 만큼, 일제 강점기 한옥 살림집의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근대건축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관 너머 내부에는 각 방을 이어주는 복도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가옥과는 다르게 고희동 가옥에는 안채와 사랑채를 잇는 복도가 있었는데, 이는 서양식 건축물의 특징이 반영된 것이라고 합니다. 창문들도 창호지를 바른 일반 한옥과는 다르게 유리로 만든 창문이었습니다. 생활공간 외에 이 가옥 안에는 화실을 따로 두었다는 독특한 특징도 있습니다. 고희동 선생은 이 화실과 가옥 안에 있는 사랑방에서 자주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화실과 사랑방은 모두 온돌방이었다고 하니, 우리의 것과 새로운 것을 조화롭게 활용한 고희동 선생의 지혜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사랑방

작업과 손님을 맞이하는 용도의 사랑방(재현) 고희동 가옥 안내문

 

 

복도의 오른쪽은 가족들이 생활하던 방을 그대로 재현해 두었습니다. 복도 왼쪽으로 돌아가니 그곳에선 고희동 선생과 관련된 사진, ,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어 선생과 가옥의 역사에 대해 볼 수 있었습니다.

 

 

 

 현판

 효봉스님이 쓴 산색연천(산의 아름다움이 하늘에 닿았다)’현판 문화포털 기자단 이난희

 

 

고희동 선생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에도 서양화를 전공했고, 귀국 후에도 쭉 서양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일본 유학을 마칠 때 그린 자화상 세 점의 유화가 지금까지 존재한다고 하는데, 그중 1915년에 그린 <부채를 든 자화상>(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화 작품이며 등록문화제 제487호입니다. 고희동 선생의 부친인 고영철 선생은 역관으로 중국에서 영어를 배운 개화기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고희동 선생은 백관 양성 교육기관인 한성 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그곳에서 프랑스 도예가 르미옹(Leopold Rem ion)을 통해 서양화를 접한 것이 서양화를 그리게 된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귀국 초기에는 서양화를 그렸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서양화를 볼 줄 아는 안목이 부족했고 서양문물에 대한 안 좋은 시선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 선생은 1925년 이후 동양화를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전 현수막

 춘곡 고희동 50주기 특별전 홍보 현수막 문화포털 기자단 이난희

 

 

복도를 따라 옆방으로 건너가니 선생이 그린 동양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올해는 1022일부터 시작된 <춘곡 고희동 50주기 특별전>이 가옥 내에서 개최되어, 평소에는 볼 수 없던 다른 작품들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과석도>, <산수도>, <추경산수화> 등의 춘곡 고희동 선생이 그린 동양화는 서양화의 특징도 있어 일반적인 동양화보다 화려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색채에서도 주로 파란색을 사용했고 서양화의 기법인 원근법과 명암을 적용했다는 점도 눈에 띄었습니다. 외손녀에게 창덕여고 입학 기념으로 그려주었다는 <모란도>는 춘곡 고희동 선생의 손녀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입니다. 춘곡 고희동 선생의 그림 외에 옆방에는 선생이 아끼던 제자들의 그림도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대부분 이번 특별전을 위해 춘곡 선생의 주변 분들이나 가족이 대여해준 작품이라고 합니다.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한국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춘곡 고희동 선생. 그분이 41년 동안 머물며 활동했던 고희동 가옥에는 그의 열정과 정신이 녹아있었습니다. 이번에 춘곡 고희동 선생의 자취를 따라 고희동 가옥에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 고희동 가옥 관람 안내

소재지 :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538 (원서동 16)

개관 : ~일요일, 오전 10~오후 5휴관 : ~화요일

문의 : 02-2148-4165

 

- 작성자 : 문화포털 기자단 이난희() / 정미리(편집)